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 현장에서
1995년 7월의 어느 날,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민등록 등본 한 통을 들고 당시 예보계 주임이었던 자신을 찾아오라는 거였다. 나는 그때 어렵게 들어갔던 모 공사를 퇴직하고 친구들과 의기 투합해 학원 운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선배는 보험 업무를 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젊은 나이에 보험이라니! 보험 하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나이 많은 아줌마들이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공갈 반, 애걸 반으로 한 건씩 하는 정도로 알고 있던 터였다. 오만으로 가득 차 있던 나에게 그 선배의 말은 악언이었다. 팩토라져서 우체국을 뛰쳐나왔다. 이 능력 있는 나를 어떻게 보고…
그 뒤 몇 주가 흘렀을까. 내가 보험 일을 해야만 되는 필연이 생겼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결혼 날짜가 잡혔단다. 엄마 친구의 소개로 자금의 남편을 만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나의 수중에는 결혼할 돈이 없었다. 퇴직금 조금하고 적금을 깨서 몽땅 학원에 투자한 뒤였기에. 그렇다고 시골에서 어렵게 대학 공부를 시켜 주신 부모님께 다시 잠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다. 낮에는 우체국에서 돈을 벌고, 오후에는 학원에서 돈을 벌자.’ 내년 5월까지 시집갈 밑천을 조금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선배에게 진지하게 우체국보험을 한번 해 보겠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해서 1995년 8월 2일 남대구우체국 보험관리사로 위촉이 되었다.
어떤 장소에서든 보험 모집만 생각해
보험 일을 시작하면서 먼저 노트북에 팔기 좋은 상품만을 선정했다. 그리고 누구 하나 교육시켜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내 스스로 일 할 장소를 물색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가까운 동사무소였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서로의 인지상정을 믿고 동장님께 인사를 드리며 10분간의 면담을 요청했다. “우체국도 이젠 앉아서 영업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발로 뛰자니 참 어렵다”고 은근히 호소하면서…
나는 박봉의 공무원들인 점을 고려해 보험료가 저렴한 다보장보험을 설명하면서 제일 높은 직급인 동장님을 먼저 가입시켰다. 그러다 보니 별로 생각이 없었던 직원들도 동장님을 따라 연달아 청약서를 작성했다. 차음 개척지에서 다보장보험 9건을 모집하면서 나는 자신감에 찬 개선 여장군이 되어 있었다.
몇 달 동안 이중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랄 일이 일어났다. 3개월 정도 일한 우체국의 급여가 한 달 꼬박 일한 학원 강사의 급여를 뛰어넘었다. 그때부터 나는 영업직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되어, 결혼을 해서도 본격적으로 보험관리사 일에 매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체국보험 모집을 하면서 하나의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늘 어느 업종을 알게 되면 과연 그 곳에서 보험 영업이 잘 될까 하는 의문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느 날, 은행 업무를 보러 갔다가 창구에 서서 직원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니 꽤 괜찮은 인원이었다. 여기서는 적금은 안 되겠지만, 보험 업무는 취급하지 않으니까 한 번 시도해 보기로 작정을 했다.
먼저 우체국과 예수금 거래가 있는 은행을 선택했다. 지점장 중에서 연고자를 찾으니 까마득한 선배님이 계사는 곳이 있었다. 학번을 들먹이면서 우체국 홍보를 부탁하니 쾌히는 아니지만 승낙을 하셨다.
직원 조회시간 뒤와 마감시간 후에 잠시 생기는 틈을 이용하기로 했다. 연세가 조금 든 남자 보험관리사와 동행을 했는데, 그 분은 협조를 구하는 인사를 했고, 내가 우체국 업무 소개와 우체국보험 설명으로 마무리를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광경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보험 영업은 많은 끈기를 필요로 했다. 아침, 저녁으로 지점마다를 방문하는 강행군은 우리를 매우 지치게 만들었다. 깐깐한 은행원들을 신참 보험관리사 두 사람이 상대하기는 만만치 않았다. 또 짧은 시간 안에 지점 분위기를 파악하면서 영업을 하려니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돌이켜보아 내 자신이 무척 대견 했을 때가 아마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슬럼프를 이겨 내고 새로운 곳에서의 성공
우체국에 들어온 뒤 슬럼프에 빠지는 일이 생겼다. IMF가 터지기 몇 달 전에 남편이 부산으로 발령이 났다. 당사는 다른 지방으로 전출되면 회사에서 ‘짤리기’ 직전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던 때였다. 더욱이 남편은 입사 4년차밖에 되지 않았었고,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이 막 시작되고 있던 시점이었 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나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다 될 것 같은 교만이 강했었다.
신랑 문제는 우리의 기우와는 달리 그 후 잘 풀리게 되었으나, 나는 황무지를 개척해 다듬은 연고지를 버리고 남편을 따라 떠나게 되었다. 같은 영남권이었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부산금정우체국으로 이적을 하고, 시장조사를 하느라 부산 지역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누비고 다녔다. 부산지역은 낮에도 차가 많이 막혔으므로 감히 차를 몰고 다닐 수가 없었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왜 내가 이 어려운 일을 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생기고, 길거리를 헤매는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그래서 막연히 길을 헤매고 다닐 필요 없이 상공회의소에 가서 직장 업종 리스트를 구해 역공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 단축과 업무 편의를 고려해 우리 우체국과 가까운 회사를 선정하여 섭외를 하고, 다음 날은 상품을 홍보하는 그런 영업 전략을 세웠다. 홍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보험 영업이었다.
나는 특히 우처묘의 공신력을 즐겨 팔고 다닌다. 또한 우처臼택배 · 우편주문판매 · 경조카드 등의 실적 증강 기간을 눈여겨보았다가, 보험 영업 현장에서 먼저 이같은 우처묘 상품들을 그때그때 홍보하고 나서 보험 설명에 들어간다. 그리고 보험 청약 후에도 특별히 감사를 전할 고객에거는 우편주문판매 상품으로 답례를 하고 있다. 지금은 담담하게 지난 일을 얘기하고 있지만, 간간이 찾아오는 슬럼프로 인한 비애와 절망으로 우처모을 향해 오줌도 누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희열을 주는 것이 보험관리사의 길이라는 것도 당당히 밝힐 수 있다.
중학교 시절 빨간 기본영어 책에서 보았던 격언이 생각난다.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사춘기 시절에 영어 선생님께서 좋은 말이라며 외우라고 해서 막연히 머릿속에 기억시켰지만 그때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경상도 말로 ‘하늘이 지가 지를 어떻게 돕는단 말이고?’ 그런데 자금은 그 말의 뜻을 ‘스스로 돕는 자=노력하는 자, 인내하는 자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입사하는 보험관리사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영업을 하노라면 슬럼프가 늘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목표를 뚜렷이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에게서는 슬럼프도 도망을 간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