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기울어져 가는 나라 조선의 식자층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 둘 있었다.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과 정관응이 쓴 <이언>이 그것이다. 그들 두 권의 책을 통해 조선은 국제정세와 서양의 새로운 문물에 대해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고, 또 나라를 개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두 책을 들여온 사람은 뒷날 세 차례나 내각 총리대신이 된 김홍집이었다. 김홍집(당시의 이름은 김굉집)은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 거기서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과 참찬관 황준헌(黃遵憲)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 두 중국인은 드물게도 일본의 근대화정책에 동조하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김홍집에게 세계 정세와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며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개화를 단행해 부국강병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이라는 책자를 주었다. 그렇다면 <조선책략(朝鮮策略)>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약소국이 열강의 틈새에서 살아남을 길
<조선책략>은 약소국 조선이 청나라와 일본∙러시아∙영국 등 열강의 틈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준 책자였다. 구체적으로 러시아를 가장 위험한 나라로 지적하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지구상에는 대단히 큰 나라가 있으니 바로 아라사다. 그 넓이가 방대해 3개 대륙에 걸쳐 있다. 육군의 정예병이 100여만 명이고, 해군의 거함이 200여척이다. 다만 나라가 북쪽에 치우쳐 있어 기후가 차고 땅이 척박하다. 그러므로 급속도로 영토를 넓히며 사직에 이롭게 하고자 한다.
선왕인 표트르대제 이래 영토를 늘려 그동안 10배나 넓혔다.
현재의 왕에 이르러서는 다시 4해를 관할하고 8방을 병합하고자 중앙아시아에 있는 위구르의 거의 모든 부족을 잠식했다.”
그처럼 영토를 넓히기 위해 광분하고 있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방안도 제시했다. 중국∙일본∙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게 황준헌의 주장이다.
“러시아가 이리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나선 지 300여 년. 처음에는 구라파를 침공했고 다음에는 중앙아시아를 침공했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에 러시아를 막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이 무엇일까? 중국과 친하고(親中國), 일본과 맺고(結日本), 미국과 연결함(美國)으로써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
황준헌의 조언은 외교정책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은 외교에 힘쓰고 통상을 빨리 터야 한다고 주장하며“육군제도는 중국에서 배우고, 해군제도와 조선술은 일본에서 배우고, 과학기술은 서양에서 배워 독립자강의 기틀을 세우라.”고 충고했다. 또한“같은 배타기라도 옛날에는 돛이었지만 지금은 화륜(火輪)이고, 같은 수레타기라도 옛날에는 노새와 말이었지만 지금은 철도이며, 같은 우체(郵遞)라도 옛날에는 역전(驛
傳)이었지만 지금은 전선(電線)으로 행한다.”라며 새로운 교통∙통신 수단의 중요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기선이나 철도와 함께 전신의 중요함을 강조한 대목이라 하겠다.
신지식에 관한 백과사전
김홍집은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이언(言)>도 가져 왔다. 청나라 학자 정관응(鄭觀應)의 작품인 <이언>은 전기∙기계∙국방 등 서양의 새로운 문물은 물론 정치제도까지 소개한 책이었다.
우편과 전보∙전화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전신의 신속함과 효율성, 각국의 이용 실태도 자세히 설명했다. 한 마디로 신지식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이 책을 통해 저자 정관응은 중국의 제도를 고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언>에는 천주교나 기독교는 주자학이나 양명학과 별로 다를 바 없으니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 책에 대한 조야의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고종이 많은 관심을 보이며 순 한글로 된 번역본을 간행케 했다. 원본의 복간본도 간행되었다. 필사본도 널리 퍼졌다. 임오군란 뒤 고종이 국정 쇄신을 위한 좋은 의견이 있으면 건의하라는 교서를 내리자 100여 건의 상소가 올라왔다. 그 중 20여건이 <이언>의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이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꽤나 뜨거웠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개화정책과 척사론
아무튼 김홍집은 귀국하자마자 두 책을 고종에게 바치며 개화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개항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종은 조정회의를 거쳐 <조선책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청나라에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수교할 뜻이 있음을 알렸다.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 이만손을 우두머리로 한 안동∙상주 등지의 유생들이 조정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1881년의 일이었다. 그때 소를 올린 영남 유생들이 1만여 명이나 됐다 해서‘영남만인소(南萬人疏)’라 불렀다.
유생들이 척사론의 입장에서 내세운 논리도 그럴듯했다. 러시아나 미국∙일본은 같은 오랑캐이므로 어느 나라나 별로 차이가 없으며, 현실적으로 그들이 와서 통상을 요구하고 토지를 요구하면 조선은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며, 간교한 일본과 결탁하거나 수수께끼 나라인 미국을 끌어들였을 때 안게 될 위험성, 쓸데없이 러시아를 자극함으로써 오히려 침략을 자초할 위험성 등을 지적했다.
그러자 고종은 유생들의 뜻을 받아들여 <조선책략>에 따른 외교정책을 철회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사실에서 드러났듯 그것은 정치적인 제스처에 불과했고, 고종의 개화정책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나에게는 세 가지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개혁을 행하지 못했으니, 첫째는 내 나라 백성들에게 부끄럽고, 둘째는 세계 만국에 부끄럽고, 셋째는 후세에 대해 그러합니다.”
<서유견문>의 저자이자 개화파로서 늘 개혁을 꿈꿨지만 숱한 시련만 겪었던 유길준은 그렇게 한탄했다. <조선책략>과 <이언>을 처음 들여와 개혁과 개방을 외쳤고, 그리하여 세 차례나 내각 총리대신 자리에 올라 개혁을 밀어붙였던 김홍집의 심정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운명인 듯 줄곧 개화파로서의 길을 걸었으나 김홍집은 한 번도 급진적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내각이 들어서면서 또다시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났으니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었다. 울분에 싸인 그는 고종을 찾아가다 광화문에서 백주 대낮에 성난 군중에게 참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