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우체국의
설립배경
6·25전쟁 당시에는 국제우편만을 전담하는 우체국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서울중앙우체국, 부산우체국, 인천우체국 등 3개 우체국에 국제우편과를 두고 그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외국에서 들어오고 외국으로 내보내는 우편물과 소포를 취급하는 국제우편은 6·25전쟁이 터지고 UN군이 참전하면서 급격히 증가했다. 동시에 몇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기도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밀수였다. 전쟁으로 물자가 귀한 틈을 타 일부 상인이 국제우편을 이용해 양단이나 책 등을 밀수해 폭리를 취했다. 우편물 속에 들어 있는 돈을 감쪽같이 빼내 가기도 했다. 그와 같은 현상이 되풀이되면서 국제우편이 밀수의 온상으로 매도되며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6·25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해 있어 우리 사회가 몹시 어수선한 시절의 이야기였다. 물론 그처럼 부조리한 현상을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었다. 국제우편의 사고를 방지하고 국제우편업무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체신부는 특단의 대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사원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그들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지만, 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기구를 통합하여 일괄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었다. 3개 우체국에 흩어져 있는 국제우편업무를 하나로 통합하여 전담 기관에 맡김으로써 책임감을 가지고 운영케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놓은 아이디어가 국제우체국의 설립이었다.
서울중앙우체국
국제우편업무를
3개 우체국
국제우편과에서 담당하다
일본강점기에는 국제우편업무를 취급하는 우체국이 없었다.
오로지 경성중앙우편국(지금의 서울중앙우체국)에서만 취급했는데, 그 업무만을 전담하는 기구를 따로 두지 않고 통신과 우무계에서 국내우편과 같이 취급했다. 그마저도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1942년부터 취급을 중단했다. 8·15광복을 맞이하면서도 국제우편에 관한 독자적인 기구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외국과의 우편물 교환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또 일제는 정책적으로 국제우편업무에는 한국인을 참여시키지 않았으므로 해방이 되었다 해서 바로 그 업무를 취급할 수도 없었다.
그처럼 사실상 정지 상태에 놓여 있는 국제우편을 다시 취급하게 된 것은 주한미군 때문이었다. 8·15광복과 함께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이 우리나라 우체국에서 본국으로 보내는 우편물이 늘어나자,
미 군정청이 포고령을 내려 임시적으로 취급하게 했던 것이다. 그 뒤 국제우편업무를 본격적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1946년 7월 미국과 보통통상우편물에 관한 교환 협정을 체결하면서부터였다. 그 협정에 의해 미국과 우편물 교환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서울중앙우체국을 집중국으로 정하고 서장, 엽서, 인쇄물 등을 취급했다.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필리핀, 12월에는 자유중국과 우편물을 교환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그 범위를 대폭 넓혀 세계 여러 나라와 보통통상우편물의 교환 협정을 체결했다. 접수 우편물 중 일본행은 부산우체국에서, 그 밖의 나라는 서울중앙우체국에서 발송했다. 미군정 초기에는 국제우편에 관한 업무를 통신과 우무계에서 관장했다. 1946년 5월 체신국이 체신부로 승격함에 따라 우무국 업무과에 외국우편계가 신설되어 국제우편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1947년 2월에는 날로 증가하는 국제우편업무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우편계를 국제우편과로 확대 개편했다. 그 뒤 1950년 1월에는 현업기관인 서울중앙우체국과 부산우체국, 인천우체국에도 각각 국제우편과를 설치했는데, 국제우편의 실질적인 교환 업무는 그들 세 우체국 국제우편과에서 이루어졌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UN군이 참전하면서 국제우편의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었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1950년 11월 국제우편업무가 부분적으로 재개되었다. 그 뒤 1·4후퇴로 정지된 국제우편이 1951년 10월 재개되었다. 그때부터 국제우편물의 운송은 대한해운공사가 맡게 되었다.
국제우편물의 해외 운송은 선편 운송과 항공 운송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먼저 선편 운송을 살펴보면, 미군정 시절 미국과 통상우편물을 교환할 때는 우편물의 운송을 미 군정청 소속의 선박을 이용했다. 정부가 수립되고 6·25전쟁을 겪는 동안 우리나라 해운업이 자못 활기를 띠면서 우리나라 선박을 이용해 국제우편물을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10월부터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선박으로 일본까지 운송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외국으로 나가는 우편물은 일본을 중계로 운송했다. 1957년 2월 대만 회사와 운송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홍콩과 대만행 우편물은 동 회사의 선박으로 운송했다. 선편우편물을 싣고 내리는 것은 부산우체국과 인천우체국에서 담당했다.
항공 운송의 경우, 1947년 8월부터 미국의 노스웨스턴항공사 소속의 항공기로 한·미간의 우편물을 운송했다. 일본과의 우편물 운송도 이 선로를 이용했다.
1948년 10월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회사인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됨에 따라 1950년 8월부터 동 회사가 서울과 홍콩 간의 우편물 운송을 맡게 되었다. 1955년 10월에는 대만 항공회사 소속의 항공기가 서울과 타이베이 간의 우편물을 운송했고, 1957년부터는 홍콩 회사가 서울과 홍콩 간의 운송을 담당했다. 그처럼 국제우편이 확장되고 있을 무렵, 한국이 1949년 12월 17일자로 소급하여 UPU 회원국 자격을 회복했다는 통고를 받았다. 1952년 1월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한국은 적극적으로 UPU 회원국들과 우편물 교환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이에 따라 국제우편물 이용량은 매년 증가했다.
(좌)서울국제우체국 (우)국제친선우체부
국제우체국
설치를 놓고
찬반양론이
맞서다
국제우체국을 설치해야 한다고 맨 처음 주장하고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우정국장 최재호였다. 그의 주장에 따라 국제우체국 신설안이 체신부 국장회의에서 논의되었다. 그가 서울국제우체국 설치의 필요성을 개진하자, 우체국 업무와는 거리가 먼 전무국장 윤태은이 먼저 반대했다.
“국제우편은 현재 서울중앙우체국 등 3개 우체국 국제우편과에서 잘하고 있는데, 구태여 국제우체국을 따로 세울 필요가 있습니까?” “말씀을 잘하셨는데, 그런 논리라면 국제전신전화국도 없애야죠. 국제전신전화 업무도 중앙전신국과 중앙전화국에서 취급할 수 있으니, 국제전신전화국을 따로 둘 필요가 없잖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최재호의 반격에 윤태은은 입을 다물었다.
“제가 우정국장 시절에 겪어 보니까, 국제우편물을 실은 선박이 부산에 입항할 때는 통관사무 지연으로 배달에 지장이 많았어요. 그런데 국제우체국을 서울에 세우게 되면, 부산으로 들어오는 우편물을 서울까지 가져와서 다시 지방으로 보내게 되는데, 그리되면 그만큼 배달이 지연될 것 아닙니까?” 경리국장 김봉렬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전임 우정국장으로서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국제우편 사고를 근절하라는 지시까지 받은 바 있어 누구보다 먼저 개선안에 찬성하리라 믿었는데, 빗나갔던 것이다.
“배달이 지연되더라도 주로 부산 등 경상도 지방에 배달되는 우편물에 국한될 것이고, 다른 지방으로 가는 우편물에는 아무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국제우편은 신속히 배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 실정에서는 사고 없이 정확히 배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뿐 아니라, 앞으로 부산으로 들어오는 선박이 많아 국제우편물이 격증할 때는 부산에 분국이나 출장소를 설치하면 됩니다.” 최재호가 지지 않고 맞섰다.
그러자 총무과장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책임 소재를 명백히 밝하고 업무 감독을 집중적으로 할 수 있어 서울국제우체국을 설치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금년에는 예산이나 정원 문제로 곤란할 것 같습니다. 금년에는 보류하고 내년으로 연기함이 어떻겠습니까?” “예산은 따로 필요 없고, 인원은 현재의 국제우편요원으로 충당하면 됩니다. 다만 국장이나 수위, 노무원 등 독립관서로서 필요한 인원은 증원해야 하는데, 그 정도는 현재의 체신부 정원으로도 가능합니다.” 논란을 이어가다 보니 찬성하는 간부가 없어 변명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최재호는 기죽지 않았다. 결정권자는 장관과 차관이기에 그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경리국장이 내세운 반대 논리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몇 마디 덧붙였다.
“현재로서는 부산우체국에서 통관이 끝난 우편물 중 부산시내 배달분은 부산우체국에서 직접 배달하고, 타지방으로 가는 우편물은 각 지방의 우체국을 통해 배달됩니다. 따라서 수취인이 서울 거주자인 경우, 부산에서 통관이 끝난 우편물은 철도편에 의해 서울중앙우체국으로 보내지고,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수취인에게 배달하게 됩니다. 만일 이를 부산에서 하지 않고 서울에서 통관하기로 한다면, 선박에서 내려진 우편물은 그대로 서울로 직송되어 통관에 회부되고, 통관이 끝나면 서울지역분은 서울중앙우체국에서 배달하고, 기타 지방분은 주소지로 보내져 관할 우체국에서 배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수취인이 부산지방 거주자라면 부산에서 통관할 때보다 지연되기 때문에 경리국장의 반대 이유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경상도의 일부 지방을 제하고는 별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인천, 수원 지방은 반대로 빨라지므로 실제로는 이용자가 가장 많은 서울 지역이 그만큼 혜택을 입게 되는 것이죠. 또한 국제우편 분야의 당면 과제는 업무를 쇄신 강화하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여 원활한 운영을 기함으로써 국가의 위신과 명예를 높이는 것이기에 서울국제우체국을 설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최재호의 주장에 대해 더 이상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관 이광과 차관 김의창 역시 “대통령께서도 국제우편 사고의 근절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계시니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며 국제우체국을 설치해야 한다는 쪽에 손을 들어 주었다.
서울시내 배달을
국제우체국에서
직접 담당하다
1955년 8월 1일 서울국제우체국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보험관리국 구내에 있는 서울중앙우체국 국제우편과 건물을 개축하여 국사로 사용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국제우편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서울중앙우체국, 부산우체국, 인천우체국 등 세 곳의 국제우편과는 모두 폐지되었다.서울국제우체국이 신설되면서 업무를 취급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외국으로 나가는 국제우편물은 당분간 서울국제우체국 창구에서만 접수하기로 했다. 우편함에의 투함은 물론 일반 우체국에서의 접수도 받지 않기로 했다. 국제우편 이용자에게 불편을 끼치는 일임이 분명했으나, 사고 방지와 책임 소재를 명백히 하기 위해 그 같은 조치를 취했다. 서울시내의 배달 업무도 당분간 국제우체국에서 전담하기로 했다. 외국에서 오는 우편물이 가장 많은 서울 시내를 14개 집배구로 나누어 그 해 11월부터 국제우체국에서 직접 배달했다. 배달 사고를 방지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기 위해 집배원을 별도로 확보하여 전원에게 자전거를 나누어 주어야 했는데, 별도의 증원을 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 덕분에 국제우편물의 소통이 한결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동시에 국제우편의 소중함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었다. 국제우편업무가 확장되면서 1956년 5월 서울중앙우체국 김포비행장분실이 폐지되고 여의도비행장에 국제우체국 여의도공항분실이 설치되었다. 당시의 여의도공항은 국내외 비행기의 왕래가 빈번한 한국의 대표적인 공항이었다. 국내외 저명인사의 왕래가 잦은 여의도공항에 국제우체국 분실을 설치하여 통상우편물의 접수와 우표류 판매 등의 업무를 개시함으로써 여행자들에게 우편 이용의 편의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 뒤 김포에 새로운 국제공항이 세워지고 여의도공항이 폐쇄됨에 따라 1957년 11월 서울국제우체국 여의도공항분실을 김포국제공항으로 이전하고 김포공항분실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서울국제우체국은 그렇게 독립관서로서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