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사업의 뿌리[1]
우정총국의 개설
19세기 후반, 서양의 문물이던 우편과 전신 · 전화 중 맨 처음 들여온 것은 우편이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치에서 벗어나 혁신정치를 꿈꾸고 있던 고종은 1882년 12월 외교통상 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한 기구로 우정사(郵程司)를 설치하고 부책임자인 협판 자리에 홍영식을 앉혔다. 그렇다고 해서 우편사업이 바로 실시됐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것이 우편과 전보를 도입하려는 첫 시도였음은 분명하다.
조선이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것은 1882년이었다. 이듬해 인 1883년 6월 홍영식은 민영익 등과 함께 보빙사(報聘使)라는 이름의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 시찰의 길에 올랐다. 배로 인천항을 출발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 일대를 돌며 근대화의 과정을 치닫고 있는 미국의 새로운 문물을 구경했다. 뉴욕의 우체국과 전신 회사를 둘러보고 미국 우정성도 들렀다. 5개월여에 걸친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자, 고종이 미국에서 보고 느낀 게 뭐냐고 물었다. '말과 글이 통하지 않아 보는 것만으로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기기(機器)의 제조나 배 · 차 · 우체 · 전신 등은 나라의 급무(急務)가 아닐 수 없는데, 특히 미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인재를 양성함은 모름지기 본받아야 할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홍영식은 그렇게 대답했다.
개화에 목마른 고종은 1884년 3월 27일 우정총국(郵征總局)을 설립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홍영식을 책임자인 총판에 임명했다. 법령을 제정하고 직원을 채용하는 등 우정총국의 설립 작업은 차근 차근 진행되었다. 그해 10월 1일 서울에 우정총국을, 인천에 분국을 설치하고 우편 업무를 개시함으로써 신식 우편제도가 첫선을 보였다. 그 동안 홍영식이 고종을 끈덕지게 설득해 우정총국을 개설했음을 엿볼 수 있겠다. 뒷날 고종의 전교가 내려진 4월 22일(음력 3월 27일)을 「정보통신의 날」로 정했는데, 우정총국이 실제로 개국한 날로 바꿔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있음도 기억해 두자. 아무튼 우리나라 최초의 우편 전담 기구였던 우정총국은 오래 가지 못했다. 우정총국 창시자인 홍영식이 갑신정변의 주역이라는 게 문제였다. 김옥균 · 박영효 · 홍영식 등 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민영익 등 수구파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얼핏 성공한 것으로 보이던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났다.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무모한 정변을 일으켰던 개화파는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3일 만에 쫓겨났고, 홍영식은 청병에게 살해되었다. 우정총국은 그렇게 업무를 개시한 지 20일 만에 문을 닫았다. 우리나라의 신식 우편제도는 문을 열자마자 막을 내리는 비운을 맞았다.
한성전보총국의 설립
전신이 처음 들어온 것은 1년 뒤인 1885년이었다. 우편이 자주적으로 들어왔다면, 전신은 외세의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받아들여 졌다. 당시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특히 청나라와 일본 간의 패권 다툼이 심했다. 두 나라는 한반도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통신 방식인 전신을 먼저 설치하려 다퉜다. 중국이 선수를 쳐 차관을 제공해 주는 조건으로 인천에서 서울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전신선 가설 작업에 나섰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전신선이 먼저 가설되었다. 그 선로가 완성되자 중국은 한성전보총국이라는 전보회사를 설립해 직접 경영하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회사를 화전국(華電局)이 불렀다. 그러니까, 청나라가 그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그들의 자금과 기술로 설치하고 운영했다. 그러면서도 시설 자금을 차관이라는 명목으로 받아갔다.
아무튼 서울 · 의주를 잇는 전신선(西路電線)은 이듬해 완성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중국은 물론, 중국을 경유해 세계 각국과 전신에 의한 통신의 길을 열 수 있었다.
조선과 중국을 잇는 서로전선이 가설되자 초조해진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온갖 트집을 잡아 서로전선의 가설을 훼방 놓으려 했지만 실패로 끝나자, 조선 정부에 서울 · 부산 간을 잇는 전신 선을 가설해 달라고 요구했다. 해저 케이블을 통해 일본과 연결하려는 속셈이었다. 우리 정부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청나라가 가설 공사를 맡기로 하고 설치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1888년 서울에서 공주 · 전주와 거창 · 대구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장장 1500여리의 남로전선(南路電線)이 완성되었다.
1891년에는 서울에서 춘천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북로전선(北路 電線)이 개설되었다. 외국인 전문가의 자문을 받긴 했지만, 이 전신선은 순전히 우리 정부가 건설계획을 세우고 우리 기술과 자금으로 건설했다. 서울에서 함경도를 관통하는 전신선을 건설하고, 그것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전신선에 연결하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면서. 아무튼 한반도는 그렇게 전국적인 전신망을 통해 전보라는 새로운 통신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한성전보총국을 개국한 날짜가 1885년 8월 20일이었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9월 28일을 뒷날 우리나라 전기통신 발상일로 삼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