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문화 활동에 의하여 창조된 가치가 뛰어난 사물’이다. 그게 어떤 것이든, 유·무형의 가치가 뛰어난 것은 오랜 시간 전해지며 우리의 역사가 되었고 삶이 되었다. 찬란한 빛을 발하였던 순간의 역사도 있고 가슴 아픈 시련의 역사도 있다. 어떤 순간의 역사이든 그것은 분명한 우리의 역사이고 삶이기에 그곳에서 창조된 문화재는 오래도록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그래서 다음 세대에 온전히 넘겨주어야 하는 소중한 것이다. 우정(郵政)역사의 가치 있는 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 우체국을 찾았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이어주는 문화재 우체국,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우정역사의 찬란히 빛나는 길이 될 터이다.
송청금 진해우체국장
사적 제291호
진해우체국
뉴욕, 상해, 홍콩 등 외국의 대도시들은 대부분 바다를 끼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서울뿐 아니라 경주, 전주 등 오래된 도시 대부분이 강을 끼고 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성장한 도시는 외국의 대도시처럼 바다를 끼고 형성되었다. 전래의 주요 도시는 대부분 조선시대 전에 만들어졌고, 도시 입지는 국제교역이나 관계보다는 자국 내 지리적 관계 속에서 정해졌다. 개항이후 서구와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항구가 발달했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에는 조선의 산물과 일본 공산품이 드나드는 바다를 낀 도시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른바 근대 이후 항구도시의 성장은 식민지 현실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대표적인 도시가 인천이나 군산이다. 그러나 진해는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면서도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유는 군사목적으로 도시가 계획되었기 때문. 일제 강점기 병영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먼저 입지했고, 시가지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이유로 진해는 천혜의 요새가 되었다. 6·25전쟁 때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비교적 해방 전 모습이 온전하게 유지되었고, 시가지와 사령부 내에는 일제 강점기 건축물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진해의 구 일본해군사령부 건물을 비롯하여 진해역사, 구 일본은행 진해지점, 진해우체국 등 일제 강점기 건축물 중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건물들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일제가 한반도에 최초로 만든 계획도시 진해는 도시의 영역과 거리망이 중심에서 햇살처럼 사방으로 뻗어 이루어진 방사형 도시(放射形 都市)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진해구의 중심인 중원로터리. 8개의 도로가 합쳐져 로터리를 이루고 있으며, 로터리를 마주한 8곳의 모서리마다 세계 각국의 특색을 지닌 건축물들이 세워졌었다. 현재에는 거의 사라지고 사적 제291호로 지정된 진해우체국만이 러시아 풍의 건물을 온전한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진해우체국은 군항도시의 중심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내고 있다. 진해우체국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통신동 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진해우체국 건물은 1912년 10월 25일에 준공한 뒤 그해 11월 15일에 진해우편국이 이전하여 청사로 사용해왔다. 당시 우체국이 들어서 ‘통신동’이라는 지명이 되었다고. 진해우체국은 Y자 형태의 3방향 도로 중앙에 조성된 삼각형의 대지(631평)에 건평 136.7평으로 지은 단층 목조건물이다. 평면은 삼각형 대지의 꼭짓점에 해당되는 중원광장 쪽, 즉 양도로가 만나는 지점을 출입구로 하고 있어 입구는 좁으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점차 넓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붕은 동판으로 덮고 사방에 동재로 난간을 둘렀으며, 자연광의 일조량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도록 반원형 채광창을 설치하였다.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생산할 무기재료가 부족하자 이 지붕의 동판과 난간을 모두 징발하고 아연으로 대체했었다. 본래 동판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1984년. 이후 유지보수를 위해 원래 목재 마루틀 위에 깔렸던 노후화된 널마루를 들어내고 시멘트로 재마감하였다. 건물 양식은 러시아 풍의 절충식 근대 건축인데, 정면 입구 양측으로 세운 강한 배흘림이 있는 투스칸 오더(Tuscan order)의 두리기둥으로 당당한 외관을 보이고 있다. 당시의 업무는 우편환저금, 전기통신 업무가 주된 것이었다. 진해우체국이 사적으로 지정된 때가 1981년 9월 25일, 영업동청사를 증축해 1999년 이전하기까지 군항도시의 중심기관으로서 역할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저희가 문화재청사에서 영업동 신청사로 이전한 때가 1999년입니다. 문화재 훼손의 우려도 있고 지역주민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증축이 되긴 했어도 오랜 동안 진해의 핵심기관으로, 시민들에게 추억의 장소로 진해우체국은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송청금 진해우체국장의 자부심과 자긍심이 느껴진다. 사적으로 지정된 이상 진해우체국 임의대로 건물을 도용, 변경할 수 없는바, 진해우체국은 ‘문화재청사 관리지침’을 자체 제정하여 문화재청과 연계하여 문화재청사 유지보수에 온갖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증축한 지 100년 가까이 되고 목조건물이다 보니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많이 낡았습니다. 지속적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진해우체국 정원화 팀장의 말이다. 해서 4월 벚꽃축제 기간에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한시적으로 지역주민들에게 개방, ‘나만의 우표전’ ‘일일찻집’ 등 진해 시민을 위한 이벤트를 문화재청사에서 개최하기도 한다고. 새롭게 지은 영업동청사도 문화재청사와 어우러지게 문화재영양평가기준에 맞춰 증축, 과거와 현재가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문화재청사의 유지보수를 위해 기존 노후화 된 널마루를 걷어내고 시멘트로 재마감하였다.
새롭게 지은 영업동청사도 문화재청사와 어우러지게 문화재영양평가기준에 맞춰 증축, 과거와 현재가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었다.
(좌)러시아풍의 절충식 근대양식으로 지어진 진해우체국
(우)현재 사용 중인 영업동청사는 문화재영양평가기준에 맞춰 지어졌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진해우체국
송청금 진해우체국장의 경영마인드는 ‘시민과 함께하는 고객가치 창조경영’이다. 해서 도입한 제도가 ‘고객이 주인이 되는·즐거운·당당한·변혁하는·공감하는 CS(Customer Satisfaction)’다. “진해는 군항과 벚꽃의 도시로 잘 알려졌습니다. 관광객이 그 어느 도시보다도 많은 곳입니다. 철저한 고객중심 사고만이 지역주민은 물론 외지에서 찾아주시는 많은 고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단기적 성과가 아닌 지속가능한 성장을 늘 염두에 두고 우편, 금융 대고객 서비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고객감동 서비스를 위한 송 국장의 이러한 경영마인드는 지역주민과 공감하고 또 내부 구성원 간 수직, 수평으로 소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가 되어 매년 괄목할만한 성과창출을 하고 있다. 해군과 함께하는 따뜻한 우체국, 고령화시대 노인들을 위한 창구환경 개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 등이 진해우체국의 고객가치 창조경영의 밑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체국에 얽힌 사연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특히 진해 시민은 이곳 문화재청사 우체국과 인연이 깊은 분들이 많습니다. 되도록 자주 개방해서 추억의 장소를 보여 드리고 싶지만, 문화재라는 특성상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앞으로 진해우체국은 문화재청사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시민에게 개방하고 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여 우리의 오랜 문화재를 함께 나누고 지켜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송청금 진해우체국장은 ‘시민과 함께하는 고객가치 창조경영’의 최종 목표는 고객의 행복이라고 했다. 그 옛날 첫사랑의 편지를 전해 받고 행복했던 것처럼, 외지 나간 자식들의 무사 소식을 전해 들으며 행복해 했던 것처럼 진해우체국은 그런 행복을 시민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100년의 역사를 지닌 진해우체국이다. 태생초기, 일제의 압박도 있었지만, 이제는 당당한 대한민국 최고의 역사를 지닌 우체국이 되었다. 앞으로의 100년은 더 찬란하고 더 위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