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절단,
미국 파견
보빙사절단 일행(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홍영식 그 옆이 민영익)
1883년 7월 고종은 보빙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했다.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인 1883년 5월 미국은 우리나라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초대 공사로 푸트를 파견했다. 고종은 이에 대한 답례로 전권대신 민영익, 부대신 홍영식, 서기관 서광범 등 8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미국으로 보냈는데, 이들을 보빙사(報聘使)라 불렀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방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보빙사 일행은 7월 16일 인천을 출발하여 일본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거쳐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거기서 시카고와 워싱턴을 거쳐 뉴욕에 이르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한복을 입고 갓을 쓴 모습으로 미국의 주요 도시를 돌며 백악관, 국무성, 육군성, 철도회사 등 주요 공공기관을 두루 방문했다. 우체국, 전신국도 구경했다. 은행, 신문사, 방직공장, 시범농장 등도 돌아보았다. 보스턴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도 구경했다. 그들은 눈부시게 발달한 미국의 과학기술 문명만 구경한 게 아니었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나뉘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국민이 직접 뽑는 미국의 민주주의도 공부했다. 9월 18일 뉴욕에서 아서 대통령을 알현하고 고종의 국서를 전달했다. 그때 사절단이 아서 대통령 앞에 납작 엎드려 큰절을 함으로써 상대방을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다. 사절단의 눈에 비친 미국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가로수가 가지런히 서 있는 넓은 거리, 높고 깨끗한 주택, 8층짜리 높은 호텔, 거리를 오가는 전차, 대낮같이 밝은 전깃불.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게 없었다. 그들이 그처럼 별천지와 같은 미국의 풍물을 보고 감탄하는 동안, 미국 언론은 은둔국 외교사절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조선이 왕자와 총리의 아들을 파견한데 대해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영의정의 아들인 홍영식을 총리의 아들이라 함은 이상할 게 없으나, 왕의 처조카인 민영익이 왕자로 둔갑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민영익이 그만큼 실세였음은 분명했다. 미국 시찰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미국에서 얻은 새로운 문물의 샘플을 200여 개 궤짝에 싣고 왔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단순히 서양의 발달한 과학기술 산물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개화하여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벅찬 포부도 안고 돌아왔다. 미국에서 귀국할 때 사절단은 두 패로 나뉘었다. 부사인 홍영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을 거쳐 바로 귀국했고, 정사인 민영익은 대서양을 횡단하여 유럽 여러 나라를 구경한 뒤 이듬해 5월 말에 귀국했다. 민영익이 귀국할 때 아서 대통령은 귀국하는 한국 사절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미국 해군은 해군 소속의 트렌트호를 내주어 그들을 조선까지 호송케 했다.
홍영식과 민영익,
서로 다른 노선을 걷다
귀국할 때 두 패로 갈렸듯 민영익과 홍영식은 귀국하자 서로 다른 정치 노선을 추구했다. 부사인 홍영식은 개화의 의지를 한층 북돋으며 개혁정치를 추구한 반면, 정사인 민영익은 홍영식과 다른 노선을 걸었다. 개화파 인물로 알려져 있던 민영익이 1년 가까이 개화된 세상을 보고 나서 귀국하자마자 다른 노선을 걸었던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그의 행적 등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첫째는 별천지처럼 보이는 서구 문물을 따라갈 수 없다는 절망감을 꼽을 수 있다. 너무나도 눈부시게 발달한 서구 문물을 보면서 반드시 따라잡겠다는 도전 의지를 불태우기에 앞서 좌절감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귀국 직후 주한미국공사 푸트에게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로 나갔다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고 한 말에서 그의 좌절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보다 설득력 있는 이유로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이기심을 들 수 있다. 조선은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나라가 될 수 없다는 생각, 아니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와 민씨 일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개혁 의지에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나라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보며 그가 누리고 있는 특권이 언제 박탈당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몸서리를 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그의 변신은 이미 그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같은 개화파로 평소 친한 사이였던 민영익과 홍영식이 뚜렷한 이유 없이 둘로 나뉘어 귀국한 것부터 이상했다.
조국의 개화라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를 놓고 둘 사이에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을 수도 있었다.
민영익이 개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음은 귀국길에서도 나타났다.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긴 항해에서 그는 시찰의 성과에 흥분하기는커녕 조용히 앉아 유교 경전을 읽고 있었다. 민태원이 쓴 ‘김옥균 전기’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기술했다. “홍영식은 원래 민영익과 교계가 긴밀하여 같이 구미 만유(漫遊)의 길을 떠났으나, 워싱턴 체류 중에 민과 정견의 충돌을 보게 되었다. 민은 사대주의를 고집한데 반해 홍은 독립을 역설한 결과, 마침내 단호히 손을 뿌리치고 동서로 나뉘어 민은 유럽 만유의 길을 떠나고 홍은 태평양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보빙사로 미국을 시찰하는 동안 의견이 갈렸다는 말이었다. 미국의 휘황찬란한 문물을 보면서도 민은 친청(親淸) 사대주의 노선을 고집한 반면, 홍은 배청(排淸) 자주독립 노선을 주장한 결과 동서로 갈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