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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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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에 들어서 확장일로에 있던 우리나라 통신사업은 1905년에 체결된 韓日通信機關協定에 의하여 일본에 침탈당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통신권 침해는 그 이전부터 줄곧 행하여져 왔다.

글. 李琪烈 본지 편집실장

줄거리로 보는 체신 100년 (III)
198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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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한 通信權의 침해

1900년대에 들어서 확장일로에 있던 우리나라 통신사업은 1905년에 체결된 韓日通信機關協定에 의하여 일본에 침탈당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통신권 침해는 그 이전부터 줄곧 행하여져 왔다.

1876년 개항이 된 이래 부산•인천•원산 등지에는 일본의 우편국이 불법으로 설치되었으며, 1891년에는 서울에 인천일본우편국 京城出張所가 설치되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전신선을 불법으로 가설하고 군사상 요충지에 野戰郵便 施設을 설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신선을 조선 정부에 환수하거나 군대를 철수하기는 커녕 전신사업을 탈취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 1월에는 일본 우편국이 29개나 되었다. 1899년 12월에는 韓日郵便協定이 체결되어 국내 의 일본 우편국을 통하여 국제우편물을 교환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그들 독자적인 전신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1900년경에는 전화시설까지 무단으로 개설하였다. 즉, 1901년 재한 일본육군電信部는 수비대와 헌병대간의 전화시설을 가설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공사관과 영사관, 거류민회, 상인 등은 각자 전화기를 구입하여 가입하고자 하였다. 이에 전신부는 헌병대(현재의 충무로 4가 소재)내에 교환기를 설치하고 병사로 하여금 교환을 맡게 하여 전화교환업무를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1902년 6월에는 전화가입자가 50명에 이르렀다.

1902년부터 전화사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일본은 한국 정부에 대하여 京仁간의 전화 가설권을 요구하였다. 通信院은 이러한 일본의 요구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하여 동년 3월에 경인간의 전화를 서둘러 개설하였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한국의 전신망을 장악하였다. 1904년 2월에는 한국의 모든 전신권을 전용하겠으니 응낙하라고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요청은 형식상의 행위에 불과하였고, 그들은 이미 우리의 전신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있었 다. 또한 그들은 우리 정부의 승낙도 없이 漢城電報總司에 침입하여 통신기를 따로 설치하고 진고개에 있는 그들의 경성우편국 사이에 전신선을 가설하여 각지에서 오는 전신과 전화를 일본 기관에 연접하였다.

이와 같은 무력에 의한 일본군의 한국 통신기관에 대한 침해 내지 강점행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노일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통신망의 확대를 꾀하여 韓日通信 機關協定 체결의 전날인 1905년 3월 31일에는 전국 각지에 70여개소의 통신시설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일전쟁 이래 개설한 野戰郵便局도 계속 증설되어 군용통신소를 합하여 57개소에 이르렀다.

1903년 6월에는 개성의 일본우편국에서 자전거를 사용하여 체송을 실시하자 개성우체사의 우편물이 줄어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대비하여 한국 정부는 체전부를 중원하여 서울•개성간의 체송을 1일 1회에서 2회로 늘리고 체전부에게 숙박비를 지급하는 한편, 야간 체송에 따르는 위험에 대비하여 새로운 복장과 提燈 등의 도구를 지급하여 큰 효과를 본 예도 있었다.




조선총독부 체신국



통신사업의 피탈 : 韓日通信機關協定의 체결

한반도를 놓고 러시아와 날카로운 대립을 하고 있던 일본은 英日同盟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입장을 유리하게 해놓고 1904년 2월 旅順을 공격, 노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발발에 앞서 대한제국은 局外中立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병 력을 서울에 주둔시키고, 동년 2월 23일 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규정하고 있지만, 施政 개선에 있어 일본의 충고를 받아들일 것이며, 한국 황제의 안녕 보전이 위험할 경우 일본은 이에 필요한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 의정서는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을 정당화한 것으로 사실상 대한제국을 일본의 保護國化하였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통신기관에 대한 탈취 기도는 한일 의정서 체결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동년 3월 樞密院 의장 이토(伊藤博文)은 한일의정서 체결에 대한 한국민의 반발을 무마하고 한국 침략의 구체적인 계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내한하였다. 이 때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林權助)는 對韓政策에 관한 설명 중 통신사업에 대하여 “우편•전신에 관한 특권은 일본 정부의 특권으로 하고 그 경영을 확장하여 한국 정부의 동일 제도를 심히 저해하지 않는 정도에서 획득하는 것이 가하다.” 고 건의하였다.

이토의 방한 결과를 토대로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하여 정치•군사상의 실권을 거두고 경제적 이익을 도모한다는 기본방침을 세우고, 그 구체적인 실행방안으로 對韓施設網領을 작성하였으며, 이에 대한 시행요령으로 對韓施設細目을 입안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① 일본 군대의 한국 주둔, ② 한국의 외교권 감독, ③ 한국의 재정 장악 및 군대의 해산, 재외 한국공사관의 철수,④ 교통기관의 장악, ⑤ 통신기관의 장악, ⑥ 황무지 개척권의 요구 등이었다.

對韓施設網領에 나타난 통신기관 장악에 대한 요구의 구체적인 내용은 “통신기관 중 가장 중요 한 전신시설은 일본의 소유나 관리하에 두어야 하며, 우편업무도 일본의 이익 발달에 따라 더욱확장시킨다. 한국의 통신기관은 극히 불완전한 상태로 경영수지 또한 맞지 않으며, 일본 기관과 충돌을 면할 수 없으므로 한국 정부로 하여금 우편•전신•전화사업의 관리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게 하여 양국 공통의 조직체로써 합동 경영을 하게 한다. 한국 정부가 반대할 경우에는 일본은 중요한 선로를 별도로 만들어 독자적으로 경영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對韓施設細目에서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우편•전신 및 전화사업의 관리를 일본 정부에 위탁케 한 후 공통경제로써 이를 경영할 것. 위 와 같이 행하여질 수 없으면 전쟁 계속 중에는 중요 선로를 택하여 일본의 군용전선을 가설할 것. 경성에 있어서는 日韓 전화의 기계적 通聯을 영구히 유지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은 한국 통신기관의 시설의 불충분함과 경영상의 손실을 구실로 내세워 한국의 식민지화 방침에 따른 통신사업의 침탈을 합리화하고자 했다.

일본은 이러한 對韓政策을 1904년 7월 주한일 본공사에게 지시하는 한편, 일본 遞信省은 外信 課長 이케타(池田十三郞)를 한국에 파견하여 한국 통신기관의 실태를 조사하게 했다. 내한한 이케타는 통신기관 통합에 관한 試案을 작성하였는 데, 그것은 委託經營案과 共通聯結案의 두가지였다. 전자는 한국의 통신사업의 관리를 일본 정부에 위임한다는 것이었으며, 후자는 통신원을 비롯한 우체총사•전보총사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필요시에는 일본인을 한국 통신기관에서 집무케 하며, 모든 사업은 일본의 승인하에 운영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동년 12월 일본공사 하야시는 委託經營案을 내세워 한국 정부와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는 한국 통신기관의 경영상의 적자와 공중의 편익에 공헌토록 한다는 것을 구실로 내세워 위탁경영안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각 대신은 국민의 여론을 이유로 들어 통신원은 그대로 두고 일본인 고문을 고용하여 개선을 도모하고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서는 일본 통신기관을 별도로 설치하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하야시는 “장래 한국 정부에 충분한 재정적 여유가 생길 때는 양 측의 협의로 관리권을 환부한다.”는 조항을 첨가 하여 위탁안의 수락을 촉구하였다. 이 무렵 일본 정부는 한국 통신기관의 통합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對韓政策의 하나이므로 제1안을 관철시키라고 지시하였다. 따라서 하야시는 고종과 외부대신에게 위탁경영안의 수락을 계속 강요하였다.

한편 1904년 8월의 제1차 韓日協約 이후 顧問 政治가 시작되면서 재정고문으로 부임하여 內政 전반에 걸쳐 실권을 장악한 메가타(目賀田種太良分)는 1905년 3월 재정 정리라는 명목하에 한국 통신사업의 적자 문제를 들고 나섰다. 그가 내세 운 1904년도 통신사업의 수지를 보면, 한국 통신 사업의 경우 수입이 100,080元, 지출이 330,668원으로 적자가 230,588원이었으며, 재한 일본 통신 사업의 경우 수입이 377,136원, 지출이 329,937원 으로 47,199원의 이익을 내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통계수치를 내세워 재정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의 통신사업을 일본에 위탁, 합동경영을 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와 같은 통계수치의 신빙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당시 한국은 통신사업의 초창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우체국의 증설, 전신선로의 신설 등으로 투자비와 인건비의 지출이 과다하여 재정상의 손실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측은 이를 핑계로 한국 정부에 계속 강요하여 동년 3월 31일 의정부 회의에서 쌍방이 약간의 수정안을 제기한 다음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1905년 4월 1일 외부대신 李夏榮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韓日通信機關協定이 조인되어 우리나라 통신사업의 관리를 일본에 위탁하게 되었다.

동 협정서의 주요 내용을 보면, ①한국은우편• 전신.전화사업(宮內部 소속의 전화는 제외 )의 관리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고, ② 이미 시설된 통신사업에 관련된 토지•건물•기계와 기타 모든 설비를 일본 정부에 인계하며, ③ 일본은 통신기관 의 확장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의 토지와 건물을 마음대로 수용할 수 있고, ④ 通信院의 존치는 한국 정부의 임의로 하되 통신기관의 운영과 관리는 일본이 독자적으로 행하며, ⑤ 한국 정부의 재정이 원활하여지면 양국 정부가 협의하여 통신 기관의 관리를 한국 정부에 환부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위로 이른바 韓日通信機關協定이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우리 정부가 경영하던 통신사업권을 일본에 강탈당하였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를 병합하기 위하여 강행한 단계적 선행조치의 하나였는데, 乙巳五條約보다 반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 협정의 체결에 대하여 물론 우리 정부는 반대하였다. 고종을 비롯한 정부 관리들은 주로 民論의 반대를 내세워 협약에 불응하거나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參政大臣 趙乘式은 협상 시초에 신병을 핑계로 불응하다가 사직하였으며, 초대통신원 총판 閔商鎬는 이미 1904년 2월에 일본의 부당한 통신권 침해가 심해지자 이에 항거하여 총판직을 사임한 바 있었는데, 이때에도 의연한 자세로 통신권 통합을 반대하다가 1905년 3월 30일에 해임당하였다. 같은 날 閔商鎬에 이어 총판이 된 張華植은 이틀 후인 4월 1일에 협정이 체결되자 “통신은 나라의 이목이다. 이목이 없으면 사람이 어찌 사람이겠는가.”라고 탄식하며 반대했으나 기울어져 가는 대세를 돌릴 수는 없었다.




좌)통신원 초대총판 閔商鎬, 우)통신원의 마지막총판 張華植


統監府 通信管理局의 등장

1905년 4월 1일에 韓日通信機關協定이 체결되자 일본은 곧 한국통신기관 인계위원(위원장 : 池田十三郞)을 임명하고 즉시 서울로 보냈다. 4월 17일 서울에 도착한 그들은 약 20일 동안 준비작업을 마친 다음 우리 정부에 일본측 인계위원이 임명되었음을 알리고, 조속히 인수작업을 시작할 터이니 우리측의 관계관과 협의하자고 요구하였다. 이어 5월 11일에는 앞으로 통신기관을 일본에서 인수하더라도 이제까지 통신사무에 종사하던 한국인 관리는 그대로 일본 정부의 관리로 임용할 것이라고 통고하였다. 5월 16일에는 통신사무 인계에 있어 모든 회계 정리는 인계 전일까지는 한국측의 책임으로 하고, 인계 당일로 부터는 일본측의 책임으로 한다는 등 세부사항을 통고하였다.

이와 같이 인수를 위한 준비작업을 마친 일본은 동년 5월 18일에 한성우체총사와 전보총사로 부터 시작하여 7월 2일의 강계우체사를 마지막으로 40여일 만에 인수를 완료하였다. 인계 과정에서 위로는 議政大臣으로부터 아래로는 우체사 • 전보사의 일선관원에 이르기까지 인계를 방해하기 위한 공작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후이므로 넘겨 주지 않을 수 없었다.

1905년 11월 己巳五條約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동년 12월 統監府 및 理事廳官制를 공포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統監으로 이토(伊藤博文)을 임명하였다. 통감의 권한은 조약상 주 어진 외교권에 머무르지 않고 행정•사법•군사권 까지 장악하는 것으로 사실상 總督의 권한과 다를 바 없었다.

통감부의 설치와 함께 동년 12월 20일 統監府 通信官署官制를 공포하고, 1906년 1월 10일 通信 管理局을 설치하여 체신사업을 관장케 하였다. 통신관리국이 설치되자 일본은 앞서 그들이 불법적으로 설치 운영하여 온 각종 통신기관과 시설을 이에 통합시켜 한반도에서의 일원적인 통신관리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그들의 육군•해군이 가설하였던 군용통신시설까지 이에 귀속시켰다.

따라서 체신 기구는 중앙에 통신관리국을 두고 지정된 우편국으로 하여금 그 관리사무의 일부를 분장케 하였다. 취급 업무는 우편•郵便爲昔•우편 저금•전신 및 전화였다. 통신관리국은 總務課•業務課•計理課•出納課務課 둥 5과 체제였다.

일본은 한국의 통신기관을 강제로 접수한 후 사업 수행상 일본과 한국의 여건 차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부득이 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본 遞信省의 제 법규를 그대로 적용하였다. 따라서 통감이나 통신관리국의 기능은 한국 통신기관의 관리 또는 감독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관리•감독의 기능도 중앙에 둔 통신관리국 하나만으로는 원활히 수행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경성•부산•인천•원산•군산•목포•평양•의주 등 8개 우편국에 관리 기능의 일부를 분장하였다. 1908년에는 8개 우편국 중 의주가 제외되고 신의주와 청진우편국이 추가 되었다.

정책수립기관이 아닌 관리•감독의 기관이란 점에서 대한제국의 通信院과는 그 성격이 다른 통신관리국이 설치되면서 통신원은 자연히 폐지 되었다. 통신사업 인계 직후에는 일본의 통신기관 引繼委員部와 함께 공존하였으나, 통신관리국의 설치와 함께 통신원은 토지 및 건물을 통신관리국에 양도하고 적십자사 건물로 이사하여 건물 일부를 임시사무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조차도 통신관리국의 부속건물로 되어 물품격납소와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고금관리사무의 개시 일자가 임박하여 吏員양성과 기타 준비로 시급히 인도해 달라는 통신관리국의 요청에 따라 1906년 11월에 그 건물조차 통신관리국에 인도하였다. 이에 앞서 1906년 7월에는 通信院官制를 폐지하고 船舶•海運 등의 소관업무는 農商I部로 이관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통신 사업 관장기관은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朝鮮絲督府 通信局의 등장

1910년 8월 29일 純宗으로 하여금 치욕적인 讓國詔書를 발표케 함으로써 한반도를 병합한 일제는 동일자로 朝鮮總督府를 설치하여 한국의 통치 행정을 담당케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의 공식적인 관제를 제정하는데는 시일이 소요되었으므로 그 사이의 통치행정은 統監府와 그 부속관서에서 담당케 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일부 관서도 필요에 따라 총독부 산하로 하여 존속시켰다.

한일합병 후 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뀌면서 조선 총독부 통신관서관제가 1910년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통감부 통신관리국은 조선 총독부 通信局으로 바뀌었고, 통신국은 통신관리국이 관장하던 업무 이외에 대한제국 정부 소관 이던 航路標識•氣象觀測•電氣事業 등에 관한 관리업무를 관장하였고, 또 1911년 4월에는 水力發電에 관한 업무까지 관장하게 되어 취급업무가 부쩍 늘게 되었다.

庶務課•業務課•計理課•工務課•電氣課 등 5과로 이루어진 통신국의 주요 업무는 ① 통신사업 관리(우편•전신•전화의 시설•업무•감독) 및 통신요원의 양성, ② 郵便爲替貯金의 수불 및 감독, ③ 국고금의 수불 및 年金•恩給의 지급, ④ 항로표 지의 시설•감독 및 항로표지요원의 양성, ⑤ 기상관측의 시설•업무•감독, ⑥ 전기사업의 감독, ⑦ 수력발전 조사 등이었다.

통신관리국에서 통신국으로 바뀌면서 종래 出納課에서 취급하던 郵便爲替貯金의 계산관리업무를 郵便爲替貯金管理所를 두어 관장케 했다. 또한 통감부 시대에 9개소이던 관리사무분장우편국을 경성•평양•부산•원산의 4개소로 줄였다.

통감부에서 총독부로 통신사업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은 통신국을 총독부의 內局으로 할 것이냐 外局으로 할 것이냐는 문제와 종래 우편관서에서 취급하던 국고금을 그대로 우편 관서에서 취급할 것이냐는 문제였다. 결국 통신국은 鐵道局과 함께 총독부의 외국이 되었고, 전국의 주요 우편국은 국고금의 출납•보관에 관한 업무를 계속 관장케 함으로써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1911년 11월 10일 준공된 평양우체국



朝鮮總督府 遞信局의 등장

한일합병 후 총독부통신관서관제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1912년 4월로서 通信局을 遞信局으로 개칭하고 종래 度支部 소관이던 항로 및 선박•해원에 관한 사무를 체신국으로 옮기는 한편 통신국 소관이던 기상관측사무를 총독부 內務部로 이관하였다. 이에 따라 그 기구도 개편되어 소속관서 중 觀測所가 이관되고 航路標識管理斤가 폐지 되는 대신 본부 기구내에 海事課가 설치되어 항로표지•선박•해원 등에 관한 사무를 분장케 되었고, 세관에서 설치하였던 인천•부산•원산•진남포 •용암포 등 5개소의 海事事務管理所를 인수하여 해사과 산하의 체신국출장소로 개편하였다.

그 후 일제시대의 전 기간을 통하여 遞信局의 명칭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체신국의 관장 업무가 늘어나고 줄어듬에 따라 체신국의 기구와 직할관서의 부침이 있었다.

1918년에는 遞信吏員養成所를 설치하여 그때 까지 監理課에서 담당했던 통신요원 양성에 관한 사무를 독립시켰다. 1919년에는 海員 양성기관으로 인천에 海員養成所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1927년 진해로 옮겨졌다. 한편 1910년에는 종래의 9개 국이던 관리사무분장우편국을 경성•평양•부산•원산의 4개국으로 축소하였다는 것은 전술한 바 이지만, 1934년에는 그것들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여 그 명칭을 遞信分掌局이라 고쳐 일반 우편국과 구분하는 한편, 監督課•保險課•工事課•會計課 의 4개과를 두었다. 이로써 오늘날의 체신청에 해당하는 기구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체신분장국은 1940년에 地方遞信局으로 개편되었는데, 경성 지방체신국은 경기도와 충청도•전라북도•강원도를, 부산지방체신국은 경상도와 전라남도를, 평양지방체신국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원산지방체신국은 함경도를 각각 관할하였다.

1931년의 滿洲事變 도발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나선 일본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 정책을 전시체제로 바꾸어 가는 한편 한반도를 침략전쟁의 병참기지화하였고, 특히 1937년의 中,日戰爭과 1941년의 太平洋戰爭 도발 과정을 통하여 한국에서의 전쟁비용 조달과 한국인의 전쟁 협력 요구를 강화하게 되었는데, 그 전쟁비용 조달에 있어 遞信局의 역할이 매우 커졌고, 따라서 체신국의 기구도 개편하게 되었다. 즉, 일본은 식민지 한국에서의 사회간접자본 조달을 위하여 간이 생명 보험 업무를 실시 하였는데 , 침략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그것을 전쟁비용 조달책으로 이용 하였다. 이 간이생명보험업무를 체신국이 맡게 됨에 따라 체신국에 保險運用課가 설치되었다.

전시체제가 심화됨에 따라 체신국의 기구도 이 에 맞추어 바뀌게 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는 종래 監理課 안에 있던 航空係를 승격시켜 航空課로 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을 고비로 하여 중첩되었던 부대관리업무를 타 관서에 이관하기 시작하였다. 즉, 동년 11월에는 전기 및 가스사업을 殖産局으로, 1943년 12월에는 해사 및 항공사업을 交通局으로 각각 이관하였다. 그것은 소위 大東亞通信網의 구성으로 인한 통신관리의 강화와 관장기구의 전문화를 기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체신국에는 통신업무와 보험업무만 남게 되었는데, 이로써 체신국의 기구는 통감부 통신관리국의 기구와 거의 유사한 형태로 환원되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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