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우정국의 첫 배달 우편물은 크리스마스 선물
“새로이 창설된 조선의 우정국에서 배달된 우리의 첫 우편물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최초의 우정국은 1884년 12월 4일의 유혈 폭동이 일어난 후 얼마 동안 서울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폭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우정국은 내가 받은 우편물과 함께 파괴되었다. 그러나 조선사람은 우편과 같은 세계적인 흐름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파괴된 우정국의 뒤를 이어 그보다 더 훌륭한 우체국의 건립을 위한 계획이 이뤄짐으로써 우표 수집가를 위해 몇 종의 우표가 발행되었고, 근대화 과정에 역행하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앞의 글은 조선 말 주한 미국 전권공사를 지낸 앨런(H. N.Allen ; 安連)이 쓴 에 나오는 대목이었다.
<조선견문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을 넘기는 순간, 우표수집가 이동성은 온몸을 엄습하는 전율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를 흥분케 한 구절은‘우정국에서 배달된 우편물’과‘내가 받은 우편물’이었다. 우정총국 시절에 배달된 우편물이 있었다면 문위우표를 붙인 편지봉투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잖은가?
그렇다면 그 우편물은 한국에서 부친 것이었을까, 미국에서 부친 것이었을까?
문위우표의 행방
우표수집가는 우편 사학자다. 우표 수집에 깊이 빠지면 저절로 우편사업이나 우편제도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되고, 또 우편사를 연구하게 된다. 우표수집가 이동성이 앨런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조선말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역학 구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앨런이 우표수집가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우편사가, 나아가 우리나라 정보통신사가 이만큼 정리된 것도 그들 우표수집가에 힘입은 바 컸다.
근대우편의 특징은 우표를 우편 이용의 기본 도구로 삼고 출발했다는 점이다. 서구식 우편제도를 도입하는 우정총국에서도 당연히 우표를 발행했다. 5문·10문·25문·50문·100문 등 5종의 우표를 발행했다. 우표의 액면 금액이 당시에 통용되던 화폐 단위인‘문(文)’으로 표시돼 있어, 뒷날 우표수집가들이 그들 우표를 ‘문위우표(文位郵票)’라 불렀다.
문위우표는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찍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우표를 인쇄할 시설이 없어 1895년에 발행한 태극우표까지는 외국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원래 태극 문양을 디자인해 보냈으나 일본에서 다시 디자인한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모양이 되었다. 이 우표의 디자이너는 일본인 사이토(齋藤知三)이라 기록돼 있다.
문위우표는 우정총국 개국일인 1884년 10월 1일에 맞춰 발주했다. 5문과 10문 우표는 개국일 전에 도착했으나, 나머지 3종의 우표는 이듬해 3월 뒤늦게 왔다. 하지만 우정총국이 업무를 개시한 지 20일 만에 문을 닫았으므로 실제로 사용된 것은 5문과 10문 우표 두 종에 불과했다. 그것도 일부 우표만 사용했다.
25문·50문·100문 3종의 우표는 포장을 풀지도 못한 채 창고 속에 처박혀 있었다. 결국 미발행으로 폐기처분 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문위우표의 발행 수량은 액면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났다. 10문 우표가 100만 매, 100문 우표가 30만 매였고, 나머지 5문·25문·50문 우표는 각각 50만 매였다. 그 많은 우표의 행방은 어떻게 됐을까?
서울중앙우체국은 6·25전쟁 때 새까맣게 불타 버렸다. 그 자리에 3층짜리 청사를 신축했다. 새 청사 낙성식이 있던 1957년 1월, 대통령 이승만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를 했다.
“갑신란 때 폭도들이 우정국을 습격해 기물을 마구 부수고 우표를 모조리 길바닥에 흩뜨려 버렸는데, 그걸 주워 방벽에 발랐어요. 그걸 외국인들이 보고 수십만 달러에 사갔어요.”
문위우표는 여느 우표보다 크고 무늬도 고와 도배종이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70년이 지난 일을 그처럼 생생히 기억한 걸 보면 이승만 자신이 우표수집가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아무튼 일부의 우표는 그렇게 사라졌을 것이다. 설사 폭도들이 일부를 가져갔다 해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니 불쏘시개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5문과 10문 우표의 일부일 뿐이었다.
다행히 나머지 우표의 행방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 고액권 3종 130만 매는 1886년 1월 전량독일인 회사 세창양행에 불하되었다고 <외아문일기>는 적고있다. 그 사실만 기록했을 뿐 판매 가격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