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일어난 6·25전쟁은 국내의 산업시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피해를 입긴 통신시설도 마찬가지였다. 우체국과 전화국 등 건물은 물론 전화교환시설과 통신선로 등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80%에 가까운 통신시설이 망가졌다. 한편으로 전쟁은 새로운 제도를 요구했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우편제도였다. 군사우체국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3개월 만인 1950년 9월 22일에 처음 문을 열었다. 부산에 세운 야전우체국이 그 효시였다. 당시는 국군과 UN군이 대구와 부산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 공산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군사우체국을 설치해 달라고 먼저 요청한 것은 국방부였다. 전방에 있는 군인과 후방에 있는 가족 사이에 연락이 끊기면 군인의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들 사이를 연결해 주자며 군사우편제도를 제안했던 것이다.
우편차 도착하면 장병들 춤추며 반겨
처음에는 야전우체국을 육군과 해군의 사단급 이상의 부대에만 설치하기로 하고 육군중앙야전우체국과 해군중앙야전우체국을 세웠다. 육군중앙야전우체국은 대구에, 해군중앙야전우체국은 부산에 두었다. 그때 설치된 야전우체국은 육군에 13개, 해군에 5개였다.
문자 그대로 야전우체국이어서 일반 우체국에서 제공하는 모든 우편업무를 취급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1종인 편지와 2종인 엽서만 취급했다. 공용 소포도 취급했다. 우편물의 체송은 군대의 전령 편을 이용했기에 매우 빈약했다. 게다가 후방은 후방대로 피난민이 많아 가족이 흩어지고 주소가 바뀌는 바람에 갈 곳을 잃은 편지가 갈수록 늘었다. 과연 군사우편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하기까지 했다.
1950년 11월 국군과 UN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체신부는 북한으로 조사단을 파견해 평양과 원산에 각각 중앙야전우체국을 설치했다. 이윽고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자 폐지할 수 밖에 없었다.
1951년 4월 새로 만든 군사우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시행규칙이 마련됨에 따라 군사우편제도가 법제화되었다. 다시 그 해 11월에는 야전우체국제도를 폐지하고 육군중앙야전우체국을 군사우체국이라 개칭했다. 동시에 해군중앙야전우체국과 각 부대에 설치한 야전우체국을 군사우체국 파견국으로 개편했다. 당시 군사우체국 산하의 파견국은 모두 20개였는데, 군사우체국이 각 파견국을 지휘 감독했다.
1953년 2월 체신부 우정국에 군사우편과와 검열과를 신설하면서 그동안 국내우편과에서 맡고 있던 군사우편업무를 군사우편과에서 관장했다. 또한 군사우체국 파견국이라 불리던 우체국을 승격시켜 군사우편업무를 취급하는 우체국은 모두 군사우체국이라 불렀다.
군사우체국이라 해서 우편에 관한 모든 업무를 우체국 직원이 담당했던 것은 아니다. 우편물의 수집과 배달은 각 부대의 연락병이 맡았다. 일선에서는 우편물의 운반도 부대 차량으로 했다. 따라서 연락병이 도착하면 각 부대의 장병들은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겼다.
“우편행낭을 실은 차가 도착하면 장병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우편행낭을 둘러쌌어요. 그러다 자기에게 온 편지가 있으면 편지를 받아들고 어린애처럼 춤을 추며 반겼어요. 반면에 편지를 받지 못한 병사들은 풀이 죽은 얼굴로 돌아가곤 했어요.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선 장병들의 낙이 뭐 있었겠어요. 후방에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듣는 게 유일한 낙이었죠.”
군사우편업무로 잔뼈가 굵어 우정국 군사우편과장까지 지냈던 손승록의 회고였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독 속에 사는 장병들이 가족의 소식에 얼마나 목말라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월남전 때 이용량 최고로 많아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군사우편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군사우체국에서 취급하는 업무도 점차 늘어났다. 1종과 2종인 일반 편지와 엽서에 이어 3종과 4종인 정기간행물과 서적도 취급했다. 등기와 소포우편물도 취급했다. 환금(換金)과 저금업무도 취급했다. 소포우편물은‘입대장정소포우편물’과 ‘위문소포우편물’에 한해 취급했다.
그렇다면 군사우편은 누가 더 많이 이용했을까? 일선의 장병일까, 후방의가족일까?
군사우편의 이용 상황을 살펴보면, 접수물량이 배달물량보다 훨씬 많았다. 일선 장병이 보낸 우편물이 후방 가족이 보낸 우편물보다 많았다. 통상우편물의 경우, 접수물량이 배달물량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그만큼 군인들이 외롭고 가족을 그리워했음을 보여주는 통계라 하겠다. 하지만 등기나 소포우편물의 경우, 배달물량이 접수물량에 비해 2~3배나 많았다.
군사우편 이용량이 가장 많았던 것은 월남전쟁때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휴전이 성립된 1950년대는 군사우편의 연간 이용량이 많아야 3천만 통이었다. 월남 파병이 본격화됐던 1960년대 후반에는 그 숫자가 부쩍 늘어 5천만 통에 육박했다.
그러다 월남 파병이 끝나면서 이용량이 급격히 줄었다. 군사우편은 일반우편과 다른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있다.
첫째, 군사우편은 무료였다. 물론 일선 장병이 이용하는 우편물이 무료였다. 군사우편법 2조는 전방에서 발송하는 우편물은 그 요금을 면제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모든 우편물이 무료였던 것은 아니다. 등기나 소포우편물은 유료였고, 일반 우편물도 발송일자나 지역에 따라 유료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 장병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긴 했지만, 군사우체국을 운영하고 우편물을 발송·배달하는 부담은 체신부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그러다 1965년 군사우편법을 개정해 우편요금의 절반을 받기로 했다. 편지를 부치는 장병에게 직접 받지 않았다. 국방부가 전체 이용량을 계산해 체신부에 납부했다.
둘째, 군사우체국은 일종의 이동우체국이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군사우체국이 일정한 장소에 고정돼 있지만, 전쟁 중에는 군사우체국이 군대와 함께 이동했다. 1개 우체국에 3명 정도인 직원은 군복을 입고 군대와 같이 행동했다. 때문에 언제나 사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셋째, 군사우체국의 국명 표기는 문자로 하지 않고 우편번호와 같은 숫자로 했다. 그러다 보니 발송인이 오기하는 경우가 많아 주인을 찾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