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신임으로 선교·의료사업 순풍에 돛단 듯
미국 오하이오 주 출신인 앨런은 신학에 이어 의학을 공부한 뒤 의사 겸 선교사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아내가 출산한 데다 선교도 여의치 않자 선교 대상지를 조선으로 옮겼다.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1884년 7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서울에 오자마자 미국 공사 푸트(Foote)의 주선으로 미국공사관의 부속 의사가 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공사관과 일본 공사관의 공의(公醫) 노릇까지 겸했다. 그때 그의 인생을 180도 전환시킬 일대 사건이 터졌다. 갑신정변이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날 민 왕후의 조카 요수 구파의 거물인 민영익이 칼로 난자당해 초주검이 되었다. 앨런은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부름을 받고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앨런은 조선 사람에겐 낯선 서양 의술로 동맥이 끊기 고온 몸을 난도질당한 민영익의 몸을 짜깁기하듯 꿰매고 다듬어 기적적으로 살렸다. 그 소문이 조선 팔도에 쫙 퍼졌다. 사람들이 매일같이 몰려와 병을 고쳐 달라고 아우성쳤다. 고종은 그를 어의(御醫)로 임명해 궁궐을 드나들게 했다.
의술을 통해 선교사업을 펼치기로 작심한 앨런은 미국 공사를 통해 국립병원 설립 안을 조선 정부에 제출했다. 조선에 서양식 병원을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를 윤허하고 병원 건물로 재동에 있는 큰 한옥 한 채를 하사했다. 바로 갑신정변 때 참살된 홍영식의 집이었다.
홍영식의 폐가에 왕립병원 세워
1885년 4월 앨런은 그 자리에 왕립병원을 설립하고 광혜원(廣惠院)이라 이름 지었다. 갑신정변으로 덕을 톡톡 히본 서양인이 같은 사건으로 죽은 사람의 집을 물려받아 영업장으로 사용했으니, 인연 치고는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보름 뒤고 종은 그 병원에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20여 명의 관리와 하인을 배치했다. 왕립병원이었기에 미국 선교회 측에서는 병원장만 파견하고 일체의 운영비는 조선 정부가 부담했다. 병원에는 매일 수많은 환자가 밀어닥쳤는데, 첫해에만 무려 1만여 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뒷날 이 병원이 오늘날의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 의과대학으로 변신하게 된다.
의사이자 선교사인 앨런은 느닷없이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1887년 8월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할 때 그가 참찬관( 贊官)으로 따라갔다. 그만큼 고종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주 한미국 공사로의 변신을 꾀했으나 실패하자 조선으로 돌아와 제중원 원장 자리를 맡았다. 그러다 1890년 7월 미국공사관 참찬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외교관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부총영사, 대리공사, 변리 공사 겸 총영사를 거쳐 1901년 특명전권공사까지 승진했는데, 1905년 일본과의 마찰을 이유로 해임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조선에서의 외교관 생활이 끝나자, 앨런은 고향으로 돌아가 병원을 차려놓고 조선에 관한 책을 썼다. 그중 하나가 이었다. 그가 쓴 일기도 책으로 엮어져 나왔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바로 <알렌 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