[9]櫝 · 邪淫
강정길의 얼굴은 술이 들어갈수록 자못 심각해졌다. 마치 술로 삭이려는 괴로움이 외려 술로 인해 더욱 팔팔하게 되살아나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미스 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서 드세요 밝은 날이 오겠죠. 안 그래요? ’
뜬금없는 미스 윤의 한 마디에 강정길은 마치 바늘에라도 찔린 사람처럼 숙였던 고개를 쳐들고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사실 그는 미스 윤이 자기에게 한 얘기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렇듯 골똘한 생각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 ‘골똘한 생각’이란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젊은 여성이 젊은 남성의 육체를 요구하는데 그것을 외면한다는 것은 속된 말로 받아 놓은 밥상을 물리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이미 굳혀 놓고 있었던 것이다. 미스 윤에게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자신도 아내가 있는 몸이 아니고 보면 두 남녀가 서로 성적 욕구를 해결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한 육체 결합이요 게다가 둘 다 유부녀와 유부남이 아니니 그 육체 결합을 淫行이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에 골똘해 있을 때 미스 윤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 소리가 새떼를 후리듯 강정길의 생각들을 일시에 날려버린 것이었다.
“지금 나한테 뭘 물었었나요? ’
“뭘 물은 게 아니라 살다 보면 어두운 날도 있지만 그 반대로 밝은 날도 많다는 얘기였어요”
강정길은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사람처럼 말하는 그녀의 말투에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계셨어요? ’
“대답할 수 없습니다.”
“어머, 왜요? ’
“거짓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서… 혹시 오악이라는 말 들어봤어요? ’
“아뇨. 그게 뭔데요? ’
“불교에서 다섯가지 계율을 어기는 악한 일을 오악이라고 하지요”
강정길의 목소리는 홀 안의 소음에 묻힐 듯 묻 힐 듯하며 간신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 첫째가 살생이고 둘째가 투도 즉, 도둑질 이고 셋째가 사음이고…”
“사음은 뭐예요? ’
미스 윤이 강정길의 얘기를 중도무이 되게 했다.
“자기 아내나 남편이 아닌 사람과 음행을 저지르는 겁니다.”
“넷째는요?'
“망어라고 해서 진실치 못한 허망한 말, 즉, 거짓말을 뜻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라쇼? ’
'음주.'
“그럼 술 마시는 것도… 아니, 술 마시는 것도 살생하는 거랑 도둑질하는 거랑 아내나 남편 있는 사람이 다른 남자나 여자랑 바람 피우는 일처럼 그렇게 나쁜 일이란 말예요? ’
“그렇다고 돼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난 강정길은 마치 어깃장이라도 부리듯 대포잔을 들어 입에 붙였다. 술을 넘기는 그의 목울대가 서너번 오르내렸다. 그는 반쯤 남은 대포잔을 내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
“왜 날 만나자고 했지요? ’
'...'
“내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
'...'
미스 윤은 적면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바알갛게 물들인 얼굴에 웃음만 가득 띤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고 있는 강정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녀는 자신의 빈 잔으로 눈길을 떨구며 말했다.
“제 잔도 좀 채워 주세요”
“일부러 따르지 않고 있는데 … 괜찮겠어요? ’
“석 잔밖에 안 마셨는 걸요.”
“아니, 석 잔이 적은 술입니까?'
“저 이래 봬도 술 잘 마신다구요.”
강정길은 염려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쳐다볼 뿐 술잔은 채워줄 생각은 않고 있었다.
사실 말이 쉬워 석 잔이지 대폿잔으로 석 잔이 라면 한 되 가까운 양이었다.
“전엔 · · · ”
“전에도 술을 잘 마셨다고요. 그리고 전엔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았었어요. 냄새만 풍기지 않고 있으면 술 마셨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요 그런데 체질도 세월 따라 변하더라고요 내 얼굴 흉하게 붉어요?'
그녀의 물음에 강정길은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어주었다. 1년 반도 지나지 않은 동안을 거창하게 ‘세월’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보기 흉해요?'
“흉하진 않지만 술을 마셨다는 건 역력합니다. 아까 내가 한 말은 전엔 술을 못했었잖느냐 이겁니다.”
“오히려 전보다 술이 줄었어요. 나이 탓인가봐 요”
강정길은 또다시 소나기 웃음을 퍼부었다. 그리고 웃음 끝에 입을 열었다.
“세월이니 나이니 하니까 마치 할머니 얘길 듣고 있는 기분입니다.”
“이년도 채 못되는 기간이지만 제겐 십년도 훨씬 넘는 것 같아요. 십년이 뭐예요, 이십년도 더 되는 것 같다고요 참으로 괴로웠어요.”
미스 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 그늘로 그녀가 그 동안 얼마나 신산한 삶을 살았는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강정길은 그녀를 위로해 줄 양으로 말했다.
“아까 미쓰 윤이 그랬잖아요. 살다 보면 어두운 날도 있지만 그 반대로 밝은 날도 많다고. 자아, 술이나 듭시다.”
강정길이 그녀의 빈 잔을 채웠다. 그녀는 잔이 차기 바쁘게 양 손으로 받쳐들고 입으로 가져가 오랫동안 마셨다. 그는 그녀가 술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그래 어서 마셔라. 그리고 취한 혀로 말해라. 나의 육체가 필요하다고. 그러면 나도 말하마. 나도 네 육체가 필요하다고. ’
그녀가 오랫동안 입에 붙이고 있던 술대접을 내려 놓았으나 그의 눈은 아직도 그녀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바알갛게 상기된 얼굴에 엷게 스민 우울기가 그에게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으로 느껴 졌다.
강정길은 초조했다. 심장의 박동이 고막을 두드려 댔다.
‘뭐라고 말할까? 너와 단 둘이서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할까? 그 동 안에 새 애인이 생겼느냐고 물어볼까? 아냐, 아무 말도 필요 없어. ’
강정길은 탁자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바라 보았다. 고막을 울려대는 심장의 박동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가늘고 긴 손가락 끝의 진분홍 매니큐어가 영산홍으로 그의 뇌리에서 소담스레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은 벌을 부르고 벌은 꽃을 찾는 거야.’ 강정길의 손이 안주접시 위를 지나 그녀의 손등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순간 그녀의 손이 움찔 굳어졌다. 그 움찔거림에 강정길의 손은 반사적인 힘을 냈다. 마치 달아나는 것을 쫓으려는 추적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손등을 누르고 있던 강정길의 손은 이제 완전히 그녀의 손을 쥐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미스 윤이 손을 탁자 밑으로 옮겼으므로 그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강정길의 팔은 탁자 위에서 크게 활을 그렸다.
탁자 밑에서 마주잡고 있는 둘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와 촉촉해졌다. 미스 윤이 강렬한 시선으로 강정길의 눈을 쏘아보며 물었다.
“강선생님, 애인 있으시죠? ’
뜻밖의 질문을 받자 당황한 강정길의 손에 힘이 빠졌다. 이제는 미스 윤의 손에 그의 손이 잡혀 있는 꼴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정말이세요?'
계속된 미스 윤의 질문에 그는 이번에도 고개 만 끄덕여 보였다. 그녀가 손에 힘을 뺐으므로 둘의 손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그럼 제가 중신할까요?'
'...'
“졸업반인 여대생이에요”
강정길이 쓰다 달다는 말 없이 애매한 웃음만 띠고 있자 그녀가 다시 확인했다.
“정말로 애인 없어요?'
“뭣 때문에 거짓말을 합니까. 왜, 애인이 있는 것 같아요? ’
“강선생님 같은 미남에게 아직 애인이 없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군에 계실 때 결혼했다는 그 애인을 아직도 못잊으셨나요?'
강정길은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의 뇌리에는 떠난 여자의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오랜 풍상 속에서도 마모되지 않는 비문처럼. 그러나 그 여자 때문에 다른 여자를 사귈 수 없다거나 더욱이 독신을 고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복수심으로 당장에 여봐란 듯이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선생님, 주소 좀 적어 주세요”
“주소?'
“네, 제가 연락을 드릴려면 편지를 보낼 수밖에 없잖아요? 저한테도 연락할 전화가 없으니… 미국 같은 나라는 한 집에서 전화를 몇 대씩 놓고 산다던데 우리는 전화 한 대 타내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담도 어려우니… 주소 좀 적어 주세요”
“미쓰 윤이 날 만나자고 한 게 여자 소개시켜 줄려고 그런 겁니까?'
“그 생각은 조금 전에 한 거예요 용기가 나지 않아 여태 망설였었는데… 실은 제가 소설을 한 편 썼거든요 소설이라고 쓰긴 썼는데 이런 것도 소설이 되는 건지 한번 봐주십시고 부탁 드릴려고요.”
“소설가도 아닌 내가...”
“선생님은 시인이시잖아요.'
미스 윤은 자신의 왼쪽 빈 의자에 놓았던 핸드백을 집어 들고는 딸깍 쇠를 풀었다.
“난생 처음 써본 소설이에요.”
미스 윤이 핸드백에서 꺼낸 원고 뭉치를 내밀며 말했다. 그녀로부터 원고를 받아든 강정길은 일시에 맥이 풀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먹지도 못 할 제사에 절만 죽도록 한 꼴이었다.
‘이 여자가 날 만나자고 한 용건이 바로 이거였군.’
그는 허탈한 웃음을 웃고 나서 풀기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읽어는 보겠지만 미쓰 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연락 드릴 수 있는 주소도 좀 가르쳐 주세요.”
핸드백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든 미스 윤의 눈길이 강정길의 입에 머물렀다. 그가 불러주는 주소를 받아 적은 미스 윤이 다시 한 마디 했다.
“제가 강선생님께 소개하려는 여자, 아주 괜찮은 여자예요. 기대하셔도 된다고요. 되도록이면 빠른 시일 안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
“솔직하게 털어 놓는 건데요, 만약 제가 남들 처럼 제대로 배운 게 있고 또 과거만 없었더라면 강선생님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소개시키지 않을 거예요.”
미스 윤의 목소리는 술기에 젖어 있긴 했으나 어눌한 편은 아니었다. 평소에 지니고 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강선생님, 전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생각 같아선 밤새도록 취하고 싶지만요, 남의 집살이라 너무 늦게 들어가면 눈치가 뵈걸랑요. 편지 드릴께요.”
“그럽시다.”
핸드백을 들고 일어서는 미스 윤을 따라 강정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10] 勇斷
속담에 ‘누운 소를 탔다’는 말이 있다. 일을 아주 쉽게 이루었을 때 쓰는 말인데 이번 강정길의 취직이야말로 누운 소를 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새 직장인 기관지 ㅂ편집부의 한 책상을 얻게 된 것은 어제의 일이었다.
어제 아침, 강정길은 ㅇ지 주간을 찾아갔었다. 그가 나타나자 ㅇ지 주간은 인사조차 받는둥 마는둥 하고 취직에 관한 얘기부터 꺼냈다. 재무부 산하기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편집부에서 사람을 하나 구하는데 의향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제 입장에서는 감지덕지해야 할 판입니다만...'
강정길은 하던 얘기를 멈추고 잠시 여짓거리다가 계속해 말했다.
“혹시 요전에 있었던 그 일 때문에 저쪽에서 절 꺼리지 않겠습니까? ’
그 일이란 3선개헌반대 서명운동을 가리킨 것이었다. 물론 o지 주간도 그 일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냉큼 알아차렸다.
“그 일이야 경찰서 보안과에서 일단 접어두기로 한 게 아닌가. 난 지리산 공비토벌 때 전사한 자네 부친 음덕으로 일이 잘 풀린 걸로 알고 있네.”
“그렇습니까?'
“그때 내가 만난 형사의 얘길세.”
'하지만…”
'하지만 어떻단 말인가? 왜? 또 그런 서명운동에 가담할 작정인가?'
“아, 아닙니다.”
“그러면 됐네. 3선개헌반대운동 서명자라고 써 붙이고 다닐 것도 아닌데 뭔 걱정인가. 내가 추천서를 써줄 테니 그걸 갖다주면 돼. 그리고 그 일에 관해선 시치밀 뚝 떼고 있으면 되는 거야.”
그 추천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강정길이 임시 사원으로 o지에 1년 반 정도 근무했다는 것과 그 동안 겪어본 결과 매우 성실하며 문장력이 뛰어나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책임지고 천거하니 선처 바란다는 것이었다.
강정길에게 그 추천서와 이력서를 받아 한 눈으로 훑어본 ㅂ지 편집부장은 마치 지정좌석표를 받아 든 안내인이 앉을 자리를 찾아주듯이, 그렇 듯 간단하게 빈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저 끝 빈 책상을 쓰시오. 며칠 후 전체적으로 책상 위치를 다시 조정할 예정이오”
“오늘부터 근무합니까?'
“왜, 바쁜 일이라도 있소?'
“그렇진 않습니다만 이렇게 빨리 결정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근무하는 걸로 하시오.”
“아닙니다. 일거릴 주시면 오늘부터 근무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우리가 만드는 게 어떤 잡진지 그 성격이나 파악한 뒤 일찍 퇴근하시오.”
편집부장이 사환을 시켜 지난 달치들을 한데 철한 보관철을 가져오게 하여 강정길에게 건네 주었다.
“기관지가 돼 놔서 상업잡지처럼 아기자기한 맛은 없지만 그 대신 상업지처럼 경쟁지가 있는 게 아니니까 그다지 골치 아픈 일은 없을 거요.”
“부장님, 여러분에게 인사부터…”
“아,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편집부장은 무렴함을 날리려는 듯이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고 나서 강정길이 제출한 이력서를 펼쳐 들고 죽 읽다시피하고는 편집부 직원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소개가 끝난 뒤 제자리로 돌아온 강정길은 ㅂ지 과월호들을 대충 검토하고 나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오늘이 이틀째 날이었지만 아직 새달치의 잡지 일이 시작되지 않아 강정길은 오늘도 묵은 잡지를 뒤적이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신입인 주제에 일이 없다고 다른 직원들처럼 외출을 하기도 민망하고 신문을 보자니 눈치가 뵈고 다른 직원들의 얘기판에 끼 어들기도 쑥스러워 해종일을 그야말로 절에 간 새색씨 꼴로 책상을 지키느라고 엉덩이가 무를 지경이었다. 그런 판국에 퇴근시간을 맞이했으나 그렇다고 냉큼 사무실을 빠져나올 수도 없는 노 룻이었다. 퇴근에도 ‘신입’이라는 딱지가 걸리적 거렸다. 그래서 이때나 저때나 하고 눈치를 살피고 있자니 하나 둘씩 사무실을 빠져 나가고 남은 인원이 강정길을 포함한 3명이었다. 그 중 하나는 사환 아이였고 다른 하나는 책상의 위치로만 따진다면 고참에 속하는 직원이었다.
강정길이 그에게 먼저 퇴근하겠다고 인사를 하고 나갈까 망설이고 있는 참인데 그가 읽던 신문을 접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강형이라 하셨던가요?'
“네, 강정길입니다.”
강정길은 그의 성씨가 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아 은근히 켕기는 마음이었다. 혹 얘기를 나누 다가 호칭을 쓸 경우가 생긴다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그가 강정길의 그런 속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했는지 자신의 성명을 밝 혔다.
“난 최명남이오. 강형, 오늘 뭔 약속이라도 있습니까? ’
“없습니다.'
'나하고 대포 한 잔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내가 사겠습니다.”
“술 얘길 꺼낸 건 나요 어쨌든 나갑시다.” 강정길이 최명남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申告酒라는 게 있잖습니까. 그러잖아도 언제 신고줄 사려던 참인데 …”
앞장서서 걷던 최명남이 걸음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뒤돌아 보며 물었다.
“나한테요? 왜요?'
“그게 아니라 우리 편집부.전원에게 신고식을 겸해서 술 한 잔 사려고 했단 얘깁니다.”
강정길의 말에 최명남은 놀란 표정을 풀고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마치 자신의 큰 키를 자랑이라도 하듯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강정길은 보폭을 넓히고 잰걸음질을 쳐 그의 옆으로 다가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전에 자신 의의례적인 얘기에 왜 그가 그렇듯 놀란 표정을 지었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뭔가 오해를 했었겠지 싶어 그 생각을 접어두기로 했다.
“이 골목 사정에 밝으십니까?'
최명남이 걸음을 늦추며 돌린 고개를 숙여 강정길을 내려다보았다. 강정길의 키가 최명남 귀에 닿을 정도로 작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의 태도에는 확실히 강정길을 턱없이 낮춰 보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걸음걸이만 해도 왠지는 모르나 일부러 보폭을 크게 떼놓아 강정길로 하여금 부지런을 피우게끔 만드는 듯 했다.
“난 이 동넨 이번이 첨입니다. 좋은 데라도 있습니까?'
“썩 좋은 곳은 아니지만 괜찮은 실비집이 있어요. 안주도 다양하고 값도 싸고. 내 단골집입니다.”
강정길이 최명남을 따라 그의 단골집에 들어섰을 땐 이미 퇴근한 샐러리맨들로 홀 안이 꽉 차 있었다. 그러나 불편하긴 했지만 구석에 빈 자리가 남아 있어 둘은 자리를 잡고 앉을 수가 있었다.
“여러가지 안주가 있긴 한데 … 제육볶음이 어 떻습니까?'
“난 원래 잡식성이라 가리는 음식이 없습니다.” 잡식성이라는 말에 최명남은 한 차례 너털웃음을 쏟아 놓고 나서 술과 안주를 시켰다. 그리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물었다.
“김진학이하곤 그전부터 아는 사입니까? ’
김진학은 편집부장의 이름이었다. 직장의 상사 이기도 하거니와 나이 차이도 10년 쯤은 위인 사람을 마치 아랫사람이라도 가리키듯 했으므로 강 정길은 냉큼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김진학이랑 어떤 관곕니까?'
“부장님 말이죠?'
강정길의 반문에 최명남은 고개만 끄덕였다.
“어제 첨 만나 뵈었습니다. 전에 근무했던 잡지사 주간 선생께서 추천서를 써 주시기에 찾아 뵈었는데 뜻밖에도 … 사실 난 그렇게 쉽게 취직이 되리라곤 생각도 않았었습니다.”
“그 잡지사가 더 나을 텐데 왜 이리로 자리를 옮겼지요?'
강정길은 최명남의 무례한 질문 공세에 기분이 상했으나 텃세를 부리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꾹 눌러 참았다.
'...'
“스카웃당해 온 겁니까?'
“그게 아니라 거기선 임시직이었거든요”
강정길은 ㅇ지 주간이 주천서에다 쓴 그대로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도 마음이 켕겼다. 거짓말을 시켰다는 것보다 혹시 이 사람이 자기가 그곳에서 해고된 내막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아니, 뭐가 잘못됐습니까?'
강정길의 목소리도 굳어져 나왔다. 마치 심문 하듯 하는 최명남의 질문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궁금해서 몇 가지 물어본 것뿐입니다.”
“궁금하다니 뭐가 …”
그때 마침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왔고 그것을 기화로 최명남이 강정길의 말허리를 끊으며 말했다.
“술이 왔으니 우리 목부터 축이고 봅시다.”
최명남이 강정길의 빈 잔을 채웠으며 강정길은 그에게 주전자를 받아들고 그의 잔을 채웠다. 최명남이 그 잔을 들면서 말했다.
“우리 건배합시다.”
좀 전에 비해 훨씬 나긋나긋해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강정길의 굳어진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건배도 좋지만 그보다 우선 지금이 술자리가 어떤 술자린지 그것부터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의외의 반격에 최명남이 들었던 술잔을 되내려 놓으며 물었다.
“무슨 뜻이지요? ’
‘‘내가 사는 신고주인지 아니면 최형이 사는 환영주인지, 이도 저도 아닌 다른 어떤 목적이 있어 마련한 술자린지, 그런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마시자 이겁니다.”
강정길이 명료한 어조로 말하자 최명남도 더 이상 어쩔도리가 없었던지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기 시작했다.
“우리 둘 사이가 초면이나 진배없는 그런 사인데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대서 기분이 상했을 겁니다. 그 점 사과하지요. 그런데 나로서는 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거든요.”
“사정이라니요? ’
“실은 김진학이가 까닭없이, 아니 그 사람 나름대로 까닭이야 있겠지만 어쨌든 날 못잡아먹어 난리를 피우는 거요. 그래서 결국은 날 내쫓기 위해 강형을 채용했다 이겁니다.”
“난 이해가 안됩니다. 미운 사람을 쫓아내기 위해 작전상 필요하지도 않은 인원을 한 사람 채용했다는 얘긴데 그럴 수가 있는 일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김진학이란 자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오! ”
최명남의 어조도 단호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유가 뭡니까?'
“교정 실력이 없다, 문장력이 없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이긴 한데 실은 몇 달 전 회식 때 술을 먹고 전체 직원 앞에서 모욕을 줬더니만 그 일 때문에 그러는거요.”
'...'
“제 놈은 새 잡지가 나올 때마다 내가 쓴 기사, 내가 본 교정을 가지고 날 얼마나 모욕했는데… 지렁이도 밝히면 꿈틀거린다는 속담도 있잖습니까! ”
“우선 잔부터 비웁시다.”
이번에는 강정길이 먼저 잔을 들어 최명남의 잔에다 짤강 부딪뜨렸다. 둘은 똑같이 단숨에 비운 잔을 서로 교환하여 말없이 술을 채웠다. 그 들은 됫술 세 주전자를 그렇게 말없이 비워냈다.
술기운으로 알근해진 최명남이 한숨 끝에 말을 달았다.
“사실 내가 오자를 잘 내고 또 문장력이 신통찮다는 건 나 자신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 놈은 구린 데가 없느냐 이겁니다. 장갈 좀 일찍 들긴 했지만 나도 제 놈처럼 애가 셋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제깐놈은 나한테 별별 모욕을 다해도 괜 찮고 난 제까짓놈에게 망신을 주면 안된단 법이 있습니까?'
“그보다도 우선 이 문제부터 명확히 밝히고 넘 어 갑시다.”
“명확히 밝힐 문제가 뭐요? 아까부터 뭘 자꾸만 명확히 밝히자는 겁니까? ’
최명남의 혀가 자연스럽게 돌지 않고 있었다.
“이건 중요한 문젭니다. 뭐냐하면, 최형을 내보내기 위해 나를 채용했다는 걸 나는 무얼로 믿느냐는 겁니다.”
“세상에 비밀이 어딨습니까?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법 아닙니까! 새로 사람을 채용해서 그 사람에게 그 동안 내가 맡았던 일들을 몽땅 넘기고 난 그저 빈 책상 앞에서 빈둥빈둥 놀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깐놈이 얼마나 버티겠느냐, 기껏 한 달이면 제 풀에 지쳐 출근을 안할 게 아니냐, 작전이, 그 김진학이란 놈이 세운 작전이 바로 그런 작전인 겁니다. 사무실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는 줄 압니까? 어디 한번 알아보시오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인지!”
“자아, 우리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뜻에서 건배하고 일어납시다. 최형은 나 때문에, 적어도 나 때문에 직장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것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강정길은 잔을 들어 다시 한번 최명남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뜨리고 나서 마치 갈증난 사람 처럼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술집 앞에서 최명남과 헤어진 그는 네온이 휘황한 도심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안고 걷는 늦가을의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흐트러 뜨렸다. 넥타이도 어깨 너머로 날려댔다.
‘겨울을 재촉하는구나!’
앙상하게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씨융슝 바람을 갈갈이 찢고 있었다.
강정길의 눈 앞에 문득 탄알과 탄알 꽁무니의 뇌관을 치기 위한 공이, 그리고 그 공이가 퉁겨 나가게 하는 방아쇠가 크게 나타났다. 마치 투명 한 총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다시 커다란 한 폭의 만화로 둔갑했다. 편집 부장의 몸뚱이가 방아쇠로, 최명남의 몸뚱이는 탄환으로 그리고 그 자신의 몸뚱이는 공이의 모습으로 그려진 그런 만화였다.
‘… 장갈 좀 일찍 들긴 했지만 나도 제놈처럼 애가 셋이다 이겁니다 · · ·.’
최명남의 목소리가 고막을 울려댔따.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그 괴상한 만화 속에서 이제 그는 공이로 변신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