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안 취하는 날
강정길이 처제 내외를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하고 돌아올 때까지도 그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에넘느레하게 어질러져 있던 술상은 이미 치워져 있었으며 방안도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준용이부터 데려다 뉘지 그래.”
강정길이 부엌에다 대고 말했으나 틀어놓은 수돗물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물소리만 들려왔다. 그는 탁상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덟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워낙 이른 시간부터 벌인 술자리라 일찍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정길은 다시 아들아이가 걱정이 되어 아내를 부를까 했으나 집주인 노인 양주가 워낙 친손자처럼 귀여워하여 늘 끼고 살다시피 해왔으므로 그 걱정은 제물에 삭고 말았다.
주인 노인네들은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으나, 아들들은 모두 브라질로 이민을 갔고 딸마저 제철소에 근무하게 된 사위를 따라 포항에 내려가 살고 있었다. 칠십 줄에 들어선 그 외로운 두 노인네는 달리 소일거리가 없다 보니 매일같이 눈만 뜨면 ‘우리 준용이. 우리 준용이’ 하며 강정길 내외로부터 아이를 빼앗아 가다시피 하곤 했다.
“어련히 잘 봐주실려고.”
강정길은 작지 않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팔베개로 맨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때 그의 아내가 앞치마에 물손을 닦으며 들어왔다.
“준용이는?’
강정길이 누운 채로 아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곤하게 잔다고 그냥 두래요”
“이러다 애비 에미도 몰라보는 자식 만드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강정길이 팔베개를 풀고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농담처럼 한 말이긴 했으나 그 말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아이가 부모의 정보다 남의 노인네들에게 더 정이 들어버린다면 자라나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강정길이 담배를 꺼내 물자 그의 아내가 재떨이를 갖다 놓고 마주 앉으며 물었다.
“당신 술 많이 했죠?'
“글쎄.”
그는 술자리에서 비운 술병을 따져보았다. 2홉들이 소주 세 병을 깨끗하게 바닥냈었다. 처제와 아내가 마신 술이라야 모두 합쳐도 석 잔이 될까 말까였다. 그렇다면 동서간에 한 병 반씩 마신 셈이었다.
“당신 지금 술 취했어요?’
강정길은 대답없이 아내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지금 취한 상태냐고요?'
아내가 재우쳐 묻자 그는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취한 것도 아니고 안 취한 것도 아니고 지금 그런 상태야.”
'...'
“왜 물어?'
“취하지 않았으면 뭐 좀 얘기할려구요.”
“뭔 얘긴진 몰라도 얘길 못 알아 들을만치 취해 있진 않아. 적게 마신 것도 아닌데 왠지 취하질 않아. 정신은 말똥말똥해.”
그가 얘기를 끌어내려고 아내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으나 그녀의 입은 냉큼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잠시 더 기다리고 있던 그가 투덜대듯 한마디 뱉았다.
“사람도 싱겁긴…. 그럼 잠이나 자자구.”
잠이나 자자는 말에 다급해졌는지 그녀의 입이 급하게 열렸다.
“나 말이에요. 나도 뭔 일이든지 해서 돈벌이를 했으면 좋겠는데….”
아내의 입에서 돈벌이 얘기가 나오자 강정길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얘기가 아내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돈벌이’가 그에게 자신이 실직자임을 깨닫게 했던 것이다. 실업자가 되어 아내가 돈벌이 걱정을 하게끔 만들었다는 자책감 때문에 그는 속이 아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쥔 할머니께서 우리 준용일 봐주시겠다며 일 자릴 구할 수 있으면 구해보래요”
강정길은 아내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냅다 소리를 질러댔다.
“아니, 내가 실직자가 되구 싶어서 된 거야?'
'...?'
‘내가 밥을 굶겼냐구!”
“누가 밥을 굶겼댔어요?'
“그럼 돈벌일 하겠다는 얘긴 왜 해?'
강정길의 목청은 점점 더 커졌다. 사실 그는 자기가 화를 낼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나 생각과는 달리 목청을 높였던 것이다. 물론 그의 아내도 남편이 자기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돈벌이 얘기 취소할테니 제발 목소리 좀 낮추세요 큰 쌈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고요.”
강정길은 아내가 속삭이 듯하는 말에 맥이 빠져 입을 다물고 말았으나 가슴 깊은 곳에서 인 분노의 불길은 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아들아이가 주인 할머니 방에서 잠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아내와의 격정적인 밤을 생각하며 ‘존 토머스가 제인 부인을 방문하고 싶다는군’이라고 말하려 했었다. 그것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주인공인 코니와 맬러드가 서로 상대방의 성기를 각각 존 토머스와 제인 부인으로 부른 것을 흉내낸 그들 부부의 암호였다. 그러나 강정길에겐 그 성적 욕구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화 낼 일이 아니잖아요.”
그의 아내는 그가 밖으로 나갈 낌새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도 없이 아내를 밀치며 벽에 걸린 점퍼를 떼어 입고 휭하니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이 밤중에 어딜 가려고요?'
아내가 그의 뒤꼭지에다 대고 물었으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철대문을 쾅 밀어 닫았다. 그러나 막상 갈 곳을 정할 수가 없었다. 점퍼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한 대 피워 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술이나 마시자!’
강정길은 무슨 큰 일이라도 하러 가는 사람처럼 힘있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골목 들머리의 허름한 빈대떡집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입문 앞에서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찔러 넣은채 마냥 서 있기만 할 뿐 좀처럼 들어설 생각을 않고 있었다. 아무리 실직자라지만 그 허름한 술집에서 계산할 정도의 돈은 있었다. 그가 냉큼 술집 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혼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가 술을 배운 것이 대학생 때니까 햇수로 친다면 10년 가량 된다. 그러나 그 동안 그는 단 한번도 혼자서 술을 마신 일이 없었다. 늘 술친구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마셨고, 간혹 누구에게 술대접을 할 일이 있을 때만 조용히 마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남 못잖게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는 편이긴 했으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술꾼은 못되었다. 그가 출입문을 막아 서듯 있을 때 술 손님들이 뒤에 붙어 섰으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술집 문을 밀치고 들어서야만 했다.
“어서 오세요. 세 분, 이쪽으로 오세요”
빈대떡을 부치고 있던 주모가 그를 뒤엣 손님들과 일행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그는 재빨리 문간에서 안쪽의 구석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전 따로 왔습니다. 소주 한 병하고 빈대떡 한 접시 주세요.”
술과 안주를 주문한 뒤 그는 담배를 뽑아 물었다. 술청 안에 혼자 술 마시러 온 사람이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갑자기 더 외롭고 처량한 생각이 일었다.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기분은 몹시 착잡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앞 자리에 와서는 기척에 치켜다본 그의 눈에 세모꼴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아내가 ‘세모돌이’라는 별명을 붙인 그 사내는 정보과 김형사였다. 그는 1주일에 한 번꼴로 찾아와선 ‘지나다가 그냥 들렀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혼자 오신 것 같은데 앉아도 되겠습니까?'
김형사가 말했다.
“지나다가 그냥 들렀습니까?'
강정길이 가타부타 대답없이 비꼬았다.
“댁에 들렀더니 아주머니께서 바람 쐬러 나가신 모양이라고 하시기에….”
“오늘도 지나다가 그냥 들른 겁니까, 아니면 내게 뭔 볼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오늘은 얘기 좀 나누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왔습니다만.”
김형사의 말에 강정길은 가슴이 덜컥했다. 또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 끌고 갈 모양이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개새끼들아, 맘대로 해 봐라. 난 아무 죄도 진 게 없어!’ 했다. 그러나 그런 속과는 다른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소?’
강정길의 물음은 곱지 않았다. 미행당한 불쾌감이 잔뜩 묻은 물음이었다. 그의 물음에 김형사는 웃음 밴 입으로 말했다.
“미행한 건 아니니 불쾌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역시 형사라 눈치가 빨랐다. 강정길은 자기의 속을 훤히 다 알고 있는 김형사의 얼굴에 멍한 눈길을 보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김형사의 얘기가 계속 되었다.
“댁에 들렀더니 아주머니께서 바람 쐬러 나가 신 모양이라고 하시기에 혹 술집에 앉아 계실지도 모른다 싶더군요. 그래 허허실실로 한번 들러 본 건데 마침 계셔서….”
주모가 쟁반에다 주문한 술병과 안주 접시를 얹어 가지고 와 탁자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정길의 생각은 김형사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개의 후각이 사람의 그것보다 40배나 발달해 있다더니 역시 이놈도 개새끼임에는 틀림없구나’ 하고 있는데, 김형사는 마치 제가 사는 술인 양 소줏병을 척 들더니만 술을 권한는 것이었다.
“자아, 한잔 받으시죠.”
강정길이 어이가 없어 술을 받을 생각도 않고 있는데 김형사는 그의 앞에 놓인 잔을 채우고 나서 자작으로 자기 잔에도 채웠다.
“자, 어서 드시죠.”
김형사는 잔을 들더니 강정길의 잔이 와 부딪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잔을 들어 부딪자 김형사는 한 입에 털어넣다시피 하고 빈 잔을 만들어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알고 보니 강선생은 전몰 경찰관 유족이시더군요.”
김형사의 얘기를 듣는 순간 강정길의 눈 앞에 정보부 요원의 얼굴이 크게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그 사내가 내질렀던 욕설도 귀에 쟁쟁했다.
“애비가 뺄갱이 때문에 죽었는데 그 새끼는 빨 간 물이 들어 있으니….”
강정길은 자꾸만 떠오르는 그 날의 일들을 지우기 위해 연거푸 술잔을 비워댔으나 허사였다.
그 날, 개헌반대 서명을 한 것에 대한 전말서만 쓰면 풀어줄 듯이 말했던 사내는 취조실에서 나갔다가 한참만에 들어오더니 다시 난폭하게 굴었다. 그렇게 태도가 일변된 까닭은 그의 작품 「안면문답」을 뒤늦게 입수한 때문이었다. 그가 쓴 「안면문답」은 청나라의 학자 유월이 쓴 「안면 문답」은 패러디였다. 유월의 「안면문답」은 눈 • 코 • 입 • 귀들이 자기네 윗자리에 떠억 버티고 앉아 아무런 일도 않으면서 거드름만 피우고 있는 눈썹을 성토하자 눈썹이 앞으로는 겸손하게 살겠다고 뉘우치는 내용이지만, 그것의 패러디인 강정길의 「안면문답」은 눈썹이 뉘우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횡포를 부려 결국 눈 • 코 • 입 • 귀 모두가 제 맡은 일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눈이 보지를 못하게 되고 코가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됐으며, 입이 먹지를 못하고 귀가 듣지를 못하게 되자 결국은 그렇듯 서슬이 시퍼렇던 눈썹도 죽게 된다는 얘기였다.
사무실 그의 책상 서랍에 있던 그 작품이 그 사내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정보부에서 보름만에 풀려난 바로 그 날이 었다.
정보부에서 풀려난 그가 맨 처음 들른 곳은 이부일의 사무실이었다. 강정길이 나타나자 이부일은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다가 그의 단골인 푸줏간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강형. 날 용서해 주시오. 내가 무심코 한 한 마디 때문에… 용서하시오. 국회의원에 출마할 혁명주체 예비역 장성의 전기를 강형에게 씌울 생각인데 어떻겠냐고 묻기에 난 강형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게 하려고 생각없이 불쑥 강형이 3선개헌에 반대하는 서명을 했다는 얘길 했던 것 인데… 그 말이 이런 끔찍한 일을… 난 그놈과는 완전히 의절했소”
이부일은 강정길이 보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것저것 캐묻다가 자기가 홍출판사 전무 신태진과 의절했음을 밝혔다.
“이부장님하고 신전무하고 친구였습니까?'
강정길의 질문에 이부일은 잠시 망설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실은 내 외육촌이요. 생일이 한달쯤 빠르니까 형인 셈인데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동창이라 아주 가깝게 지냈소. 그런데 학교 다닐 때까진 그렇지 않았는데 나중에 아주 저질 인간이 됐더라구. 집안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게 되자 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가 장교가 됐는데 그런 영향 때문인지 학교 다닐 때완 영 딴 사람이 됐습니다.”
'...'
“그리고 최사장은 우리 고등학교 2년 선배요. 최사장이 뭘 보고 그런 놈을 전무 자리에 앉혔는지 모르지만 모르면 몰라도 언젠가 그놈한테 크게 배신당할 거요.”
“혹시 이부장님과 아는 사람이 중앙정보부에 있습니까?'
강정길은 자신을 취조했던 사내가 몇번이나 ‘이부일’이란 이름을 들먹였던 것을 상기하며 물었다.
“그렇잖아도 그 얘길 하려던 참이었소. 실은 우리 고등학교 동기생 하나가 그 곳에 있소. 신태진이가 걔한테 강형이 3선개헌을 반대하는 서명을 했다고 일러바친 거요. 지독한 반체제 시인이고 어쩌고 하면서 강형한테 망신당한 보복을 했던 거요, 내 그럴 줄 알고 강형 사무실에 전활 했더니만 사환 아이가 하는 말이, 사무실에서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강형이 어떤 사람에게 끌려 차를 타더니 사라지더라는 거요. 아차 싶어 정보부에 있는 그 친구의 전화번호부를 수소문해서 알아가지고 전화를 했더니만 곧 풀어주겠다고 합디다. 내 전화로 강형 얘기를 자세히 듣고는 그 친구가 신태진이한테 전활 해 나무랐던 모양이오. 사사로운 일로 별것도 아닌 사람을 큰 일이나 벌이고 있는 위험인물인 양 고발했다고. 그러자 신태진이가 후꾼 달아서 뭔가 강형의 꼬투리를 잡을 만한 것이 없나 해서 책상 서랍을 뒤지다가 강형의 작품「안면문답」을 발견하게 되어 즉시 그걸 갖다 준 모양이에요. 그래 이번엔 내 입장이 난처해졌고, 강형은 강형대로 고초를 겪게 되고…. 일이 그렇게 된 거요. 어쨌거나 내 실언으로....”
“아닙니다. 이제 모든 궁금증이 다 풀렸습니다. 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내 책상 서랍을 뒤진 줄로만 알았었습니다.”
“몸이나 상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많이 맞았소?'
“보름 동안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치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오는 길입니다.”
강정길이 웃으며 말했다.
“죽일 놈들!”
이부일이 어금니를 물었다.
강정길이 그러한 이부일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 김형사가 입을 열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십니까? 강선생이 주는 잔을 기다리다 목젖 떨어지겠습니다.”
“아하, 내가 또 법을 어겼나요?'
강정길이 자신의 앞에 놓인 빈 잔을 건네며 비아냥거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 날 형사로 생각지 마십시오.”
“술자리라고 형사가 주사로 바뀌는 건 아니잖습니까. 내 얘기는 잔을 받았으면 줘야 하는 게 주법인데 잔을 받고도 주질 않고 있었으니 법을 어긴 게 됐다, 이런 말입니다. 주법도 법 아닙니까?'
“그렇게 말슴하시니 대답할 말이 없군요. 그렇지만 그 말씀이 가시가 있는 말씀 같아서….”
김형사의 목소리엔 힘이 빠져 있었다. 경찰관으로서의 위엄은 물론이려니와 불청객으로서 부리던 허세마저도 완전히 꺾여져 있었다. 그런데 그와는 달리 강정길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 있었다. 술기운과 함께 증폭된 사찰요원들에 대한 반감 탓이었다.
“내 말에 가시가 들어 있다고요? 가시가 아니라 뼈겠지요. 기왕에 법 얘기가 나왔으니 한번 물어보겠는데 도대체 법이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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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길의 느닷없는 질문에 김형사는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나 강정길의 태도는 집요했다. 그는 자신이 술이 취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으나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법을 집행하시는 분이니까 법에 대해선 빠싹 할 게 아닙니까?'
“우리 다른 얘기나 합시다. 그건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또 재미도 없잖습니까.”
“법이란 게 무엇인지 내가 한 마디로 정의를 내려볼까요?'
“해보세요.”
“법이란 상식입니다. 한문으로 물이라는 水자 가 간다는 뜻의 去자가 합쳐져서 법 法자가 됐잖습니까. 물이 간다는 뜻이죠. 물은 어떻게 가는가. 높은 데에서 낮은 데로 흘러가지요.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상식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법이란 것은 상식이다 이겁니다. 인간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런 상식을 무시하는 행위를 제재 하는 것이 법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 답게 함께 사는 일에 기여하지 못하는 법이라면 그걸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국민들의 안정된 삶과 정의를 지켜주지 못하는 법은 악법 이오 악법!”
강정길은 들고 있던 술잔 밑바닥으로 탕 탁자를 내리쳤다. 술청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김형사는 마치 이해심 많은 사람이 참을성 있게 친구의 술주정을 받아주듯이 허허 웃고 나서 말했다.
'악법도 법은 법이잖습니까.”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얘기를 하려는 모양이신데, 그가 독배를 마신 것은 “악법도 법’이 라는 법실증주의의 소신으로 한 행동이 아니오. 악법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오. 순교자처럼! 악법필멸이오, 악법은 반드시 멸망하게 돼 있소!”
강정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러자 김형사가 그의 옷소매를 붙잡아 앉히며 말했다.
“그런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 내가 강선생을 만나러 온 얘기부터 들어 보세요.”
김형사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그 위압적인 목소리로 강정길은 그의 직업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은근히 마음에 켕겼다.
“자아, 한 대 태우시오.”
김형사가 담배를 권한 뒤 자기부터 불을 붙이고 불을 붙여 주었다.
“진작 얘기를 했어야 옳은데 직업상 밝힐 수가 없어서….”
김형사가 하던 말을 중동무이로 만들고는 연거푸 담배를 빨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입학하던 해 졸업을 하셨더군요. 제가 고등학교 후뱁니다.”
김형사의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강정길은 피가 치솟는 듯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당신 지금 공무집행 중이오?'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지금은 형사가 아니라...”
강정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엉거주춤 일어 난 자세가 되어 김형사의 뺨을 호되게 쳤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이 개자식!”
강정길의 손이 다시 한번 그의 뺨을 치려는 순간 누군가 그 팔에 매달렸다. 그의 아내였다.
“여보 당시 술 취했어요!”
“놔 둬! 공무집행방해죄는 아니니까. 너 이 자식, 선배를, 죄 없는 선배를 그렇게 괴롭히고… 오늘은 미행까지 하고, 그럴 수 있는 거아?'
'며칠 전에 사푤 냈습니다. 사실 나도 그 동안 괴로웠습니다. 그래 오늘은 그런 얘길 하려고 온겁니다. 자아, 내 얘기나 좀 들어보시라구요.”
“난 너 같은 놈 얘기 들을 시간 없어!”
강정길은 휑하니 돌아서서 술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걸음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가 담배를 석 대째나 피웠는데도 곧 뒤따라 을 줄 알았던 그의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술값 때문에 시비라도 붙었는지 모른다 싶어 방문을 열고 구두를 신으려는 참인데 아내의 기척이 났다.
“술값은 어떻게 됐어?'
“한사코 자기가 내겠다고 합디다. 그러잖아도 당신한테 술 한 잔 사려고 왔다면서.”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어?’
“당신한테 얘길 다 못했으니 나한테라도 해야 겠다고 해서….”
“개자식!”
“그 사람 며칠 전에 형사질 때려치웠대요. 자기 적성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더 오래 형사질 하다가는 사람 버릴 것 같더래요. 그래 자기 친구하고 조그만 사업 하나 벌였대요”
'...'
“그 사람도 먹곤 살아야겠고, 그러자니 위에서 시키는 대로 안할 수가 없었겠지요.”
'...'
“그만두고 나서도 늘 당신 생각 때문에 속이 편치 않았는데, 오늘 다 털어놓은데다가 뺨까지 한 차례 맞고 나니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며 며칠 안으로 다시 한번 찾아오겠답디다.”
'...'
“당신 그 사람이 형사 그만둔 것 알고 뺨을 친 거예요?’
“술자리니까 형사로 생각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자는 줄로만 알았어. 뭔가 알아낼려고 수를 쓰는 줄로만 알았다구.”
“오늘 당신한테 동서가 찾아 와서 초저녁부터 술자리가 벌어졌었다고 얘길 했더니 자기도 당신이 전작이 있는 줄 알았다고 합디다. 당신 지금 술 취했지요?'
“안 취했다면 거짓말이지. 취하긴 취했지만 조금밖에 안 취했어. 그 새끼 때문에 외려 술이 깼다구.”
‘'내가 오늘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요? 난 세모돌이가 당신 잡아가려고 온 줄로만 알았어요. 그 래 세모돌이 뒤를 밟았는데 술집으로 들어가더라고요. 유리문 틈으로 들여다 봤더니만 당신이 거기 앉아 있습디다. 그래 계속 엿보니 당신을 잡 으러 온 것 같지는 않고, 당신은 뭔 얘기가 그렇게 긴지… 난 당신이 뭔가를 열심히 변명하는 줄 로만 알았다고요. 그런데 느닷없이 세모돌이의 뺨을 후려치길래…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요 만약 세모돌이가 형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겠어요?’
“그래서 뺨을 치기 전에 물어 봤다구. 지금 공무집행 중이냐고. 그랬더니 아니라고 하길래 적어도 공무집행방해로 끌려가진 않겠구나 하고….”
“당신 오늘 참 이상하네요”
“왜?’
“집에서 마신 술도 그렇고 술집에서 마신 술도 그렇고 상당히 많이 마신 술인데 별로 취한 것 같질 않으니까 하는 소리예요.”
“내가 생각해도 그래.”
강정길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 그의 아내는 잠자리를 보기 시작했다. 이부자리를 다 편 다음 그녀는 다시 물었다.
“세모돌이가 사표 낸 줄을 모르고 뺨을 쳤다면서, 만약에 사표를 내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난 지금도 가슴이 떨려요.”
“고등학교 후배라는 말을 듣자 피가 치솟더라구.”
“어머, 세모돌이가 당신 후배래요?’
“아무리 무법천지라지만 후배 녀석이…. 이제 그 얘기 그만해. 생각만 해도 열이 올라.”
'...'
강정길은 아내가 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겉옷을 벗는 모습을 보며 담뱃불을 껐다.
“준용이 안 데려와도 될까?'
“걔가 거기서 한두번 잤어요? 걔 걱정 말고 당신이나 어서 주무세요.”
강정길이 옷을 벗어 벽에 걸며 말했다.
“존 토머스가 제인 부인을 방문하고 싶대.”
“제인 부인이 허락하겠대요.”
강정길과 그의 아내는 유쾌한 웃음을 합쳤고 곧 그들의 몸도 이불 속에서 합쳐졌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