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뜻밖의 소식 두 통
ㅅ자 꼴로 펼쳐진 책이 강정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책을 읽다 잠이 든 것이었다. 낮잠이긴 했으나 지난 밤에 잠을 설쳤기 때문에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 잠을 깨운 것은 철대문을 두드려대는 소리였다. 단잠을 방해한 소음에 짜증이 일었으나 집을 봐달라며 외출한 주인 아주머니의 얼굴이 떠 올라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마당 쪽으로 난 여닫이를 삘쭘히 열며 물었다.
“누구세요?'
잠기가 덜 가셔 쉬지근하게 잠긴 그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퉁명스런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강정길씨, 등기속달이요! ”
'.........'
“도장 갖고 나오세요! ”
“저요?'
강정길은 얼떨결에 내지른 자신의 어리석은 반문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편집배원이 자기를 얼마나 병신스럽다고 흉볼 것인가 싶자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강정길씨, 도장 갖고 나오세요! ”
'네, 나갑니다.”
마음이 급하면 으레 뻔한 곳에 있는 물건도 눈에 잘 띄지 않는 법이었다.
허겁지겁 도장을 찾아들고 밖으로 나오자 햇살이 눈부셨다. 마치 한낮에 영화관에서 나온 것 같았다. 부신 눈을 삼빡거리며 빗장을 벗기고 대문을 열자 중년의 집배원이 자전거를 비스듬이 뉘어 자신의 허리춤에 기대놓고 서 있었다.
“강정길씨 본인입니까?'
과중한 업무 탓인지 집배원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그는 강정길의 입에서 이렇다 저렇다는 대답도 나오지 않았는데 손부터 내밀었다. 도장을 달라는 손짓이었다. 그의 다른 한쪽 손에는 쟁반처럼 들려 있는 편지봉투 위에 장기 알만한 휴대용 인주곽이 벌써 뚜껑이 열려 얹혀 있었다.
강정길이 내민 도장을 받아서 새겨진 글자를 들여다보며 집배원이 다시 물었다.
“강정길씨 도장입니까?'
강정길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집배원은 도장에 인주를 묻혀 편지봉투 한쪽 귀퉁이에 붙어 있는 특수우편물 수령증에 날인했다. 그 시간이 불과 2〜3초 정도일 텐데도 발신인에 대한 강정길의 궁금증은 여간 아니었다.
“어디서 온 겁니까? '
집배원은 대답 대신 봉투에 붙은 수령증을 잡아 떼고 강정길에게 건네 주었다. 그가 받아 든 봉투를 들여다보며 발신인을 확인하는 동안 집배 원은 벌써 자전거에 올라 앉아 페달을 밟아대고 있었다. 강정길의 입에서 나온 ‘수고하셨습니다’는 빈 인사가 되고 말았다.
“뭐가 들었기에 등기속달을 보냈지? '
그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마치 옆사람에게 하듯 소리내어 말했다. 편지 봉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몸담고 있던 월간교양지 O사의 로고가 인쇄된 것이었다. 등기속달이라는 우편제도는 그 우편물이 수신자에게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배달되게 하기 위한 장치이므로 강정길의 손에 들려 있는 봉투 속에는 그렇듯 중요한 내용물이 들어 있다는 얘기였다.
‘뭔 내용일까? ’
그는 잔뜩 긴장되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봉투를 뜯는 그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뜯낀 봉투 속에서 사연이 적힌 원고지와 함께 밀 봉된 또 다른 편지봉투가 나왔다. 우표에 소인이 찍혀 있는 조그맣고 깜찍한 꽃봉투였다. 그것은 그에게 어미 캥거루의 육아낭 속에서 나온 귀여운 새끼 캥거루를 연상케 했다. 그의 급한 눈길이 꽃봉투에서 발신인을 찾았으나 거기에도 발신인은 밝혀져 있지 않았다.
강정길은 우선 원고지 뒷면을 깨알 같은 글씨로 채우고 있는 김연호의 눈에 익은 글씨부터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품고 있는 모든 궁금증들이 그 속에 다 들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강형.
근간 어떻게 지냈소? 이곳은 나도 그렇고 최형도 늘 그 날이 그 날이오.
다름이 아니라 주간께서 강형에게 연락을 하라기에 몇자 적는 것이오. 주간 말씀인즉 생각지도 않게 한 지기로부터 믿을 만한 사람을 추천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오. 어디라고는 확실히 말씀은 않으시는데 어떤 기관지 편집부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오. 기관지기 때문에 외부 인사들에게 글을 청탁하여 싣는 것은 몇 꼭지 안되고 주로 내부에서 취재를 하여 쓴 글과 자료를 정리하여 싣는 원고가 태반인 모양이오. 때문에 문장력이 있는 사람을 구한다는데 주간 말씀으로는 강형이 그런 일이라도 할 의향이 있다면 추천하겠다고 하오. 또 주간 말씀으로는 자기가 천거했다고 해서 꼭 그곳에 취직이 된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은 아니라고 하나 내 생각으로는 만약 강형이 의향만 있다면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이력서를 한 통 작성해 가지고 와서 주간을 만나뵙는 게 좋을 듯하오
곧 만나게 될 테니 다른 얘기는 그때 하기로 하오. 오늘은 이만 줄이기로 하겠소
1969년 9월 29일 김연호 씀.
* 추신: 며칠 전 강형에게 온 편지가 있어 동봉하오. 여러 모로 보아 아가씨로부터 온 핑크빛 사연임이 분명한데 아마도 숨겨 놓은 애인인 모양이죠? 이런 아가씨를 두고도 강형이 우리에게 그토록 철저하게 내숭을 떤 생각을 하니 어이가 없소. 최형도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소. 속히 와서 모든 걸 명명백백하게 밝히시오
김연호의 편지를 읽기가 무섭게 강정길은 서둘러 예의 그 꽃봉투를 뜯고 알맹이를 꺼냈다. 내용의 글씨도 눈에 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역시 여자의 필체임에는 틀림없었다.
‘미쓰 윤인가? ’
편지 끝에도 발신인이 밝혀져 있지 않았으나 강정길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순전한 예측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예측은 적중했다.
그는 바탕에 은은한 연록색으로 꽃무늬가 인쇄된 고급 편지지 위에 펼쳐놓은 사연을 읽어내렸다.
강선생님께.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선생님을 뵌 지 벌써 1년 하고도 4개월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몇번이나 찾아뵐려고 생각을 했었지 만 그때마다 용기가 나지 않아 뒤로 미루곤 하다가 오늘에야 이렇게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누군지 궁금하셨죠? 선생님께서 O잡지사에 취직이 결정되던 날 어떤 여자 하나를 만났던 일 기억 나세요? 전, 그때 그 미쓰 윤이예요.
선생님, 꼭 한번 뵈었으면 해요. 선생님의 사정이 어떤지 알아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만날 장소와 날짜를 정하여 통보해 드리는 점 널리 용서하십시오. 9월 30일, 오후 7시(약도 뒷면) 명동에 있는 커피숍 코지코너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그럼 뵙는 날까지 내내 편안하시기 빕니다.
강정길은 그녀가 편지지 뒷면에 그린 약도를 보지 않아도 커피숍 코지코너를 잘 알고 있었다. O지에 근무하는 동안 청탁원고를 받기 위해 자주 들른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명동에서 약속을 하는 경우 가끔 이용하기도 했었다.
강정길은 또 다시 주인집 대청에 걸려 있는 괘종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녀가 통보해온 시간까지는 아직도 여덟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또 주인 아주머니는 점심 때가 되기 전에 들어오겠노라고 하고 나갔기 때문에 그것도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왜 하필 오늘이냐’ 싶어 은근히 신경을 쓰게 되었다.
강정길 혼자서 작정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실은 오늘 저녁, 그는 ㄷ출판사 편집장에게 술 대접을 할 생각이었다. 돈을 받기로 된데다가 또다시 일 거리를 맡게 된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르바이트로 ㄷ출판사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시동인지「풀잎」으로 인한 인연 때문이었다. 동인지의 제작 · 발행을 위탁한 곳이 바로 ㄷ출판사였던 것이다. 「풀잎」제3집의 교정 때문에 들른 강정길에게 그곳 편집장이 호의를 베풀었다. 3선개헌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가담하여 직장을 잃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노라며 많은 양은 아니지만 직장이 생길 때까지 일거리를 마련해 주겠 노라고 했다. 그가 그 동안 강정길에게 마련해 준 일거리는 매끄럽지 못한 번역원고를 潤文하는 일이었다. 그렇듯 고마운 사람에게 여태 저녁도 한끼 대접치 못해 강정길은 늘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일삯을 받는 날이겠다, 술 대접 한번 하려던 것인데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벼르던 제사에 찬 물도 못 떠놓는다더니만 하필이면 오늘일 게 뭐야. 그러나 저러나 왜 만나자는 거지? ’
강정길은 방으로 들어가 벌러덩 누우며 궁시렁 거렸다. 천정에 미스 윤의 여러 환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모래바람을 막으려는 투아레족처럼 외투깃으로 얼굴을 가려 눈만 빠꼼히 내놓은 모습이기도 했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이기도 했고, 눈 덮인 보도 위를 스키 타듯 길게 신발을 끌며 슈프르같은 평행선의 발자욱을 남기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도 귀에 생생했다.
강정길은 그녀를 반나던 날 취직이 결정된 것을 상기하며 오늘 받은 그녀의 소식 또한 그렇듯 길조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더구나 O지의 주간이 어떤 기관지의 편집요원으로 천거할 의향이 있다는 김연호의 편지와 함께 온 소식이고 보니 그로서는 그런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마치 아이들이 까치소리를 듣고 반가운 손님이 오리라고 기대하듯이.
강정길은 뉘웠던 몸을 일으켜 엉덩걸음으로 책상 앞까지 다가가서 그 위에 던져둔 편지를 다시 한번씩 읽었다.
그 때 철대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났다.
“총각, 총각! ”
“네, 나갑니다.”
강정길이 날렵한 동작으로 대문에 달려가 붙다 시피 하며 빗장을 벗겼다.
“혹 잠들어 있는데 깨운 건 아니우? 새벽녘까지 공불 하는 모양이던데......”
빗장이 벗겨지기 바쁘게 엷은 화장 내음을 풍기며 들어서는 주인 아주머니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나서 말했다.
“아닙니다.”
“나 없는 동안에 별 일은 없었수? ’
'네. 저한테 편지가 온 것 말구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의 눈길이 다시 한번 강정길의 얼굴을 훑었다.
“낯색을 보니 좋은 소식인 모양이구랴? 색시감 한테서 온 소식이우? ’
“원 아주머니두. 좋은 소식이긴 하지만 그런 소식은 아닙니다.”
강정길은 밝게 웃음지어 보이고 나서 방으로 들어선다.
[8] 邪 淫
서둘러 자취방에서 나온 강정길은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안 깊숙히에 자리잡고 있는 해장국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점심으로 해장국을 먹을 작정이었다.
「충청도집」이라는, 있으나 마나 한 간판이 붙은 그 해장국집은 강정길의 단골집이었다. 시장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집이어서 값도 헐하거니와 양도 또한 많았다. 뿐만 아니라 그집 할머니의 음식 솜씨가 맛깔스러워 외려 고급 음식점보다도 나았다. 때문에 강정길은 씻거나 끓이는 게 귀찮으면 그곳으로 달려갔고 연탄불이 꺼져도 찾았다. 대문을 나서면 5분도 채 안걸리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는 점도 그집을 단골로 만들게 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추석을 쇤 지도 벌써 두 파수나 지나서인지 시장은 그렇듯 흥청대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왠지 을씨년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충청도집만은 그런대로 북적거렸다. 점심 식사를 하는 축들이 있는가 하면 낮술을 마시는 축들도 있었다. 또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 국솥이 올려져 있는 화덕을 둘러싸고 선채로 입정을 놀려대는 축들도 있었다.
강정길은 들어서면서 해장국을 시키고는 화덕을 둘러싸고 서 있는 축들의 뒤에 난 빈 자리에 앉았다.
화덕을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이 놀려대는 입정은 끝이 없었다. 어떤 과부와 정을 통하다 마누라에게 덜미를 잡힌 한 사내가 그들의 도마 위에 올라 있었다.
“과부가 먼저 꼬리를 쳐댔다니까 김씨를 나무랄 수도 없지.”
“말이 그렇지. 김씨가 먼저 찝적대잖았어도 과부가 꼬리질을 했을까.”
“그건 모르는 소리야. 여자가 사내를 굶으면 남자는 내다 앉으라는…”
“아무렴 그럴라구”
‘허, 이 사람.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먼. 내 재밌는 얘기 하나 해 줄까? 우리 고향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효불효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뭔 다리?'
“효자다리라고 해야 되느냐, 불효자다리라고 해야 되느냐 판가름이 나질 않아서 붙였다는 이름인데, 그 ‘효불효다리’에 재미난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거든.”
강정길은 자신도 모르게 숟갈질을 멈추고 얘기를 늘어 놓는 사람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감색 점퍼 차림인 40대 중반의 그 사내와 눈길이 마주 쳐 강정길은 무렴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리박고 말았다. 그러나 귀만은 계속 그 쪽에 가 있었다.
감색 점퍼가 늘어 놓은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옛날, 강가에 한 과부가 살았다. 그 과부에게는 힘깨나 쓰는 총각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과부는 밤마다 그 아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강 건너 마을로 가서 새벽녘에야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과부의 그런 짓이 아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아들은, 깊은 밤에 강 건너 마을에 갔다가 이튿날 새벽녘에야 돌아오곤 하는 어머니의 행동이 수상하여 그 뒤를 밟은 것인데 뒤따라 가보고 나서야 그곳에 자기 어머니와 정을 통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뒤 아들은 아들대로 어머니 몰래 큰 돌들을 강으로 날라다 놓곤 하였다. 그리곤 얼마 동안 그렇게 날라다 놓은 돌로 징검다리를 놓았다. 징검다리가 완성되자 그 뒤로 과부는 옷을 벗지 않고도 강 건너 마을을 다녀올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어서 그런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네 여론이 둘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그 징검다리를 놓은 아들을 칭찬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욕을 했던 것이다. 칭찬하는 축은 과부 어머니를 위해서 다리를 놓았으니 효자라는 것이었고, 욕하는 축들의 주장은 죽은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며 불효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리 이름을 효자다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불효다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들에 똑같이 일리가 있었으므로 다리 이름도 ‘효불효다리’가 됐다는 얘기였다.
“자네들 같으면 그 다리 이름을 뭐라고 부르겠나?'
감색 점퍼의 물음에 모두를 ‘효자다리’로 불러야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깡마른 얼굴에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사내가 잠시 여짓거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얘기, 뭔가 잘못된 거 아냐?'
“잘못되다니?'
감색 점퍼의 키운 눈에서 검은 단추처럼 똥그란 눈동자가 반들거렸다.
“홀애비가 바람이 나 밤마다 강을 건너다니고 그 아들이 징검다리를 놔야 되는 거 아니냐구.”
모두를 거침없는 웃음을 쏟아댔다. 그런 웃음 끝에 감색 점퍼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엎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 아냐'’
“마찬가지가 아니지.”
“그러니까 자넨 아까 그 김씨 얘길 하려는 거지? 김씨가 먼저 찝적거려서 벌어진 일이란 말이잖아! ”
‘‘내 얘긴 김씨 사건도 사건이지만 아무리 과부라도 여자 쪽에서 어떻게 매일같이 사내를 찾느냐 이거야.”
안경이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여자가 남자들보다 더 독한 거 몰라? 그리고 이치도 그렇잖냐 말야. 굶은 사람이 몸달지 주는 사람이 몸달아하며 찾아다니는 거 봤어? '
감색 점퍼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감색 점퍼 옆의 대머리가 나섰다.
“아따, 이 사람들 이러다 쌈나겠군. 이제 그 얘긴 그만두라구. 기왕에 과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과부한테는 뭐니뭐니 해도 육보시가 최곤 거야.”
또 다시 사내들은 웃음보를 터뜨렸지만 해장국 집 할머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대포 한 잔씩들 했으면 나가서 장사들 이나 할 일이지…. 장사들은 아예 때려 치운 게야?'
“손님이 있어야 장사를 하든지 보시를 하든지 하지요.”
대머리가 대꾸를 하자 이번에는 할머니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저, 저놈의 입정! 사내들이란 모이기만 하면 그저……. 아니, 그래 그놈의 육두문자 아니면 할 얘기가 없냐구! ”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세상에서 보시 중에 육보시 따를 게 어딨으며 문자 중에 육두문자 당할 문자가 어딨습니까? '
“또 저놈의 입정! 어여들 나가! 나가서 한 푼이라도 벌 궁리나 해! 어여 못 나가? '
할머니는 출입문까지 드르륵 열어 젖히고 사내들을 몰아냈다. 그들이 우루루 밀려나간 뒤에도 그녀는 못마땅한 마음이 냉큼 가셔지지 않는지 계속 궁시렁거렸다.
강정길은 해장국 뚝배기를 깨끗하게 비운 뒤 물을 청해 그 물로 우물우물 입안을 헹구고 나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는 아까 그 사내들의 얘기를 듣다가 잠시 떠올렸던 생각을 펼쳐 놓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속으로 뇌까리는 그의 눈 앞에 미스 윤의 환영이 떠올랐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만나려는 목적이 성적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스 윤의 환영은 그녀가 알몸이 되어 강을 건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날 왜 만나자는 거지? ’
만남을 요구하는 행위는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계속해 가지를 치고 있었다.
'미쓰 윤에게 내가 왜 필요한가? ’
강정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신의 부질없는 생각들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였다.
해장국집에서 나온 그는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월간 O지 주간을 만나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볼일을 마치면 C출판사로, 그리고 ㄷ출판사에서 볼일을 마친 뒤에는 미스 윤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강정길이 예정대로 커피숍 코지코너에 도착된 것은 여섯시 10분이었다. 찾아간 곳마다 너무 일이 빨리 끝났기 때문이었다. 아니, O지 주간을 찾아간 일은 헛걸음질이 되고 말았었다. 주간이 조모상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삼우제를 지내고 곧장 올라온다 해도 앞으로 1주일 뒤가 되는 것이었다.
ㄷ출판사의 볼일은 다 본 셈이었으나 그곳 편 집부장도 마침 출타중이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강정길에게 줄 윤문료와 새로운 윤문거리 그리고 간단한 메모를 부하 직원에게 맡겨 놓고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그가 남긴 메모의 내용은 귀사 시간이 부정확하므로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정길은 혹시나 해서 묵은 신문까지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으나 허사였다. 미스 윤이 만나자는 시간이 되려면 한 시간 반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나 남의 사무실에 너무 오래 죽치고 앉아 있기가 민망해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커피를 시켜 놓고 앉아 5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때 뜻하지 않게 미스 윤이 나타났다.
수인사를 나누고 나자 강정길은 할 말이 없어 침묵을 지켰고 정작 만나자고 했던 미스 윤 쪽에 서도 웬일인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마주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기가 어색해 강정길이 말문을 열었다.
“전에도 미인이었지만 그 동안 한층 더 예뻐졌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한 말이긴 했으나 맘에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짓없는 느낌을 솔직하게 얘기했음에도 입에 발린 소리처럼 들릴까 염려스러워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때는 제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전혀 편칠 못했거든요 · ”
다행하게도 미스 윤이 얘기의 실마리를 쉬 풀 수 있게 했다. 그녀의 얘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선생님은 전보다 훨씬 못해지신 것 같네요. 전처럼 재미있는 말씀도 안해주시고.... 일이 고되신 모양이죠?'
강정길은 멋적게 웃어 보인 뒤 바닥에 깔리듯 남아 있는 싸늘한 커피로 입을 축였다. 그리고 나서 내키지 않는 말을 꺼냈다.
“신역은 아주 편해졌습니다.”
“그런데 어째 얼굴은 ..…”
“군댓살이 빠져서 그렇겠죠. 그리고 참, 까딱 했더라면 나 오늘 여기 나오지 못할 뻔했습니다.”
“바쁘시면 안나오셔도 되는데 ..… 제가 일방적으로 정한 거잖아요.”
“그런 게 아니고 내가 그 잡지살 그만뒀거든요”
“네에? 왜요? '
“얘길하자면 깁니다.”
“언제요? 제 편질 받으신 뒤로군요? ’
“그 전입니다. 김기자 아시죠? '
“전 얼굴을 보면 저분이 잡지사 분이구나 하고 알지만 성도 이름도 몰라요. 그냥 얼굴들만 알았었어요”
“어쨌든 그 친구가 보내줘서 받았어요. 오늘 점심 때 등기속달로 왔더라고요.”
“그랬군요. 전 그런 걸 까맣게 모르고… · ”
“그 친구가 속달로 보내지만 않았더라도 오늘 못 받아 볼 뻔했지요. 그랬으면 미쓰 윤이 날 얼마나 욕했겠어요 안그래요? '
“제가 왜 선생님 욕을 해요. 제가 일방적으로 한 약속, 아니 그러니까 약속이 아니지요. 그런 데 왜 그만두셨어요?'
'.....'
“강선생님,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 옛날 그 집에 가요. 그때 갔던 그 술집요 그러잖아도 제가 술 대접하려고 했거든요”
강정길이 말없이 웃고 나서 입을 열었다.
“취직됐다고 축하주 얻어 마신 게 엊그제 같은 데 그 동안에 실직자가 되어 위로주를 얻어 마시게 됐군요”
“그러고 보니 강선생님하고 저하고는 보통 인연이 아니네요 어서 일어나세요.”
강정길이 미스 윤을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위로주보담은 축하주를 마시는 게 낫잖습니까? 미쓰 윤, 뭐 축하받을 일 없어요? 이번에는 내가 사겠습니다.”
“전혀 없어요'
강정길이 미스 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물었다.
“날 만나자고 한 용건이 혹 축하받을 일이 아닌가요? ”
“그런 용건이 아녜요”
강정길은 미스 윤의 대답을 듣고 나서 ‘나를 만나자는 이 여자의 용건이 뭔가’ 하고 생각했으나 도저히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뭔 용건이죠 · ”
“선생님을 만나뵙고 싶었던 게 용건이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
“믿고는 싶지만 믿을 수가 없군요”
“그건 어째서죠? '
“거짓말이니까.”
“어머머, 선생님은 ...…”
미스 윤이 곱게 흘긴 눈으로 강정길을 바라보았다. 남의 맘을 몰라도 그렇게 모를 수가 있느냐는 힐난의 눈길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눈길에서 강정길은 성적 매력을 느꼈다.
‘그래, 이 여자가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은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 삼고 싶기 때문이었어. ’
강정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미스 윤이 왼팔로 그의 오른팔을 휘감듯 끼며 새처럼 빠르게 입을 놀렸다.
"선생님, 이래도 되죠? 남들은 다들 다정하게 팔을 끼고 걷는데 우리만 안그러니까 이상하잖아요 싫으세요? "
“싫긴, 싫을 리가 없잖습니까.”
강정길이 대답을 하며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나도 네가 필요하다. ’
그의 눈 앞에는 해장국집에서 보았던 그녀의 환영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가 알몸으로 강을 건너는 모습이었다. 국솥이 얹혀 있는 화덕을 둘러 싸고 서서 입정을 놀려대던 사내들의 말소리도 귀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섹스가 발기하고 있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때문에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