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서남해 방향으로 15.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팔미도(八尾島)라는, 조그만 섬이 있다. 해군 기지가 있을 뿐 민간인이 살지 않으므로 무인도로 치는 섬이다. 그 섬 꼭대기, 그러니까 해발 60미터쯤 되는 곳에 등대 하나가 서 있어 인천항을 드나드는 외항선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등대 1호인 팔미도등대다.
일반인에게 낯설지만 ‘항로표지(航路標識)’라는 낱말이 있다.
배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수시로 배가 있는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배가 연안을 항해할 땐 섬이나 곶, 산봉우리 같은 육지의 목표물을 이용할 수 있지만, 밤에는 그 같은 자연적인 목표물로는 운항 중인 배의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때문에 선박의 출입이 잦은 항구나 뱃길, 또는 암초가 있는 곳에서는 등불이나 눈에 잘 띄는 조형물을 설치해 배의 안전한 운행을 돕는데, 그 같은 시설물을 항로표지라 한다. 항구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등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처럼 눈에 잘 띄는 시설물을 설치하는 대신 소리나 전파를 이용하기도 한다. 안개가 끼면 등댓불이 무용지물이 되므로 고동 소리를 울려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이를 무적(霧笛)이라 한다. 또 등대에서 주기적으로 전파를 발사하면 지나가는 배가 이를 수신해 자기 위치를 파악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위성에서 발사한 전파신호를 수신해 자기 위치를 확인하는 GPS로 발전했는데, 자동차운전자들에게 편리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아무튼 등대라 하면 광파·전파·음파 중에서 광파에 국한된, 제한된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등대와 같은 근대식 항로표지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우리 선조들은 횃불이나 봉화, 꽹과리 등을 이용해 배의 안전한 운항을 도왔다.
일본, 한반도 해상권 장악하고자
등대 건립 강요
전신(電信)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열강의 각축으로 한반도에 들어왔듯, 등대 역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열강의 강요로 설치되었다. 한반도에 전신선을 먼저 깐 나라가 중국이라면 등대를 세우도록 강요한 상대는 일본이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 머물러 있던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가 군함 5척을 끌고 와 인천 월미도에 정박시키고 서울로 진군했다. 그 무렵 서울·인천 간의 전신은 청나라가 관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통신시설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낀 일본군은 해군 소위를 대장으로 하는 통신소대를 편성해 서울과 인천사이에 초소 9개를 설치하고 전신 선로를 연결했다.
그처럼 조선의 지배를 꿈꾸는 일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통신이었다. 전신의 가설과 운영권을 청에 빼앗긴 일본은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국 군함이 통행하는 한반도 연안에 등대를 설치하기로 했다. 일본군은 체신성(遞信省)의 협조를 받아 한반도의 전 연안에 대한 측량 작업에 나섰다. 청
일전쟁 직후인 1895년 6월 일본인 체신기사(遞信技師)가‘메 이지마루(明治丸)’라는 기선을 타고 한반도를 돌며 연안을 측량했다. 4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등대가 필요한 지점과 그 종류 등을 조사한 끝에 등대 35개소, 등대부표 15개소, 부표 39개소 등 총 94개소에 건립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건립비용이 만만치 않자 1901년 재조사를 실시한 결과 32개소에 등대를 건립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 같은 조사를 토대로 일본은 조선 정부에 등대를 건립해 달라고 요청했다. 1883년에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에“조선 정부는 통상 이후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礁標)를 설치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음을 지적하며 압력을 가했다. 러시아와 영국이 이에 가세했다. 한반도에서의 이권을
노린 열강은 조선 정부에 개항을 요구했고, 개항이 되자 배가 안전하게 드나들도록 등대를 세워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조선 정부 역시 등대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어 수십 개나 되는 등대를 건립할 재원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등대를 세워 달라는
열강의 요구가 거세지자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海關燈臺局)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등대를 세우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소월미도·팔미도·북장자도 세 곳에 등대를, 그리고 백암에 등표(燈標)를 건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우리나라의 근대식 등대는 그렇게 1903년 6월 첫 불을 밝혔다.
그처럼 소월미도와 팔미도, 북장자도 세 곳에 맨 처음 등대가 세워졌지만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팔미도 하나다. 팔미도등대를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 꼽는 이유다. 당시의 어부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꼭대기에서 밤새 깜박거리는 불빛을 보며 도깨비불이라 했다 한다.
격동기 역사 지켜본 팔미도등대
팔미도등대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격동기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일본 쪽으로 돌려놓았던 러일전쟁이 발발했던 것도 팔미도 앞바다였다. 1904년 2월 일본 해군은 인천 앞바다에서 뤼순(旅順)으로 향하던 러시아 순양함 카레이츠호와 바랴크호를 기습 공격했다. 러시아 함정은 함포 사격으로 응전했으나 포탄은 곧잘 빗나갔다. 러시아 군은 항복 대신 자폭을 택해 배를 폭파시켰다. 인근에 있는 영국 군함으로 긴급 대피한 바랴크호 군악대는 가라앉고 있는 그들의 배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러시아 국가를 연주했다.
팔미도등대는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도 지켜보았다. 간만의 차가 심하다는 등 몇 가지 악조건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성공 확률이 극히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영흥도를 중심으로 첩보 활동을 펼치고 있던 소위‘켈로(KLO)’부대원들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며칠 앞두고 밤에 발동선을 타고 들어가 팔미도등대를 조사했다. 무슨 까닭인지 등대는 켜지지 않았는데, 조사해 보니 반사경의 전선이 끊어져 있을 뿐 등대는 멀쩡했다. 그들은 도쿄에 있는 UN군 사령부에 필요하다면 등대를 켜겠다고 연락했다. 그러자 1950년 9월 14일 밤 12시 정각에 등대를 밝히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날 밤 그들은 팔미도에 잠입해 등대에 불을 켰다. 수백 척의 함정이 등대를 길잡이 삼아 인천 앞바다에 집결했고, 다음날 새벽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그 작전이 성공한 덕분에 한반도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 등대가 처음 세워졌을 때 그 업무를 관장했던 기구는 통신원(通信院)이었다. 통신원은 우편과 전신·전화 등 일반 통신업무는 물론 선박과 해운, 육운(陸運) 등 교통 업무까지 관장했다. 그러니까 통신원은 오늘날의 교통체신부에 해당하는 기구였던 셈이다. 그러다 일제 말기인 1943년 해운과 항공 업무를 교통국(交通局)으로 넘기면서 등대 관련 업무도 그 쪽으로 넘어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