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시간을 이겨낸 우정 역사
1840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우표가 탄생된 지 40여년이 지난 1884년, 우리나라도 고종황제의 재가를 받아 우정총국의 개설과 함께 1884년 11월부터 신식우편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당시 신식우편제도를 이끈 인물은 홍영식. 일본에 우표 5종을 인쇄 의뢰하여 이중 먼저 도착한 5문과 10문짜리 우표가 같은 해 11월 18일 업무개시와 함께 한성-인천 간 우편에 사용됨으로써 역사적인 신식우편제도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게 보였던 신식우편제도의 출발은 업무개시 8일 후 치러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우정총국이 폐지되면서 어렵게 시작한 신식우편제도는 이후 1895년 우편업무가 재개될 때까지 10여 년간 중단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또다시 일제의 압박과 1905년 한일통신협정으로 통신권을 빼앗기는 불행한 역사가 이어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통신권을 40년 만에 회복하게 되었다. 당시의 우편제도는 미군정 하에서 실시되었으나, 1949년 정부조직법이 제정되고 지방체신관서설치법이 공포됨과 함께 명칭이 우체국으로 변경, ‘우편법’을 비롯한 관계법령이 제정되는 등 짧은 기간 내에 우편업무가 정상화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우편 기반시설이 대부분 잿더미가 되었으나, 1953년 휴전 후 우방국의 원조로 복구사업을 시작, 전국을 관할지역으로 하여 1면(面) 1국(局)의 원칙하에 우체국의 숫자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우리나라 최초 우표, 문위우표
개화파 홍영식이 중심이 되어 1884년 4월 우정총국이 설치되고, 그 해 11월 18일 우정총국이 업무를 시작하면서 발행한 문위우표(文位郵票)가 우리나라의 첫 우표다. 문위우표란 당시 화폐단위가 ‘문(文)’이어서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우표는 원래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짜리 등 모두 다섯 종을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 의뢰해 인쇄하였는데, 우정총국 개시 일까지 5문 우표와 10문 우표 두 종만 도착하고, 나머지는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이 폐쇄된 후에 도착되었다. 때문에 25문, 50문, 100문짜리 우표는 미발행우표로 분류된다. 대한민국 정부 이름의 첫 우표는 1948년 8월 1일에 발행된 ‘대한민국 우표’이다.
100년 전통의 우체국 금융
1910년 진체저금(현 우편대체)으로 시작된 저금업무는 한때 일본의 대륙 침략책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952년 우편 연금 및 국민생명보험이 재개된 후 현재의 우체국 예금, 보험업무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체국은 예금, 보험, 공과금 수납 등 종합금융 서비스 체제를 갖춤으로써 국가금융 인프라로서의 역할 수행은 물론, 고객들에게 시중은행과 같은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목조함에서 빨간 우체통까지
대한민국의 우체통은 1884년에 우정총국이 출범하면서 처음 설치되었다. 1993년에는 대한민국에 5만7천여 개가 있었지만, 이후에는 점점 줄어들어 2006년 말에는 27,317개로 집계되었다. 1900년대 전후의 한국의 우체통은 목조의 사각함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이후에 현재와 같은 적색의 원형 우체통이 보급되었다. 일본에서는 우편제도 초기에 우체통이 흑색이었으나, 야간에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등의 문제가 생겨 1901년부터 눈에 잘 띄는 적색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적색은 유지하면서 녹색을 함께 칠하기도 했다. 이후에 대부분 사각형으로 교체되었다.
통신사료, 근대 우정행정의 효시되다
1884년 우정총국이 창설된 뒤 127년의 우정역사가 꽃피기까지 수많은 통신사료들이 기록되었다. 우정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통신사료 일부는 2005년 4월 22일 제50회 정보통신의 날을 기해 석산 진기홍 선생이 기증한 것. 석산 선생의 기증사료는 지난 2005년 ‘대한민국 우표 전시회’ 기간 중 처음 일반인들에게 공개, 근대 행정의 효시인 초기 우편제도를 일반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우편을 창설할 당시의 우정규칙인 대조선국우정규칙, 규장각에 근무할 당시 민영익 등 규장각 관원으로 홍영식이 친필로 작성하여 중산현령에게 보낸 서간(홍영식의 서명부분은 1994년 8월에 발행한 제21차 UPU총회 기념우표의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정총국 개국에 참여했던 일본인 고문 오비스케아키(小尾輔明)가 인천우정분국 이상재 사사에게 우편창설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서신 등 우정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중요 통신사료들이다.
체주사, 체대감이라 불린 집배원
개화기를 타고 도입된 근대 우정은 집배원들의 수난과 인고의 애환 속에서 성장 발전했다. 당시 체전부라 불린 오늘날의 집배원은 완고한 양반들로부터 천시와 멸시 속에서 개화기의 기수역할을 해왔다. 갑신정변 후 10여 년 만에 우편이 재개되었을 때만 해도 서울 장안에서 접수된 우편물은 보름 동안 137통 정도였을 만큼 그 당시 널리 이용되지는 않았으나 차츰 우편의 편리함을 알게 되면서 이용량이 증대되었다. 이후 체전부는 체부 혹은 소중하다고 해서 체주사, 체대감이란 호칭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1967년 현대에 들어 집배원의 날 제정 후 집배원으로 불리고 있다. 구한국시대 체전부는 하인들이 쓰는 벙거지를 쓰고 다녔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점차 현대식 양장으로 변경, 오늘날 편의성을 고려한 집배복으로 재정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