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신확보위원회와 체신문화협회 설립
해방이 되자 체신부 내의 한국인 간부들은 두 가지 단체를 만들었다. 하나는 체신확보위원회였고, 또 하나는 체신문화협회였다.
체신확보위원회는 통신의 자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단체였다. 우리나라 체신사업의 운영 주체가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우리 힘으로 통신기관의 재산을 지키고 사업을 인수받아 차질 없이 운영해 나가자는 게 그것의 설립 취지였다. 어차피 물러나게 될 일본인의 동태와 비행을 감시하는 역할도 자임했다. 그 중심엔 미군정 시절 초대 체신국장을 지낸 길원봉이 섰고, 서울이나 지방에서 간부로 활약하고 있던 나맹기·이재곤·강직순 등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 당시 체신국의 일본인 간부들은 패전 직후의 사회적인 혼란에 편승해 여러 가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창고에 보관된 자재와 비품을 마음대로 절취하고 현금을 가로챘으며, 사업 예산을 나눠 탈출 자금으로 쓰려 했다. 심지어 직장에서 유임하고자 책동하는 자도 있었다. 미군이 진주한 뒤에도 그들의 비행과 책동은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부산우편국으로 집중되는 과초금(過超) 중에서 고액권을 부산·시모노세키간의 연락선내 우편국에 은닉해 놓고 철수 수당으로 분배하려다 한국인 직원에게 압수당한 일이 있었다. 또 조선총독부체신국장 이토는 750만원이라는 거액의 예산을 횡령하려다 발각되기도 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월 체신국 간부들은 문화사업을 담당할 단체로 체신문화협회를 설립했다. 체신부 기관지를 만들기 위한 단체였다. 거기서 준비 작업을 시작한 끝에 그 해 10월 <체신문화>라는 잡지 창간호를 발간했다. 당시는 월간이네 계간이네 하는 형식을 갖추지 않고, 원고가 모이고 회비가 걷히는 대로 두세 달에 한 번씩 펴냈다.
당시는 지리적으로 남북이 갈린 데다 좌우의 대립, 친일 대 반일, 애국 대 매국, 찬탁 대 반탁 등으로 우리 사회가 매우 어수선했다. 게다가 각종 단체와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고, 시위와 소요 사태가 연일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의 일개 부처인 체신부가 기관지 발간을 서둘렀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한 마디로 전통이 있고 문화 의식이 투철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방 당시 체신부는 60여 년이라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일제 40년의 단절 기간이 있긴 했지만, 조선 말부터 우편과 전신·전화라는 신문명을 도입해 국가의 중추신경 역할을 해왔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그 아수라판 같은 혼란기에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기관지를 발간하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체신사업이 곧 문화사업이라는 신념이 있었기에 일반 잡지도 매우 귀한 시절에 동인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체신인의 사업애가 그만큼 강했다고 하겠다.
피난지 부산에서 속간호 발간
체신인의 사업애가 남달랐음은 전쟁 중에 피난지 부산에서 속간호를 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민족의 비극인 6·25가 터졌을 때 인쇄된 잡지가 통권 18호였다.
그 잡지는 채 배포되기도 전에 전량 소실되었다. 전쟁 중에는 잡지 발간이 중단되었다.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52년 8월 느닷없이 속간호가 나왔다. 그 이면에는 당시의 <체신문화>지 주간 이청천의 남모르는 공이 숨어 있었다.
6·25전쟁 때 피난을 가지 못했던 이청천은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 잡지 발간을 계속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체신부 국장급부터 설득했다. 국장급은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았으나 결정권자나 다름없는 차관 강직순은 쉽사리 움직이지않았다.
“차관님, 이젠 <체신문화>지를 속간해야 합니다. 차관님이 결단을 내려주십쇼.”
“당신 정신이 있는 사람이야? 지금이 어느 땐데 그 따위 말을 해? 지금 우리 종사원들은 밥도 못 먹고 사는데, 책을 읽게 생겼어?”
“차관님, 지금의 전쟁은 사상 대립으로 일어난 거지 식량이 부족해서 일어난 게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종사원들에게 정신적 양식을 공급해 줘야 합니다. 종사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선 <체신문화>지가 반드시 필요하잖습니까.”
이청천은 그렇게 강직순을 설득해 피난지 부산에서 속간호를 낼 수 있었다.
체신부의 대표적인 특성으로 손꼽히는 게‘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를 주고받고 정을 주고받는 편지와 전화를 다루는 기관에 근무해서인지 직원들 사이의 인간관계가 매우 따스했다. 통신사업 자체가 정보를 주고받는 문화사업이기에 거기서 오는 따스함도 있겠지만, 부내 직원들 사이에 서로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잡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