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의 관문
부산이 항구로서 대외적으로 개방된 것은 1880년대 중반이었다. 운양호사건을 트집 잡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부산과 함께 인천∙원산의 개항을 요구했다. 서둘러 개항을 요구한 것은 일본과 교역할 무역항이 필요했다기보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군항을 탐냈던 것이다. 일본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세종 때부터 왜관이 설치됐을 뿐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부산은 그렇게 밖으로 문을 열었다. 이들 개항장에는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거류하는 일본인은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었다. 조선의 영토임에도 조선의 지배를 받지 않는 특수지역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대륙 진출을 꿈꾸고 있던 일본은 부산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로 하고, 조선시대부터 왜관이 설치돼 있던 오늘날의 남포동∙광복동∙동광동 일대의 왜관 지역을 중심으로 부산을 장악했다.
부산에 일본인 거류지가 조성되자 일본은 자국민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구실로 거류지 안에 우편국을 설치했다. 1876년 11월의 일이니, 조선 정부는 아직 우체국을 설립할 꿈도 꾸기 전이었다. 남의 나라 땅에 제 멋대로 우체국을 세웠으니, 그들이 조선을 얼마나 얕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개항 이후의 부산의 역사는 매축(埋築)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아니다. 부산은 해안선과 산이 맞닿아 있어 도시를 형성할 만한 땅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개항 이후 늘어나는 물동량과 인구증가에 대비하자면 바다를 메워 땅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 최초의 매립 작업은 1887년 부산세관을 짓기 위해 용미산 기슭을 깎아 바다를 메우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02년부터 8년 동안 오늘날의 부산우체국과 부산연안여객터미널∙중앙로∙세관 일대를 메우는 대규모 매립 공사가 진행되었다.
매립 공사를 전담할 기관으로「부산매축주식회사」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매축에 필요한 흙은 영도와 대청로 일대에서 퍼 왔다. 그리하여 4만여 평의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09년부터 3년 동안 영선산을 깎아내리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됐다. 이 공사로 서로 두절돼 있던 경부선의 출발지인 초량역과 관부연락선이 정박하는 부산항이 연결되었고, 중앙동 일대의 넓은 평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부산은 이렇게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메우는 매축공사를 통해 도시 공간을 넓혀 왔다.
부산이 도시로서 급팽창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 해방 당시 인구 30만에 불과하던 부산은 한국전쟁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몰리면서 일시에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거대 도시로 탈바꿈했다. 땅은 좁고 인구는 많다 보니 도로변이며 냇가, 언덕을 가릴 것 없이 피난민의 판잣집과 움막이 빼곡히 들어섰다. 영도∙초량∙범일동 일대에 수용소를 지어 밀려드는 피난민을 수용했지만, 구호 대상인 피난민 수만 해도 50만에 육박했으니 그 혼잡상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부산이 한국 제2의 도시로서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였다. 부산은 한국 최대의 항구 도시라는 입지 조건과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경공업단지로 발돋움했다. 당시 우리 수출의 주력 상품이었던 섬유와 신발∙합판이 부산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합판과 신발은 한때 세계 최대의 단일 생산단지로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해양성과 개방성을 겸비하고 있는 부산인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우리나라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넘어가면서 부산은 소외되기 시작했다.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줄어들면서 부산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었다. 그리하여 한때 우리나라 수출의 4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잘 나가던 부산 경제가 갈수록 힘을 잃더니, 급기야 2003년에는 전국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5%까지 떨어졌다.
이와 같은 제조업의 부진을 반영하듯 부산 인구는 해마다 줄고 있다. 그곳의 인구는 1995년의 385만여 명을 정점으로 갈수록 줄고 있다. 유출 인구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에 의하면, 1989년부터 전출 인구가 전입 인구를 초과하기 시작해 매년 3~4만 명의 순유출로 이어지고 있다 한다. 그것도 부산 인근의 양산∙김해 등지가 아니고 수도권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부산은 탁 트인 바다와 산, 해수욕장이라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지니고 있다. 한반도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어 5대양으로 뻗어 나가는 길목이 되고 있다. 또한 부산은 컨테이너 물동량에 있어 홍콩과 싱가포르, 상하이와 수위를 다툴 만큼 많은 물동량을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동북아의 중심에서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하겠다.
부산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자갈치시장이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자갈치 축제를 대변하는 표어가 암시하듯 해산물을 중심으로 풍부한 먹거리가 있는 곳이 또한 부산이다. 관광도시로서 풍부한 자원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 주는 사례라 하겠다. 게다가 요즘 부산은 영화의 도시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또 최근에는 APEC 정상회의, ITU 아시아 텔레콤, 아시안 게임 등 굵직굵직한 국제행사가 연이어 열리고 있다. 이제 부산이 한반도의 제2의 도시에서 벗어나 국제도시로 발돋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해양성과 개방성을 겸비하고 있는 부산인들이 변화를 구하고 있다 하겠다.
부산체신청 100년을 맞아 부산의 과거를 더듬어보고 미래를 점쳐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