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진 나쁜 날
난로의 화기가 다른 날보다 못한 것도 아니건만 사무실은 썰렁한 느낌이었다. 사무실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환 아이마저 필자 기증본을 발송하기 위해 우체국에 갔으므로 전화 당번은 신입 기자인 강정길의 몫이었다.
그는 난로가에 의자를 옮겨 놓고 앉아 석간 신문을 보고 있었다. 펼쳐진 사회면의 머릿기사는 대처승 쪽에서 비구측에 分宗을 선언한 내용이었다. 강정길의 눈길은 아까부터 표제에만 머물러 있을 따름이었다. 그 표제가 눈에 띈 순간, 어젯 밤 선배가 농담투로 했던 얘기가 떠올라 집중력을 흐트러뜨린 것이다.
어제 그는 퇴근하는 길로 새달치 잡지를 들고 선배를 찾아 갔었다. 그 잡지 책갈피엔 백화점의 羅紋部에서 발행한 티켓이 꽂혀 있었다. 취직을 시켜준 은혜에 대한 답례품이었다.
“자네, 이게 뭔 짓인가! ”
선배는 강정길의 낡은 양복과 책갈피에서 뽑아 든 양복 티켓을 번차례로 쳐다보며 심히 못마땅 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첫월급을 탔거든요. 제 조그만 성의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자 그의 선배는 진설성 없는 범인 협박하듯 반문했다.
“조그만 성의? ’
선배는 강정길의 양복주머니에 티켓을 억지로 쑤셔 넣고는 위엄있게 한마디 덧붙였다.
“돈은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게 아니야. 소주나 한 잔 사라구. 그것으로 내게 대한 인사는 충분해. 내가 알기로는 자네 애인이 있는 걸로 아는데, 이제 직장도 잡고 했으니 결혼도 해야 되고 돈 쓸 일이 수두룩하잖나, 안그래
강정길은 선배의 입에 오른 ‘애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결 혼청첩장을 차탁자 위에 올려 놓고 말없이 돌아 서던 그녀의 뒷모습을 지우며 그가 단호하게 말 했다.
“전 결혼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결심? 왜, 중이라도 되겠다는 거야?'
선배가 말끝에 너털웃음을 달았다. 애인을 빼앗긴 어리석음에 대한 비웃음 같기만 해 강정길은 얼굴을 붉혔다.
“그 여잔 떠났습니다.”
“떠났다면?'
“다른 사내에게로 갔단 얘깁니다.”
강정길은 그녀로부터 청첩장을 받던 날, 그 자리에서 그녀의 사진을 불살랐다. 왼손 엄지와 검지의 끝에 한 쪽 모서리가 집힌 명함판 사진 속에서 그녀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라이터의 불꽃이 그녀의 왼쪽 가슴부터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불길은 계속해서 턱과 코와 눈과 이마를 짧은 시간에 삼켜 버렸다. 배반자의 화형은 그토록 간단했다. 화형으로 인해 어떤 주술적인 힘이 작용 해 그녀의 앞날에 불행이 닥쳤으면 하는 복수심으로 행한 것이었으나 결과는 후회뿐이었다. 불행해지면 어쩌나 싶은 괴로움 때문이었다.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그는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암송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하지만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
강정길의 뇌리에 두서없는 과거의 편린들이 어지러히 널려지고 있을 때였다.
“석간에는 뭐 신통한 기사가 있소?'
외출에서 돌아온 편집차장 박영호가 강정길의 옆에 붙어서며 물었다. 그가 대답 대신 신문을 넘기려 하자 박차장은 손사랫짓으로 사양하며 제자리로 향했다.
“대처승이 비구승에게 분종을 하쟀단 말씀인 데…… 하기야 날고기 즐기는 파랑 초식파랑 같을 순 없지.” .
박차장이 자기 자리에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그의 ‘날고기’란 외설적 표현에 강정길이 참지 못한 웃음을 흘렸다.
“왜, 내 말이 틀렸소? ’
“옳은 말씀입니다.”
“요즘은 비구 쪽에도 날고길 즐기는 스님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 날고기…”
박차장이 갑자기 말허리를 끊고 강정길에게 주었던 시선을 거두어 출입구로 옮겼다. 그의 시선도 박차장을 좇았다. 2층 ‘현대’ 다방의 미스 리가 삘쭘히 열린 문으로 고개만 디밀고 있었다.
“미쓰 리가 웬일이야? 하필이면 날고기 얘길 하고 있는데…”
박차장이 허허거리고 웃었으나 그녀는 아랑곳도 않고 항의조로 제 말을 했다.
“전화 고장났어요?'
“왜?'
박차장이 눈을 키웠다.
“계속 통화중 신호잖아요. 그래서 올라왔어요.”
.“그래애? ’
박차장이 ‘그럴 리가 있나’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살펴보다가 냅다 소리쳤다.
“하, 이거 수화기가 잘못 놓여졌잖아! 도대체 누구 짓이야?'
강정길은 잠자코 있었다.
“언제부터 통화중 신호만 났다구?'
박차장의 물음은 미스 리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의 곱지 않은 눈초리는 강정길에게 꽂혀 있었다.
“한 시간쯤 됐을 거예요. 처음엔 통화중이겠거니 했는데 계속 그러잖아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올라온 거라구요.”
“이 전화가 사람 열 사람 몫을 하는 전환데…” 박차장의 말은 분명 강정길을 겨냥한 것이었다. 강정길도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제가 여태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는데 차장님이 전활 쓰신 뒤론 온 전화도 없었구 건 전화도 없었습니다.”
강정길의 얘기에 박차장은 흠칫했다. 자신의 실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두 시간쯤 전, 사무실에는 박차장과 강정길 두 사람밖엔 아무도 없었다. 새달치 잡지가 나온 날부터 약 1주일 동안은 출근부에 날인만 하면 지각을 하든 조퇴를 하든 자유였다. 사규에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고 관례가 그런 것이었다. 새로 만들 잡지의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군대 속담으로 ‘오줌 누고 뭣 내려다 볼 새도 없이’ 바쁘고 그렇게 해서 새 잡지를 만들고 나면 모두들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하게 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 머리로 일을 해봐야 능률도 오르지 않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再充電을 위한 기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각 · 조퇴 · 외출이 자유로운 그 기간을 편집부에서는 ‘만끽주간’이라고 이름하고 있었다. 자유를 만끽 할 수 있는 주간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신입기 자인 강정길은 그 기간에도 사환과 더불어 ‘전화 당번’이 돼야만 했다.
그 만끽주간 이틀째인 오늘, 박차장은 주간실에 불려가 부옇게 닦기고 나왔다. 새로 나온 잡지에 誤子가 많았던 것이다.
주간실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박차장이 전화를 건 곳은 제판소였다. 0 · K지(校了紙)에 지시된대로 정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오자가 많았으며 사진 동판까지도 서로 바뀐 사고가 생겼다며 공장장에게 책임 추궁을 했던 것이다. 그런 끝에도 분이 채 풀리지 않아 송수화기를 내던지 다시피 놓고는 외출을 했으니 송수화기가 잘못 놓이게 된 것은 순전히 박차장의 탓이 아닐 수 없었다.
강정길의 일깨움에 박차장은 어정쩡한 웃음으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리고는 넉살좋게 말했다.
“수화기가 잘못 놓여진 덕에 강기자가 전화 당번 쉽게 했어. 안그러오? 그건 그렇고 미쓰린 뭣 때문에 우리 사무실에다 전화질을 했어? '
“강기자님을 만나겠다는 분이 벌써 한 시간도 넘게 기다리고 있다구요.”
“누구? 나? '
그는 믿기지 않아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며 물었다.
'네.'
강정길이 그래도 믿기지 않아 앉은 채로 고개 만 갸웃거리고 있는데 박차장이 디밀었던 고개를 빼는 미스 리를 향해 소리쳐 물었다.
“여자야, 남자야?'
“여자분이세요. 빨랑 내려오세요.”
닫긴 문을 통해 미스 리의 대답이 들렸고, 뒤이어 계단을 내려 밟는 급한 발짝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나 때문에 강기자 애인이 너무 오래 기다렸군. 그 벌로 내가 대신 전화 당번 할 테니 어서 내려가 보시오. 그런데 인순이는 어딜 갔지? ’
인순이는 야간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사환의 이름이었다.
“필자 기증본 발송하러 갔는데 곧을 겁니다.”
강정길은 사무실을 빠져 나와서도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를 근무처에까지 찾아 올 만한 사람(더구나 여자로서는)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방으로 들어서기가 바쁘게 미스 리는 출입문과 대각에 위치한 구석자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과연 여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비록 옆모습 이기는 했으나 처음 보는 여자라는 것은 식별할 수 있었다.
“난 첨 보는 여잔데? ’
“가보심 알아요.”
미스 리의 입가에 다시 묘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강정길입니다. 날 찾아 오셨다구요?'
그녀의 앞에 서서 그가 말했다. 그제서야 여자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강정길을 치켜보았다.
‘네, 앉으시죠.”
강정길은 여자의 맞은쪽 의자에 앉으며 그녀를 자세히 관찰했다. 짙은 밤색 파글란 코트에 남색 실크 머플러의 스포티한 차림이었다. 옷차림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었지만 탁자 위에 놓인 교재와 대학 노트로 보아 대학생임이 분명했다.
“여기서 저랑 함께 일했던 미쓰 윤 언니 있었잖아요? 그 미쓰 윤의 친언니래요.”
언제 왔는지 미스 리가 소개를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강정길은 그제야 그녀가 미스 윤과 닮은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갸름하면 서도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우아 · 함과 자신감을 함께 지니고 있는 미모였다.
“그러고 보니 미쓰 윤이 언니를 많이 닮았군요. 그런데 왜 날?'
“미쓰 윤이 여기서 일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왔걸랑요”
미스 리가 말했다.
“그런데 왜 날 찾아 오셨는지?'
“눈 오던 날 있잖아요. 그 날 강기자님이 술 사주신다구 미쓰 윤을 데리고 나가셨잖아요? ’
“내가 데리고 나갔다구? 내가 술 산다구 데리고 나갔다구?'
강정길은 어이가 없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어쨌든 그 날 같이 나가셨잖아요. 그 이튿날 부터 미쓰 윤이 안 나왔다구요”
“그런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 아?'
강정길은 자신도 모르게 목청을 돋우고 말았다.
“여기 앉으세요. 앉아서 말 좀 해주세요.”
그때까지 입을 봉한 채 다소곳이 앉아 있던 미 스 윤의 언니가 미스 리에게 자신의 옆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카운타가 비어서 곧 가야 해요.”
미스 리는 선 채로 다시 강정길을 향해 말했다.
“전 없는 얘긴 하지 않았어요. 그 날 미쓰 윤이 저한테 그랬어요. 애인이 와서 같이 나가야 한다고. 마담 언니한테도 그렇게 허락을 받았구요. 그런데 그 이튿날부터 미쓰 윤이 나오질 않은 거예요.”
“아니, 그 이튿날 내가 말했잖아! 미쓰 윤하고 전날 이 다방에서 첨 만난 거라고. 난 오충 잡지 사에 취직하러 왔다가 주간 선생님이 외출중이셔서 주간 선생님을 기다리느라고 오랫동안 이 다 방에서 기다린 것이라고. 안 그래?'
“그러긴 하셨죠. 어쨌든 이제부턴 두 분이 말 씀해 보세요 ” .
미스 리가 카운터로 향하자 미스 윤의 언니가 여태까지와는 달리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걔 어딨나요?'
강정길은 마치 복부를 강타당했을 때처럼 입만 벌리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런 대답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있는 데만 알려 주세요.”
“글쎄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 이런 답답 한 노릇이 있나! ”
강정길은 마치 생각지도 못했던 허방다리에 빠 진 기분이었다. 치솟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까 미쓰 리 얘길 들으니까 미쓰 윤이 마담 이랑 미쓰 리한테는 내가 자기 애인이고 또 내가 술을 사겠다고 했다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무슨 애인이, 미쓰 윤이 여기서 얼마동안 일했는 진 몰라도 무슨 애인이 그 날 처음 나타나며…”
미쓰 윤의 언니가 강정길의 말을 잘랐다. 적의를 품은 눈빛이 인광처럼 번뜩였다.
“군에서 제대한 지 며칠 안된다고 하더래요”
“그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까도 얘기했듯이 난 그 날 이 건물 오층에 있는 잡지사에 이력설 내러 왔던 것이고…”
또 다시 그녀가 말을 끊었다.
“데리고 나가신 것도 사실이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
강정길의 눈 앞에 미스 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밖에 나서기가 바쁘게 사하라의 모래바람을 막으려는 투아레그族처럼 외투깃으로 눈 밑까지 잔뜩 가렸다. 눈보라가 사납게 쳐댔기 때문이었다.
“이런 눈보라에도 끄덕 않는 걸 보니 아직도 군기가 덜 빠진 모양이네요.”
미스 윤의 목소리도 생생했다.
그는 미스 윤과 눈보라 속을 10분쯤 걸어 명동 뒷골목의 한 밀주집으로 들어갔다. 미스 윤이 애인을 따라 자주 들렀던 집이라 했다. 그들의 탁자 위에는 빈대떡 · 어리굴젓 · 깍뚜기 등의 안주와 밀주 한 주전자가 올려져 있었다.
미스 윤이 주전자를 들어 강정길의 대포잔을 찰랑찰랑 채웠다. 그리고 자기 잔에는 바닥에 장식된 '福’자만이 간신히 숨을 수 있게 따랐다.
“아니, 술집에 동행해 달래 놓구선 ··· ”
강정길이 잔을 채우려 했으나 그녀는 가늘고 긴 손으로 잽싸게 대포잔을 덮으며 고개를 살래 살래 흔들었다.
“왜 그래요?'
“실은 저 아까 술이 취했었어요. 우리 다방에서 위스키를 떠블로 석잔이나 마셨거든요. 그래 술기운에 수달 떨은 거예요. 사실 전 원래는 말이 없거든요. 집에선 말이 없다고 벙순이란 별명으로 불렀다구요. 벙어리 같다구 지은 별명이에요.”
“다방에서 마신 술이야 이제 다 깼을 거 아닙니까.”
“좀 깨긴 했지만……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이 집 카바이트 막걸리가 그렇게 먹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혼자 오자니 그렇고 해서 초면에…… 그런데 막상와 보니 냄새만 맡았는데도 속이 뒤집 히는 거예요 참 성함이?'
“강정길입니다.”
“아참, 그렇죠. 제 기억력이 이렇게 형편없다구요.”
“어서 드세요. 술 드시는 거 바라보는 것도 전 재미있어요. 오늘 월급 탔거든요. 맘껏 드세요.”
“정 그렇다면 안주라도 ··· ”
강정길이 빈대떡을 권했으나 그녀는 그것도 바둑알만하게 뜯어 단 한번 입에 넣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질문만은 열심히 해댔다. 잡지사엔 뭔 일로 왔는데 다방에 그토록 오래 앉아 있었느냐, 혹시 문학하는 사람이 아니냐, 월남 파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그녀의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다.
햇병아리 시인인데 뒤늦게 군대를 마치고 5층에 있는 잡지사에 취직하러 왔다는 것, 다행하게도 취직이 됐다는 등의 대답이었다.
“어머나, 그럼 나도 축하주로 한 잔 마시겠어요.”
그녀는 주전자를 들다가 빈 주전자임을 깨닫고 주모에게 술을 청했다.
술주전자를 가져온 주모에게 그녀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우리 애인 딴 사람같이 변했죠? ’
“그러잖아도 처음엔 애인이 바뀌었나 했는데 군대살이 찌니까 더 미남이 됐네. 벌써 제대했수?'
“제대가 아니라 휴가 온 거예요.”
미스 윤이 재빨리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 월남 간 군인들도 휴가를 주나?'
강정길도 술기운을 빌어 거짓말을 했다.
“전공을 세워 훈장을 탔거든요.”
“월남에 간 한국군은 먹는 것도 미군하고 똑같이 먹고 월급도 엄청 많다더니만 공연한 헛소문이 아니었구먼. 그래 휴간 며칠이우?'
“한 달입니다.”
“돈 버는 것두, 잘 먹는 것두 중요하지만 제발 몸조심허우. 색씨를 생각해서라두.”
“고맙습니다.”
주모가 돌아선 뒤 그들은 키들키들 죽인 웃음을 웃느라고 눈물까지 흘렸다.
“지금, 저 아주머니가 ¥} 넘어가는 거 보셨 죠? 얼마나 많이 닮았으면 그렇게 속겠어요.”
미스 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강정길은 그러한 그녀의 환영을 향해 담배 연기를 짙게 내뿜었다. 그리고 그는 잠시 끊었던 얘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두 주전자를 다 마신 셈입니다. 내 취직을 축하해 준다면서 따른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화장실에 가서 토하구 오더라구요. 우리는 술집에서 나와 곧바로 헤어졌습니다. 내가 바래다 주겠다니까 어딘진 모르지만 꼭 들렀다 가야 될 데 가 있답디다. 여자가 거처하는 데까지 굳이 따라 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해서 더 이상 바래다 준다는 얘길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미쓰 윤에 대해서 아는 건, 애인이 월남에서 전사했다는 것뿐 입니다. 그리고 이건 짐작입니다만 우연하게도 그 죽은 애인을 닮은 나를 만나게 되자 지난날의 생각이 났던 모양입니다. 나를 데리고 자기 애인과 자주 들렀던 술집에 간 것도 일종의 대리만족을 얻기 위한, 보상심리라고 할지, 어쨌든 여태까지 내가 얘기한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시 강정길의 말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편으로 마음이 켕겼다. 자기가 미스 윤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털어 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임신한 몸이라는 것을 발설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발설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것을 자기 입으로 고백한 것은 아니나 우회적으로 그런 사실을 알려줬던 것이다.
“그 사람이라면 같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다른 남자들은 갈 수 없는 곳이에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강정길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눈 덮인 길을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치 스키를 신고 걷듯 발바닥을 떼지 않고 죽죽 밀며 나갔었다. 끊긴 데가 없는 평행선의 슈프르같은 그녀의 발자욱 線이 모퉁이길에서 그녀의 조그마 한 뒷모습과 함께 사라지고 나서야 그도 뒤돌아서 걸었다.
“혹시 스스로 목숨을 · · · ”
미스 윤의 언니가 흐느끼며 묻는 소리에 강정길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강정길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4] 데칼코마니
‘… 1937년 스페인에서는 파시스트의 포학을 응징키 위해 세계 각국의 反파시스트 세력이 집결되었으며 이로써 스페인내란은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반파시스트군인 정부군을 돕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많은 젊은이들도 의용군으로 스페인에 건너 갔다.
소설가 헤밍웨이 · 마를로 ·에렌브르크, 독일의 망명 작가와 프랑스의 비오리스 · 테리와 같은 여류 작가들도 종군기자나 병사 또는 장교가 되어 참전했다.
오늘날의 월남전쟁 역시 · · · ’
원고지를 메워 나가던 강정길의 펜이 멎었다. 그가 쓰고 있는 기사는 한국군의 월남파병의 당 위성과 한국군이 이룩한 전승의 실태를 중점적으로 작성하는 일종의 정책적인 기사였다. 그러나 본론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원고지 위에 잡다한 환영들이 펼쳐져 펜을 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이 거닐고람부제타가 달리는 평화스런 야자수의 거리가 아니었다. 초연으로 가득한 정글, 불을 뿜어대는 포문, 선혈을 흘리며 신음하는 병사들, 아랑드롱의 폭사한 시체, 절규하는 미스 윤.
강정길은 테이블에 붙였던 가슴을 떼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담배를 뽑아 물었다. 그러나 미스 윤의 환영은 시시각각으로 다른 모습이 되어 그의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미스 윤이 그에게 술을 권하며 물었다.
“장선생님, 혹시 불면증에 시달려 보신 적이 있어요?'
“장이 아니라 강입니다.”
“어머, 죄송해요. 벌써 몇번째나 들었으면서도 · · · 아까도 말했지만 전 기억력이 빵점이에요. 오빠두, 언니두 모두들 머리가 좋은데 난 누굴 닮 아서 그런지…”
미스 윤은 말끝도 맺지 않고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깔깔깔 맑고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려 강정길이 말했다.
“난 이제서야 미쓰 윤이 왜 불면증으로 고생을 하는지 그 진짜 까닭을 알아냈습니다. 미쓰 윤이 처한 불행한 사태나 고민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습니다.”
“어머머, 그럼 뭣 때문이죠? ’
그는 한동안 뜸을 들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기억력이 나쁘다고 했지요?'
“나쁜 정도가 아니라 빵점이라구요”
“불면증의 원인은 바로 그 기억력입니다.”
“아니, 기억력과 불면증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지요?'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기억력이 나쁘면 매일같이 그 날 자기가 얼마나 피곤했는지도 기억을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잠을 자지 못하는 겁니다.”
강정길의 익살에 미스 윤은 또다시 한참 동안 이나 허리를 펴지 못했다. 그런 웃음을 잦혀 놓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까 다방에서도 계속 웃기더니만… 도대체 그런 재미난 말씀은 어디서 나오는 거죠?'
“사람한텐 말 나오는 구멍이 하나밖에 없잖습니까.”
“어머 또, 또. 난 다방에서부터 이미 강선생님 이 글 쓰시는 분인 줄 짐작하고 있었다구요. 그렇잖고야 그런 유머가 나올 수 없잖아요? 그러나 저러나 시인이시니까 근사한 시 한 수 읊어 주세요. 기억력은 형편 없지만 그래도 여고 땐 저도 문예반이었다구요. ”
강정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데칼코마니라고 아시죠?'
“데칼코마니라뇨? 전 첨 듣는데요.”
“미술시간에 배우잖습니까.”
“전 국민학교 때부터 미술하곤 담을 쌓고 지낸 걸요. 시 한수 읊으시라니깐 엉뚱하게 웬 미술 얘긴 꺼내시구 그러세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죠. 데칼코마니란 건 도화지에 물감을 떨어뜨리고 그걸 두 겹으로 접으면 양쪽에 똑같은 형태의 모양이 되잖습니까.”
“맞아요, 장난으로도 흔히 했죠. 그게 바로 데 칼코마니였군요. 글쎄 제 기억력이 이 모양이라 구요.”
“난 지금, 미쓰 윤과 내 가슴이 그렇게 똑같이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째서요?'
'내 가슴도 사랑을 잃은 가슴이니까요.”
“어머, 강선생님도 애인이 죽…”
“죽진 않았지만 날 떠났으니까 내 사랑은 죽은 거죠.”
“언제 적 얘기예요?'
“제대하고 나서니까 며칠 전이죠. 참 시를 낭송해 달랬지요? 아폴리네르의십니다. ‘미라보 다리’라는.”
강정길은 서너 차례의 헛기침으로 목을 고르고는 눈을 감았다. 집중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하지만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은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에 있다.
손과 손을 붙잡고 마주 대하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영원한 눈길이 지날 때
밤이여 오라 종은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에 있다.
흐르는 물같이 사랑은 지나간다
사랑은 지나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밤이여 오라 종은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에 있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흘러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은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에 있다. ’
암송을 마친 강정길이 눈을 떴을 때 고개를 떨군 미스 윤은 끊어진 구슬처럼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얼마 동안 그렇게 울고 난 그녀는 속이 조금은 풀렸는지 예의로 조금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2 때 알게 된 대학생이었는데 집안이 가난 해 일학년만 겨우 마치고 돈을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기를 쓰다가 결국은 월남에 자원 입댈 한 거예요. 글쎄 전쟁터에 가서 돈을 벌겠 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머저리 같은 … 나까지 집에 붙어 있질 못하게 만들어 놓고는 · · ”
“집에 붙어 있질 못하게 만들다니 그건 무슨 얘깁니까?'
“부끄러운 얘기예요. 집에선 내가 왜 가출을 했는지, 더구나 다방에서 레지 노릇을 하고 있는 걸 알면 당장이라도 불벼락이 떨어진다구요. 하지만 돈을 벌어야겠구 달리 마땅한 일자린 없구 · · · '
말꼬리를 사린 미스 윤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못박혀 있는 강정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헛웃음을 친 뒤 말했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외국 노래 ‘케세라 세라’가 ‘될대로 되라’라는 뜻이라면서요? 지금 내 인생이 그렇게 막가는 인생이에요”
천정을 향한 그녀의 눈이 전등빛을 반사했다. 고인 눈물을 억지로 잦히고 있는 것이었다.
강정길의 생각들이 일시에 소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편집장의 갑작스런 호명 때문이었다.
“거 월남파병 기사, 마감 지킬 수 있겠어? ’
“네, 지금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강정길은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책상에다 가슴을 붙였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