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간의
우편물 교환이
성사되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듯,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과 소련군 대표가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1946년 1월 미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미ㆍ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열렸다. 미ㆍ소공동위원회란 1945년 12월에 개최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에 독립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기구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한국에 독립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그전 단계로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과정을 거치기로 했는데, 그와 같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예비회담을 개최했던 것이다. 예비회담에서는 남북 간의 현안인 자유로운 왕래 문제를 논의했다. 38선이라는 인위적인 직선을 경계로 삼지 말고 도계(道界)와 군계(郡界)를 경계로 삼자는 문제를 비롯하여 남북 간의 철도 재개, 전기 공급, 우편물 교환과 전화 통신 재개, 신문의 자유로운 배포, 남북 간의 자유로운 통행, 동일 화폐제도의 수립 등 남북 간에 숙제로 되어 있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미군과 소련군 대표는 그중에서 우편물 교환, 전기 공급, 자유로운 왕래 등 5개 항에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쌍방 간에 합의한 5개 사항도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이 거부함에 따라 성사되지 못하고 오직 우편물 교환만이 이루어졌다. 남북한 백성들의 자유로운 왕래나 철도 재개 등이 성사되지 못해 미ㆍ소공동위원회에 대한 기대가 컸던 국민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그나마 우편물 교환이 성사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우편물 교환 장소,
개성역에서
여현역으로
바뀌다
미군과 소련군 간의 협상의 유일한 산물인 남북 간의 우편물 교환은 1946년 3월 15일에 이루어졌다. 교환 장소는 개성역이었다. 38선 이남에 있는 개성은 당시 남한의 땅이었다. 미 군정청 체신국 소속의 미군 대위와 통신과 우무계 차석, 서울중앙우체국 직원 2명 등 4명이 북쪽으로 가는 우편물을 가지고 개성역으로 갔다. 북한에서도 같은 인원이 내려왔다. 남쪽에서 올라간 우편물은 제1종 및 제2종 우편물 30여만 통, 등기우편물 9347통, 행낭 157개 등이었고, 북쪽에서 내려온 우편물은 제1종 및 제2종 우편물 1만여 통, 등기우편물 230통, 행낭 4개 등이었다. 남행우편물에 비해 북행우편물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남한이 그만큼 자유롭고, 자유를 찾아 남하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교환 우편물의 종류는 편지와 우편엽서, 등기우편물에 국한했다. 소포는 취급하지 않았다. 교환 장소는 첫날의 개성역에서 둘째 날부터 개성우편국으로 바뀌었고, 이듬해 1월 11일부터 다시 북한 땅인 여현역으로 변경되었다. 교환 장소를 여현으로 옮긴 것은 북한 사람들이 38선 이남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북한 측이 장소 변경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교환 횟수도 처음에는 2주에 한 번이었으나, 우편물이 증가하자 6차 교환부터 1주일에 한 번으로 늘렸다. 그 뒤 주 2회로 교환 횟수를 늘리기도 했으나, 교환 장소가 여현으로 바뀌면서 다시 주 1회로 환원되었다. 교환 장소를 여현역으로 변경하면서 우편물 운송을 자동차에서 기차로 바꾸었다. 여현역은 경의선에 있는 작은 역으로 38선에서 북한 쪽으로 바짝 붙어 있었다. 우편물을 실은 기차가 38선에 다다르면 기적을 울려 도착했음을 알리고, 북한 측에서 들어오라는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북한으로 보내는 편지는 겉봉에 ‘38 이북’이라고 빨간 글씨로 표기하도록 했는데, 사전에 미군 정보기관의 검열을 거쳤다. 덕분에 ‘38우편물’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던 남북우편물 교환은 1946년 3월 15일에 시작하여 6ㆍ25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22일까지 계속되었다. 165차까지 이어진 38우편물의 이용 상황을 보면, 북행우편물이 192만여 통, 남행우편물이 96만여 통으로 북행우편물이 두 배나 많았다. 남한 인구가 많기도 했지만, 북한 동포들이 반동분자로 몰릴까 봐 이용을 꺼렸던 것이 더욱 중요한 이유였다. 1948년을 정점으로 갈수록 이용량이 줄었는데, 북한의 수신자가 반동분자로 몰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남한에서도 발신을 꺼렸기 때문이다.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위기를 맞다
38선이라는 인위적인 장벽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된 남북 간에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한 남북우편물 교환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최대 위기는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찾아왔다. 1948년 12월 UN 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함과 동시에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 군대를 철수하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소련군이 동시에 철수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미군과 소련군이 호송 업무를 맡고 있어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나, 그들이 철수하자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북한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 알 수 없어 체신부 간부들은 몹시 불안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국무회의를 마치고 온 체신부장관 윤석구가 간부들을 모아 놓고 남북우편물 교환을 계속할 것이냐의 여부는 주무 부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정말 실망스러운 결정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분단된 남북 간에 유일한 통로로 열려 있는 남북우편물 교환을 단순한 우편물 교환으로 치부해 체신부의 판단에 맡기려는 국무위원들의 자세는 비난받아 마땅했다.체신부장관은 곧 국장회의를 소집하고 그 문제를 논의했다. 남북우편물 교환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중단해야 한다는 측의 논리는 북한은 우편물 검열을 철저히 하기 때문에 이용자가 많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게 뻔하므로 미군의 호송이 없는 한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남북우편물 교환은 정치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통신의 본질에 입각하여 추진한 사업이고, 특히 국토가 양단된 상황에서 유일한 소통의 물꼬가 되고 있는 만큼 반드시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찬성파의 논리였다. 특히 우편사업의 총책인 우정국장 최재호가 그렇게 주장하자 체신부장관이 찬성파의 손을 들어 주었다. 최재호는 자신이 직접 교환 현장을 찾아가기로 하고, 그 해 12월 30일 실무자들을 거느리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차관 박용하 이하 간부들이 펄쩍 뛰며 말렸으나, 그는 흔들림 없이 교환 길에 올랐다.
북한 측 대표와 직원 3명이 여현역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소련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최재호는 북한 대표와 굳은 악수를 하였다. “종전대로 합시다.” “계속합시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양측 대표는 흥분된 표정으로 우편물 교환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한에서 올지 안 올지 몰라 염려했습니다. 이제 우리끼리 교환하게 되었으니 이 기회에 제3종과 제4종도 같이 교환하면 어떻겠습니까? 만일 찬동하시면 정식으로 공문을 내주세요.” 북한 대표는 똑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했음을 알리며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사실 우리도 반신반의하면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교환 우편물의 종류를 확대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니 나중에 논의합시다.”
북한 체신상이
남한 체신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다
남북우편물 교환은 그처럼 1946년 3월 15일에 시작해 1950년 6월 22일 제165차로 막을 내렸다. 남북우편물 교환이 끊어지면서 남북 간의 왕래 창구는 완전히 닫혔다. 그러던 중 1954년 12월 북한 체신상 박일우가 체신부장관 이광에게 느닷없는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남북우편물 교환을 재개하기 위해 예비회담을 하자는 것이었다. 1954년 12월 2일 평양에서 발송한 이 편지는 중국 광저우(廣州)와 홍콩을 거쳐 12월 11일 서울국제우체국에 도착했다. 엎드리면 코 닿을 데 있는 땅덩어리를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어 중국 대륙을 한바퀴 돌아오다 보니 열흘이나 걸렸던 것이다.
남북우편물 교환을 재개하기 위해 회담을 열자는 북한 체신상의 요청에 대한 체신부 간부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우정국장 최재호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6ㆍ25전쟁으로 남북으로 흩어진 채 행방을 알 수 없어 안타깝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이산가족에게 그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남북 간에 모든 교류 내지 대화의 길이 막혀 있는 상황이어서 우편물 교환을 통해서라도 소통의 길을 열고 싶었다. 이에 대해 체신부장관 이광은 난색을 표시했다. 우리 정부가 그들의 제안에 응해 그들과 협상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정권을 승인하는 것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우편물을 주고받자는 제의가 오갔으나, 남북 간의 우편물 교환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최재호는 북한 대표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교환 우편물의 종류를 제3종 우편물과 제4종 우편물로 확대하는 것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우리가 북한에 대해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은 그들의 정권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므로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