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동위원회의 유일한 성과는 남북우편물 교환
해방 직후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남북을 차단하기 위해 철도를 끊고 통신을 단절했다. 해방으로부터 10일이 채 안된 8월 24일 경기도 전곡과 동두천 사이의 38선에서 경원선 철도를 끊어 남행열차를 전곡까지만 운행케 했다. 이튿날에는 황해도 금교와 신막 사이의 경의선을 끊었으며, 이어 토성ㆍ해주 간의 토해선과 사리원ㆍ해주 간의 사리원선의 운행을 정지시켰다. 이렇게 체송로가 끊기자 남북 간의 우편물 송달이 불가능했다. 다시 9월 6일에는 토성·해주 간의 전화선을 차단해 남북 간의 전화마저 단절시켰다. 이 같은 인위적인 분단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미ㆍ소공동위원회가 회담을 열었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정이 내려지고 한반도가 찬탁과 반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던 1946년 1월 미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미군 소장 아놀드와 소련군 중장 스티코프가 회담장에 마주앉았다. 회담에서는 여러가지 현안을 놓고 논의했다. 남북 간의 자유로운 통행을 비롯해 물자의 교역, 전력 공급, 우편물 교환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38선 설정으로 어느 날 갑자기 왕래가 끊긴 남북 간에 풀어야 할 과제는 많았으나, 정치 문제에 휘말려 별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전기 공급, 자유로운 통행, 우편물 교환 등 5개 항목에 간신히 합의했다. 그러나 예비회담에서 합의한 사항도 소련군 사령관의 거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오로지 우편물 교환만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미·소 간의 합의에 따라 제1차 남북우편물을 교환한 것은 1946년 3월 15일이었다. 교환 장소는 38선 이남에 있는 개성역이었다. 이 날의 역사적인 우편물 교환에는 양쪽 점령국 장교와 남북 체신 당국의 직원이 참석했다. 양쪽 대표는 그 자리에서 우편물 교환에 관한 협정을 맺고 2주에 한 번 매 금요일에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양쪽에서 보낸 우편물 수량에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보낸 우편물이 30만여 통인데 비해 북한에서 보낸 우편물은 1만여 통에 불과했다. 북행우편물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자유를 찾아 남하한 사람이 그만큼 많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또 북한은 우편물 교환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아 평양우체국 관내에서 수집한 우편물만 보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다.
당시 개성역에 도착한 양측 열차의 내부 시설이 대조적이었다. 남한 열차는 호화로운데 북한 열차는 초라했다. 직원들의 의복이나 휴대품에도 차이가 났다. 그러자 북한 대표가 교환장소를 개성역에서 개성우체국으로 옮기자고 제의해 2차부터는 개성우체국에서 교환했다. 5차부터는 날짜를 월요일로 바꿔 매주 한 번씩 교환하기로 했다. 그 뒤 교환 횟수를 줄여 매월 2회씩 제2주와 4주 토요일에 교환했다. 북한의 제의에 따라 1947년 1월부터 교환 장소가 38선 이북의 여현으로 바뀌었다. 우편물 교환에 참여한 북한 직원들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물들까봐 남한 사회와의 접촉을 차단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때부터 교환 장소가 여현으로 고정되었다. 1948년 4월에는 다시 교환 횟수를 늘려 매주 1회씩 목요일에 교환했다.
북한 체신상, 남북우편물 교환하자는 편지 보내
‘38우편물’이라 불리기도 했던 남북우편물의 교환은 1946년 3월 15일에 시작해 6·25 직전인 1950년 6월 22일 165회로 막을 내렸다. 그 동안의 이용 상황을 살펴보면, 북행우편물이 192만여 통, 남행우편물이 96만여 통으로 북행우편물이 훨씬 많았다. 남한 인구가 많기도 했지만, 북한 동포들이 소위 반동분자로 몰릴까봐 이용을 꺼렸던 것이 보다 중요한 이유라한다. 또 1948년을 피크로 이용량이 줄어들었는데, 이는 북한의 수신자가 반동분자로 몰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남한에서도 발신을 꺼렸던 때문이다.
우편물마저 끊기면서 남북 간의 왕래 창구는 완전히 막혔다. 그런데 1954년 12월 북한 체신상 박일우로부터 남한 체신부장관 이광에게 느닷없는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남북우편물 교환을 재개하기 위해 예비회담을 갖자는 내용이었다. 1954년 12월 2일 평양에서 발송한 이 편지는 중국 광주(廣州)와 홍콩을 거쳐 12월 11일 서울국제우체국에 도착했다. 엎드리면 코 닿을 데 있는 땅덩어리를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어 중국 대륙을 한 바퀴 돌아오다 보니 열흘이나 걸렸던 것이다.
그 편지 외에도 북한은 우편물 교환을 촉구하는 전보를 대통령과 국회의장 앞으로 보냈다. 전보는 중국 상하이와 홍콩을 거쳐 서울국제전신전화국에 도착했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UN군에도 남북 간에 우편물 교환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남북우편물 교환을 재개하기 위한 회담을 열자는 북한 체신상의 요청에 대한 체신부 간부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우정국장 최재호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6·25전쟁으로 남북으로 흩어진 채 행방을 알 수 없어 안타깝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이산가족에게 그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없다고 주장했다. 체신부장관 이광은 난색을 표시했다. 그들의 제안대로 우리 정부가 그들과의 협상에 응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정권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남북우편물 교환에 대해 일반 국민의 여론도 찬반양론으로 갈렸다. 반대하는 이유가 그럴듯했다. 표현의 자유가 없는 북한과 우편물 교환을 하는 것은 그들의 체제를 찬양하는 선전공세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남한에서 보내는 우편물이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로 꼽혔다. 이제는 남북 간의 형세가 뒤바뀌었다. 남한은 하루라도 빨리 우편물을 교환하고 싶어 하지만, 북한은 한사코 이를 미루려 한다. 정상인이 본다면 너무나도 단순한 것 같은 이 문제의 해법은 쉽게 찾아질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민족의 염원인 남북우편물 교환은 언제쯤 가능할까? 북한이 전체주의 국가로 남아 있는 한 통신의 자유를 풀어 주긴 어려울 것이다. 통신의 자유를 풀어주면 체제 유지가 어렵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소련사회의 강력한 공산주의 일당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바로 서구사회의 자유로운 방송과 정보의 침투가 아니었던가. 북한사회를 옥죄고 있는‘빅 브라더’의 통치가 끝나는 날, 그때 비로소 북한에도 통신의 자유가 주어질 것이다. 남북우편물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 진정한 남북통일이 되었다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