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앨런이 우정총국에서 받았다는 우편물은 어떻게 됐을까?
그것은 번역자의 잘못이었다. “조선의 우정국에서 배달된 우리의 첫 우편물”은 “조선의 우정국에서 배달될 우리의 첫 우편물”이었고, “내가 받은 우편물과 함께”는 “내가 받을 우편물과 함께”의 착오였다. 원문을 확인한 결과 오역임이 드러났고, 그 배달될 우편물이 배달되기도 전에 우정국에서 분실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처럼 앨런의 우편물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그가 보냈거나 간직하고 있을 문위우표 엔타이 어가 그의 유품이나 그의 미국인 친지의 유품 속에 끼어 있지 않을까 하는 한가닥의 희망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하겠다.
국내 최초로 신문광고 낸 회사, 세창양행
또 하나의 기대를 걸 수 있는 사람은 독일인 마이어(E. Meyer)다. 무역으로 성공한 마이어는 극동으로 진출하면서 홍콩에 본부를 두고 중국 상하이와 톈진, 일본 고베, 조선 제물포 등지에 지사를 설립했는데, 제물포에 설립한 회사가 바로 세창양행(世昌洋 )이었다. 세창양행은 당시 우리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손잡고 무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홍삼과 금, 토산품 등 여러 가지 상품을 수출하고 면직물과 바늘·시계·자전거·금계랍 등 당시로서는 값진 박래품(舶 品)을 수입했다. 금광을 개발하기도 했다. 개항 초기로 일본 상인의 활약이 미약한 틈을 타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며, 우리나라에 재정 차관 2만 파운드(약 10만 냥)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인천·상하이 간의 정기항로와 홍삼의 독점 수출을 노렸으나, 청국 상인의 방해로 실패했다.
세창양행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신문 광고를 낸 회사여 서당 시에는 일반인에게 꽤나 알려져 있었다. 1886년 2월 22일 자 한성주보에‘덕상 세창양행 고백(德商 世昌洋 告白)’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순 한문으로 된 최초의 광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알릴 것은 이번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해 호랑이·수달피·검은 담비·흰 담비·소·말·여우·개 등 각종 가죽과 사람의 머리털, 소·말·돼지의 갈기 털·꼬리· 뿔·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손님과 상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건은 그 수량의 다소를 막론하고 모두 사들이고 있으니,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저희 세창양행에 와서 공평하게 교역 하시기 바랍니다.”
구입 광고와 아울러 판매 광고도 실었다.
“알릴 것은 이번 독일 상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해 외국에서 자명종·요지경·뮤직 박스·유리·각종 램프·서양 단추·각종 직물·서양 천을 비롯해 염색한 옷·선명한 안료·서양 바늘·서양실·성냥 등 여러 가지를 수입해 물품의 구색을 맞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팔고 있으니, 모든 손님과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소매상이든 도매상이든 시세에 따라 교역할 것입니다. 아이나 노인이 오더라도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희 세창양행의 상표를 확인하시면 거의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덕상(德商)’이란 독일 상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광고라는 용어가 없던 시절이라 ‘고백’이라는 낱말을 썼던점또한흥미롭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 광고 대신 쓰던 말이라 한다. 아무튼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광고라 하겠다.
위의 구입 광고에서 옛 동전은 찾되 우표는 찾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광고를 내기 한 달쯤 전, 세창양행은 조선 정부가 가지고 있던 문위우표를 전량 싹쓸이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