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호에 이어
셋째는 미국에 의존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감각에서 내린 판단일 수도 있었다. 당시 미국을 바라보는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에는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있었다. 수구파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화이(華夷)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미국을 금수의 나라로 여겼다. 개화파는 정반대였다. 미국은 영토적인 야심이 없는 부유한 나라, 신의를 중시하며 외국과 체결한 조약을 엄수하는 문명국, 인권과 자유를 중시하는 이상적인 나라 등으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그처럼 미국을 보는 시각이 달랐기에 미국에 거는 기대 또한 상반될 수밖에 없었다.고종은 짝사랑이라 할 만큼 미국에 기대려 했다. 속국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씌워 계속 목덜미를 움켜쥐려는 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지지와 협조가 절실하기에 미국과 손잡고 싶어 했다. 서구 열강 중 맨 처음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보빙사절단을 파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민영익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미국은 달랐다. 미국은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해 견줄 만한 나라가 없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조선이 전적으로 기대기에는 미국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구나 미국은 침략의 역사가 없는 나라였다. 비록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었으나, 유사시에 미국이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도울 수 있을지 극히 의심스러웠다. 그처럼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먼 나라보다 바로 이웃에 붙어 있는 청나라에 기대 현상 유지를 하는 편이 보다 현실적인 선택이라 판단할 수도 있었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우정총국 청사
우정총국 설치
민영익이 어떤 노선을 걷든 홍영식은 제 갈 길을 갔다. 미국을 다녀온 뒤, 눈이 부신듯한 광명 속에 갔다 온 것 같다고 토로할 만큼 받은 충격이 컸기에 고종을 열심히 설득해 개화의 길로 치달았다. 그가 개화정치의 산물로 내놓은 첫 작품이 우편사업의 시작이었다. 우체국을 세워 우편이라는 새로운 통신 방식을 실시함으로써 개화의 첫 테이프를 끊고자 했다. 홍영식, 서광범 등 미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개화파 인사들이 미국에서 보고 배웠던 문물이나 제도 가운데 시급히 도입해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로써는 신기한 기술인 전기나 전차, 전신 등은 물론 방직기계나 농장 등도 우리가 마땅히 들여와야 할 문물이었다. 학교나 우체국 등도 우리가 시급히 본받아야 할 제도였다. 그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도입해야 한다고 단정하기 어려웠으나, 홍영식은 나름대로 그 순서를 정했다. 160일 간의 장기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홍영식은 고종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신 등이 그곳에 도착한 이래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가 달라 눈과 귀로 보고 들어 파악할 수는 있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기(機器)의 제조나 배, 차, 우편, 전신 등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급선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가장 중시할 것은 교육인데, 만약 미국의 교육 방식을 본받아 인재를 양성한다면, 모든 면에서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본받아야 할 법이라 사료됩니다.”
그처럼 홍영식은 먼저 도입해야 할 문물이나 제도로 기계와 교통, 통신, 교육제도를 들었다. 그 중에서도 교육제도를 첫손가락으로 꼽았다. 그러나 맨 먼저 실천에 옮긴 것은 뜻밖에도 우편이었다. 홍영식이 어떻게 고종을 설득하여 우편사업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김영희가 쓴 ‘좌옹 윤치호 선생 약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홍영식과 서광범, 변수는 이 중대 사절의 기회를 또다시 못 만날 것처럼 열심히 시찰하고 연구했으며, 조선은 언제 그렇게 되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것이냐며 애를 태웠다. 더욱이 홍영식은 우편의 기민한 제도에 놀라 적은 규모에서나마 조선에서 이것을 실현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이 이번에 얻은 큰 결실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홍영식은 역전법(驛傳法)을 폐지하고 우정국을 신설하자고 열렬히 주장했다.” 뒷날 외무대신을 지낸 바 있는 김윤식은 그의 일기에서 “홍영식은 우편국을 설치할 것을 처음으로 제기하여 스스로 총판이 되었다.”고 기술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홍영식이 고종에게 우편제도를 실시하자고 열심히 주장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아무튼 1884년 4월 22일 고종은 우정총국(郵征總局)을 설치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병조참판 홍영식을 총판으로 임명했다. 그때부터 우정총국 설립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 정부는 한성순보에 고종의 전교를 게재하여 우정총국의 설치를 널리 알리는 한편, 외국 공사관에 그 사실을 통보했다. 이어 일본 및 홍콩우정청과 우편물교환약정을 체결하고, 그들의 중개로 외국 우편을 개시하며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우정총국 개설에 필요한 인원을 확보하는 작업도 착착 진행되었다. 먼저 홍콩우체국 부국장이던 허치슨과 일본인 오비(小尾輔明), 미야자키(宮崎言成) 등 외국인 고문을 고용하고, 이상재, 남궁억, 신낙균, 성익영 등을 사사로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케 했다. 우정총국직제장정, 사무장정, 우편규칙 등 기본적인 법령도 제정했다. 조선에서 불법으로 운영되고 있는 일본 우편국을 접수할 계획도 세웠다. 우정총국 청사를 마련하고 5종의 문위우표를 발행했다. 그리하여 1884년 11월 18일, 서울과 인천 간에 우편업무를 개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