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退職
시간의 흐름을 완급으로 따질 때 그것은 무릇 주관적으로 결정지어지게 마련이다. 어떤 경우에는 一刻如三秋일 수도 있겠으나, 그와 반대로 三秋如一刻으로 느껴질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따질 때는 인생에 있어 2년도 채 못되는 기간을 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한창 일할 나이에 보낸 직장생활에 있어 서는 더욱 그렇다.
강정길에게 있어 0지 잡지기자 생활, 1년 4개월은 참으로 짧은 기간이었다. 어느새 1년 4개월 이나 흘렀지? 하고 손가락을 꼽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계산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주간실에서 나온 강정길은 편집장과 편집차장 그리고 수석기자 순으로 일일이 그들의 책상을 돌며 작별을 고했다. 한결같이 ‘會者定離’를 테 마로 한 인사말을 늘어 놓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특히 편집장의 악수는 요란했다. 물을 뽑아올리기 위해 펌프질을 하듯 요란하게 팔을 흔들어대며 수다를 떨었다.
“우리 인생은 따지고 보면 이렇게 헤어지려고 만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언제 헤어지느냐가 문제지만. 오늘 이렇듯 서운할 줄 알았으면 그 동안 정을 들이지 않는 건데 말야. 안 그래? ’
강정길은 아무 말 없이 무표정했으나 속으로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세요. 당신이 나한 테 정을 주지 않았듯 나도 당신한테 정을 준 적이 없다구요. 그러니 나나 당신이나 서운할 게 전혀 없잖습니까! ’
강정길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는지 편집장은 계속해 수다를 떨었다.
“강기잔 문장력이 있는데다 더구나 시인이니까 앞으로 얼마든지 여기보다 더 좋은 직장에서 일 할 수 있을 꺼야. 전화위복이 될지 누가 알아. 안 그러오? ’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 · “
강정길은 편집장에게 잡힌 손을 뽑고 편집차장 책상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고별 인사를 마친 뒤 책상 서랍을 정리한 사물보따리를 들고 사무실을 둥지는 그의 뒤를 따르는 발짝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최준태와 김연호 두 기자였다. 그들과는 너나들이를 하는 사이였다.
사무실 문이 닫기기를 기다려 강정길이 그들을 향해 나직히 말했다.
“왜들 나왔어? 편집장 눈 밖에 나면 어쩔려구.” 강정길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구데기 무서워 장 못담궈? ’
“걱정도 팔자로군.”
강정길은 그들의 우정에 콧날이 저려옴을 느끼며 웃음으로만 고마움을 표했다. 최준태가 강정 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힘을 내! 그리고 이따가 퇴근 후에 만나자구.”
“왜? ’
“왜라니, 이별주라도 한 잔 나눠야 되잖아! ”
최준태의 말에 김연호가 꼬리를 달았다.
“그 보따리, 집에 두고 저녁 때 나오라구. 아무리 세상이 험하긴 해도 이별주조차 나누지 못 한대서야 말이 안되지. 일곱시 정각에 명동극장 앞에서 만나자구. 알았지? ’
“나야 기왕에 찍힌 놈이니 상관 없지만 요시찰 딱지가 붙은 날 만나서 자네들에게 득될 게 하나도 없잖나. 공연히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지 말고 몸조심하는 게 좋아.”
“겁은 되게 많네. 달걀짐 지고 성 밑으로도 못간 다더니만 자네가 그 짝이야. 잔소리 말고 이따가 시간 지켜서 나와. 명동극장 앞에서 일곱시! ”
강정길은 김연호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고 나서 계단을 내리 밟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마음은 더없이 쓸쓸했고 괴로웠다. 비록 출입문 앞까지의 배웅이었지만 김연호와 최준태의 그런 배웅조차 없었다면 강정길의 마음은 한 층 더 아팠을 것이다.
그가 0지의 잡지기자 생활을 1년 4개월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은 형식상 依願 사직이었으나 실은 파면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입장에서 송별회 따위를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사무실 쪽에서도 베풀 생각조차 않았던 것이다.
좁고도 어둑신한 계단에서 벗어나 초여름의 강렬한 태양 아래 서게 되자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건물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넓은 공간에서 밝은 광선을 받고 있음에도 비좁은 암흑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얼마 뒤 현기증이 가시어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으나 그는 여전히 암흑 속을 걷고 있는 듯 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어린이가 암흑 속을 걸을 때와 같은 두려움으로 한 발 한 발 옮겨 놓았다. 그의 뇌리는 좌절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풀잎은 강하다! ”
그는 좌절감을 떨치려 외쳤으나 외침이 되지 못했다. 겨우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되어 나왔을 뿐이다. 그의 그러한 중얼거림 끝에 마법에 의한 것처럼 한 얼굴이 떠올랐다. 비수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얼굴이었다. 그는 말했었다. 약하디 약하게 보이는 것이 풀잎이지만 폭풍우가 지난 뒤에 풀잎이 그 무엇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아무리 거센 폭풍우 뒤에도 풀잎은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고. 시동인의 명칭 「풀잎」은 그렇게 정해졌다.
강정길도 「풀잎」동인 중의 하나였다. 동인이 결성된 것은 6개월 전이었고 동인지는 제2집이 발간되었다. 제3집 발간을 위한 모임이 10여일 전에 있었다. 그러나 그 모임에서는 동인지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시종 3선개헌에 대한 성토만이 무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한 헌법 개정은 국제적인 망신이며 집권당의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개헌을 해대는 행위는 역사를 후퇴시키는 반민족 행위라고 규탄했다. 박정희 정권의 정책구호인 ‘중단없는 전진’은 ‘중단없는 집권’을 뜻하는 것 이냐고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강정길도 한 마디 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어. 자신의 정치에 관한 이상은 모든 사람이 개인으로 존중받고, 어떠한 특정인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일이 없는 민주주의라고. 우리가 북한과 다른 것은 바로 그 민주주읜데 한 사람에게 계속 대권을 잡게 해주기 위해 헌법을 뜯어 고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한다는 뜻이야. 독재야, 독재! ”
강정길의 얘기에 누군가 맞장구를 쳤다.
“암혹이냐, 광명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광명을 택하면 문제될 게 없지.”
“호랑이는 방안에서 잡는 게 아냐! ”
“그렇다면? ’
“우선 개헌반대운동을 벌이는 거야.”
“계란으로 바윌 깨부수자고? ’
“낙숫물이 돌을 뚫는 것은 모르냐? 개헌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이라도 벌여야 해.”
“되지도 않을 일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잖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요, 개미가 정자나무를 건드리는 격이야.”
“모든 행위,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공익을 위한 사회적 행위이든, 모든 행위에는 으레 모험이 따르게 마련이야. 누군가가 말했어. 행동은 사상의 종점이라고. 행동으로 발전하지 않는 사상은 기형아며 사기라고! ”
결국 동인은 두 패로 나뉘고 말았다. 되지도 않을 일에 목숨을 거는 행위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는 파와, 신념과 사상을 행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기형아나 사기꾼이 될 수는 없다는 파로 나뉜 것이다. 강정길은 기형아나 사기꾼이 될 수 없다는 쪽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 「풀잎」모임이 있은 지 나흘 뒤, 강정길은 사무실에서 관할경찰서 정보과의 형사에 의해 연행되었던 것이다. 그가 풀려난 것은 연행된 지 나흘째 되는 아침이었다. 취조실에서 정보과로 끌려나와 보니 주간이 그의 신병을 인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주간 선생님.”
강정길의 인사에 주간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담배를 권했다. 그가 망설이자 주간이 그제야 입을 뗐다.
“괜찮네, 이 사람아.”
“죄송합니다.”
강정길은 담배를 받아 돌아서서 불을 붙이고 깊숙히 빨아들였다. 모처럼만에 피우는 담배라 어질증 때문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 쓰러질 뻔했다.
“어서 나가세.”
강정길은 앞장선 주간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어떻게 직접 예까지 오셨습니까? ’
주간은 묻는 말엔 대답을 않고 그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고 나서 물었다.
“몸을 상한 데는 없나? ”
명치며 허리 등 이곳 저곳이 결렸지만 그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취조기간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 사소한 일까지도 밖에 나가서 절대로 발설치 않는다는 형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상사에게 더 이상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충정 때문이었다.
“두번 다시 들어올 곳은 아니네.”
주간의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해 반문하였으나 대꾸는 않고 질문만 던졌다.
“어떤가, 걸을 만한가?”’
“네,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풀려날 수 있었던 게 다행이라구. 다행이구말구.”
“여러가지로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사람아, 나보다도 돌아가신 자네 부친께 감사드리게.”
“네? “
“오늘, 자넬 담당했던 형사한테 들어서 알았네 만 자네 부친께서 경찰 간부셨다면서?”’
“네,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자네 부친 음덕인 줄 알게.”
강정길의 눈 앞에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장례식 때 영정으로 썼다가 안방 벽에 걸리게 된 사진 속의 모습이었다. 경찰 제복으로 단정하게 차린 근엄한 모습이었다. 그가 국민학생일 때 지리산의 공비토벌작전에서 전사한 것이었다.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형은 사범학교를 나와 국민학교 교사가 되었고, 두 동생 중 바로 밑은 군복무 중이며 막내는 여고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어린것들을 남 못지 않게 키우기 위해 그토록 긴 세월을 아버지의 사진 밑에서 밤낮없이 재봉틀을 돌렸던 것이다. 지금도 그 바느질은 끝나지 않았다.
“자네 신원조회를 했더니만 그 사실이 밝혀지더래. 빨갱이들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경찰관의 아들이니까 빨갱이들과 한 통속은 아닐 것 같아 풀어준다는 얘기였어. 우리 어디 가서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 좀 할까? ’
주간은 벌써 들어갈 다방을 정해 놓고 있었던 모양으로 성큼성큼 앞장을 서더니만 한 길가의 다방으로 들어섰다.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주문한 뒤 주간은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거 받아 넣게.”
“뭡니까?”’
“약소하지만 내 성의야.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 몸을 확 풀고 집으로 들어가게. 참, 자취를 한다고 했던가? ’
“그렇습니다.”
“내일 나와도 좋고 모레 나와도 좋고… 어쨌든 몸을 푹 쉬고 나오란 말일세.”
주간의 얘기를 듣는 동안 강정길은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잠자코 주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나름대로 애는 쓰느라고 써봤네만 워낙 사장님의 노여움이 대단해서…”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우리 사장님도 인간적으로는 나쁜 사람은 아닌데 젊은이들의 혈기를 이해하지 못해. 공화당이거든. 실은 우리 잡지도 자기 정치활동의 발판을 삼기 위해 만드는 거야.”
“주간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내일 중으로 제 책상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얘기는 해보겠네만…”
“주간님께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빈 말이 아니라 자네 같은 일꾼을 얻기가 쉽지 않네. 하지만 세상이 그런 세상인데 어쩌겠나. 나 먼저 나갈 테니 자유롭게 행동하게.”
주간이 자리를 뜬 뒤 강정길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자신이 1년 4개월 동안 사용했던 책상이며 의자를 생각했다. 책상 윗면의 여러 홈집들이랑 의자 오른쪽 팔걸이를 싸고 있는 비닐의 찢어진 모양 따위가 눈에 선했다. 그 자리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요행을 바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밤잠을 설쳐 뻑뻑한 눈인 채로 아침 일찍 회사로 나간 강정길은 전날 자기 입으로 얘기했던 대로 주간에게 사표를 냈다.
사표는 주간의 책상 서랍으로 들어갔고 사표에 대한 거래처럼 다른 봉투가 나왔다. 2개월치의 급료와 맞먹는 퇴직금 봉투였다.
강정길은 그 퇴직금 봉투와 사물보따리를 자취 방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0지 주간을 소개시켜 주었던 선배를 찾아갔다. 면목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발길을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배는 의외로 강정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는 이미 전화로 자세한 얘기를 다 들어 알고 있었노라고 말한 뒤 덧붙여 말했다.
“내게 미안한 생각을 가질 필욘 없어. 나라도 지금 자네 같은 처지라면 그렇게 행동했을 거야. 자네처럼 용기있게 행동은 못하지만 생각은 자네와 똑같아. 내게 부양가족만 없었다면 아마 자네 보다도 더 용감했을지 몰라. 설마 산 입에 거미 줄이야 치겠나.”
선배의 얘기는 강정길의 무거운 마음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렇듯 가벼운 마음으로 선배의 사무실에서 나온 그는 명동으로 향했다. 아직도 김연호와 최준태를 만나기로 된 시간이 되려면 세 시간 남짓 남았으므로 오랜만에 영화를 즐길 작정이었다.
[6] ‘顧面問答’考
게리 쿠퍼가 맹활약을 하는 서부활극에 빠져있던 강정길이 극장 밖으로 나온 것은 10 분 전 일곱시였다.
바깥의 밝음에 채 익숙해지지 못해 눈살을 찌푸린 채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강정길에게 최준태가 다가서며 말했다.
“역시 투사는 어디가 달라도 다른 법이야.”
김연호도 뒤따라 와서는 강정길의 어깨를 치며 한 마디 거들었다.
'암, 아무나 투사가 되는 건 아니고 말고! ”
강정길은 두 사람의 입에 오른 ‘투사’에 신경이 곤두서고 말았다. 분명 자신이 3선개헌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한 것을 빗대어 하는 말 이기 때문이었다.
“남의 초상이라고 북 치고 장구 쳐도 되는 거야?”
강정길의 굳어진 표정에 당황한 두 사람은 서로 난처한 눈빛을 교환하고 나서 한꺼번에 입을 열었다.
“기분 상했나? ’
“오해 말라구! ”
강정길이 그 말들을 받았다.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 놓고 그리고 오핼 말라 구? “
강정길이 계속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있자 최준태가 생각 없이 내뱉은 자기들의 말에 대해 진 지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떠나고 나서 편집장이 한 마디 하더라고. 제까짓게 무슨 투사라고 까불어댔느냐는 거야. 그리곤 우리들더러도 강정길 꼴이 되지 않으려거든 조심하라는 거야. 그래 우리 장궤가 한마디 쏘아댔지. 투사는 까부는 사람을 뜻하는 것도 아니며 강정길의 개헌반대 서명 행위는 까분것도 아니라고. 뜻하지 않았던 일격에 얼굴이 삶은 게처럼 빨개져가지고 식식거리는 꼴이라니…”
“우리가 이리로 오다가 자네한테 ‘투사’라는 별명을 붙이기로 합의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누굴 얕보거나 놀려대느라고 붙인 여느 별명과는 다른 거야. 자네 앞이라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 우린 자넬 보기가 미안한 거야. 우리도 자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자네처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가 없기 때문이야.”
“그게 투사와 졸장부와의 차이지. 어때? 그래도 계속 화 낼 테야? “
김연호가 강정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웃었다. 그제서야 강정길의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아니, 아냐. 미안하게 됐어. 아마 요즘 내 신경이 무척 예민해져 있는 모양이야.”
“길에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자리를 잡자구.” 최준태의 말 끝을 이어 김연호가 강정길에게 말했다.
“오늘 주빈은 자네니까 어디든지 자네가 안내하라구. 술값 걱정일랑 말고… 거 문인들 모이는 술집이 있으면 그런 곳도 괜찮지.”
“그럼 실비집 한 군데 아는 데가 있는데 그리로 갈까? 예서 가깝기도 하고 안주도 깔끔해.”
강정길을 가운데로 하고 김연호와 최준태가 양 쪽으로 붙어 서서 걸었다.
강정길이 그들을 안내한 술집은 0지 기자로 취직이 확정됐던 날, 미스 윤에게 이끌려 처음으로 왔던 바로 그 술집이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들르긴 했었으나 단골집이랄 수는 없었다.
주문한 안주가 차려지자 김연호가 주전자를 들 어 올리며 강정길에게 말했다.
“자아, 망우물 한 잔 받으라구.”
어떤 술자리에서건 입버릇처럼 으레 하는 말이었다. 강정길이 처음으로 그 소리를 들은 것은 입사 축하회식 때였다.
어느 누구못잖게 술을 즐긴 陶溫明이 飮酒라는 시에 술이 근심을 잊게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忘憂物’이라 표현했다는데 그것을 몰랐던 강정길은 망우리에서 물을 길어다 빚은 술이냐고 물 어서 좌중을 웃긴 적이 있었다.
“가을 국화가 하도 고와/이슬 맺힌 꽃잎을 따/ 망우물에 띄우니/속세가 내게서 멀어지누나.”
술자리가 벌어질 때마다 김연호가 늘 하는 투를 흉내내어 이번에는 강정길이 술잔을 받으며 선수를 쳐 읊조렸다.
“우리 투사의 낭송 솜씨가 장궤를 내다 앉으라는군.”
최준태가 감탄하여 말했다. 장궤(掌ffi)란 중국에서 부자 또는 상점 주인을 뜻하는 말로 중문과 출신인 김연호의 별명이었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한다잖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는데 그걸 흉내 못낸다면 등 신중에서도 상등신이지.”
강정길이 대포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받았다.
그러자 김연호를 향해 최준태가 말했다.
“장궤, 아까 술자리에서 한다고 아껴뒀던 얘기 좀 해봐. 이제 더는 뜸들이지 못하겠지.”
“안달뱅인 어쩔 수 없다니까. 그러잖아도 왜 여태 가만 있나 싶었다! ”
무슨 일이건 가만 있질 못하고 서둘러대기 일쑤인 최준태의 별명이 안달뱅이였다.
세 사람은 이미 알근하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 술기운에 높아진 목청들로 제각기 떠들어대다가 잠시 너누룩해진 틈을 타 김연호가 두 사람을 주목시킨 뒤 ‘이제는 뜸을 다 들였다’는 투로 말했다.
“옛날에 말야 · · ”
최준태가 잽싸게 그의 말을 끊었다.
“멍석을 펴 놓으니까 않던 지랄이, 멍석을 말아 놓으니까 나오는구나.”
“옛날 얘긴데 말야, 재밌는 얘기야.”
“얼시구! 어디 재미만 없어봐라.”
강정길이 최준태의 옆구리를 찔러 입을 봉하게 만들고 김연호에게 눈짓으로 얘기를 재촉했다.
“옛날, 하루는 눈과 코와 입 그리고 귀가 모여서 회의를 열었단 말야. 눈썹이 아무런 일도 않으면서 자기들 윗자리에 떠억 버티고 앉아 거드름만 피우고 있는 게 못마땅했던 거지. 그래서 눈이랑 코랑 입이랑 귀가 눈썹에게 따지기로 했단 말야. 그리곤 따졌어. 너는 왜 늘 우리 위에 앉아서는 잘난 체만 하느냐? ’ ‘도대체 네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있느냐? ’ 그러자 그런 항의를 듣고 나서 눈썹이 미안해 하며 대답했지. ‘과연 자네들은 음식을 섭취하고 호흡을 하며 또 사방을 살펴보기도 하지. 또 모든 소리를 듣기도 하고. 그렇게들 수고를 하고 있으니 나도 자네들에게 늘 고마워하고 있어.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는 자네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단 말야. 자네들에게 미안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아무런 일도 않으면서 그냥 이 윗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야. ’ 눈썹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했어. ‘나는 지금까지 마치 내가 귀나 코 그리고 눈과 입이라도 되는 양 살아 왔거든. 그건 나의 큰 잘못이었어. 앞으로 나는 눈썹의 마음가짐으로 겸손하게 살아 가겠어. ’라고. 어때? 이만하면 재밌는 얘기잖아? '
김연호의 말에 최준태가 즉각 고개부터 저으며 말했다.
“재미? 그게 누구 우화야?'
김연호가 들려준 얘기는 淸代의 학자 兪樾한자의 「顔面問答」이라는 글을 간추린 것이었다. 그러나 강정길도 그 얘기의 출전을 알지 못했다.
“서양 냄새가 없는 걸 보니 우리 민담인 모양 이군.”
강정길은 최준태와는 달리 김연호의 얘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그 얘기로 이 시대를 풍자할 수 있는 훌륭한 패러디로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양 것도 아니고 우리 것도 아냐. 중국 거야. 청나라 때 유월이라는 사람의「안면문답」이라는 글이야.”
“역시 장궤는 장궤다. 그런데 별로 재미도 없는 얘길 뭣 때문에 그렇게 뜸들였다 하는 거야? '
최준태가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상대방의 의중이 궁금할 때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되게 따지네. 굳이 설명한다면 요즘 우리의 시대는 눈썹의 횡포가 심한 시대니까 그런 얘기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런 얘기야. 이 제 이해가 돼? '
최준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연호가 그에게 무안을 주었다.
“외양간에서 퍽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그게 뭔 소린지 알아야지, 꼭 찍어 먹어 봐야만 쇠 똥인 줄 안다면 그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야.” 무안을 당한 최준태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꿀밤을 된통 멕인 것이었다. 자칫 잘못되면 술좌석이 엉망으로 될 수도 있는 일이어서 강정길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꿀밤 반격을 하려고 치켜 든 김연호의 손에 대포잔을 안기며 말한 것이다.
“자고로 술자리에선 계집 얘기가 제격인 거야.” 말뿐만 아니라 표정이며 태도까지도 난봉꾼 같았다.
“역시 투사다운 데가 있어.”
최준태가 말했다.
“그렇다니 고맙군.”
강정길은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는 사람처럼 밝고 큰 소리로 웃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숨겨두고 내색치 않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격 자체까지 내숭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솔직한 데가 있었다. 그렇듯 속에 담아두고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가지 면에서 득보다는 손해가 많은 편이었다.
“기왕에 얘기가 그런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까 나도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거야?”
“그건 또 뭔 소리지? “
“도대체 실직자답잖게 늠름하니 하는 말이지.” 최준태도 김연호의 질문 공세에 합세했다.
“개헌반대 서명을 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도대체 실직을 당하고도 그렇게 만사태평이니까 하는 말이라구. 시골에 땅깨나 있는 모양이지? 편집장도 그러더군. 강정길의 똥배짱을 자기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거야.”
편집장의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강정길의 눈 앞엔 그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는 끓어오르는 울화를 억누를 수가 없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비겁한 놈! 난 그 자가 왜 날 그렇게 미워하는지 알아. 내가 입사할 때 자기가 추천한 '사람이 떨어지고 내가 붙었거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시험을 치고 그 시험 결과 내가 붙은 거였어. ‘자기 소개서’라는 이십매짜리 원고를 쓰는 게 시험이었는데 주간님 말씀은 내 글이 그 사람 글보다 월등 낫다는 거였어. 문장도 맞춤법도 구성력도…. 그래서 내가 뽑힌 건데 편집장은 자기가 추천한 사람이 안되고 내가 됐다는 것 때문에 입사 첫날부터 날 미워하기 시작한 거야. 그러데 그게 언젯적 얘기냐구. 벌써 일년하고도 사개월 전의 일이잖아? 그런데도 아직까지 날 못잡아먹어 으르렁거린다니, 비겁한 놈! ”
“우린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을 전혀 몰랐어. 여태 한번도 그런 얘길 한 적이 없잖아? ’
최준태가 항의조로 말했다.
“편집실에 그 얘기가 퍼져 봐. 모두들 편집장 알기를 어떻게 알겠어? ’
이번에는 강정길의 말을 김연호가 받았다.
'나도 그 얘긴 금시초문인데 아까 내가 얘기한 「안면문답」도 편집장 때문에 생각난 거야. 윗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작자라구. 자기가 하는 일이 뭐 있어. 모두 편집차장에게 떠맡기고는 회전의자만 돌리고 있는 게 고작이잖아. 안 그래? ’
“이제 그 얘긴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겠어. 내가 안할 얘기를 했나봐. 화제를 돌리자구.”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강정길은 자신이 발설한 편집장의 얘기를 주워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안주로는 십상인 얘긴데, 오늘의 주빈께서 입맛에 맞지 않는다니 할 수 없지.”
김연호가 자못 아쉽다는 투로 입맛까지 다셔보이며 말하여 좌중을 웃겼다.
“그럼, 투사께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털어놔 보라구.”
최준태가 강정길에게 빈 잔을 건네며 말했다.
“백지 상태야. 그야말로 시골에 땅뙈기라도 있다면 땅이라도 판다지만… 막막해.”
강정길의 눈 앞에 재봉틀을 끼고 앉은 어머니의 돋보기 쓴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계속해 형과 아우들의 얼굴이 차례로 어머니의 얼굴에 겹쳐져 보였다. 그 모습들이 문득 白居易의 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객지에서 동짓날, 등불 앞에 무릎깍지를 끼고 앉아 자신의 외로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고향 집에서 온 식구들이 모여앉아 두런두런 타 향에 떨어져 있는 자신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모습이 선하다는 내용의 시였다.
강정길의 눈앞에 다시금 돋보기를 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어머니가 마주하고 있는 벽 위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도 떠올랐다.
어느새 그의 눈시울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