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고 위엄 있던 젊은 우체국장
두 인력거꾼은 벌써 30분 이상을 달리고 있었다. 목적지인 철도역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예 멈추지 않을 생각인 듯 계속 뛰기만 했다. 길모퉁이마다 회전을 했고, 머지않아 나는 그들이 발 가는 대로 뛰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을 세워놓고‘철로(T'chull-law)’로 가겠다는 것을 또 한 번 설명했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면서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내가 목적지를 반복해 말하자 그들은 두 번째 회의를 시작했는데, 점차 커지던 음성이 최고조로 높아져 나중에는 치고받을 기세였다.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20여 명이 나를 둘러쌌다. 이들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1분에 100단어 정도의 속도로 떠들어댔다. 이 시끌벅적한 난장판에 일본 경찰이 불쑥 나타났다. 우리 모두를 감옥에 처넣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이단의 나라에서 한국말이외의 말이 통할 리 없다. 경험으로 미뤄볼 때 어딘가엔 말이 통하는 데가 있을 것이며, 그곳이 바로 우체국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우체국’이란 말을 이해시킬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지갑에서 봉투 한장을 꺼내들고 주머니에 간직했던 사전을 펴‘우표’라는 단어를 찾다가 적절한 문구를 발견했다. “Oo-ppyaw han chang put-t'chorah.(우표 한 장 붙여라.)”잔뜩 긴장해 보고 있던 군중들이 폭소를 터뜨렸고, 비로소 이해가 된 인력거꾼들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우체국장은 아주 젊은 사람이었다. 예기치 못한 놀라움이 그의 얼굴에서 가실 줄 몰랐다. 흰 복장 위에 녹색의 얇은 비단으로 된, 공무시 착용하는 코트를 입고 있었으며, 팔목에는 따뜻해 보이는 토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서투른 프랑스어를 쓰며 나를 기꺼이 안내하려 했다.
서울로 가는 기차는 아직 공식적으로 개통되지 않았다. 선로점검이 완료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날, 한 시간 후에 최초의 민간 전용열차가 떠날 예정이라 했다.(註: 영등포와 부산 초량을 잇는 경부선이 개통된 것은 1905년 1월 1일이므로 그 날은 시험 운행 중이었던 듯싶다.) 서두른다면 출발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역은 시가지 뒤쪽에 있고, 차표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문제는 인력거꾼들이 얼마나 빨리 뛰어 주느냐였다. 도로 사정은 나빴고, 한국 인력거꾼들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돈을 좀 더 쥐어준다면 다리를 더 빨리 움직일지도 모른다.
우체국장이 인력거꾼들에게 간결하면서도 흥미롭게 요점을 설명했다. 그들은 각자에게 아침나절의 삯을 합쳐 60전씩 준다면 시간 내에 충분히 닿게 하겠다고 했다. 내가 동의하고 막 떠나려 하자 우체국장이 나를 막더니 여행 중 먹을 음식을 사가는게 좋을 거라 충고했다. 시간표에 의하면 서울까지 16시간 걸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30시간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도중에 음식을 살 수도 없으니 현명한 사람이라면 미리 불상사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체국장은 근처에 있는 일본 잡화점으로 안내했다. 거기서 큰 빵 한 덩어리, 고기 통조림 두통, 포크 하나, 검붉은 레몬수 두 병, 작은 소시지 하나를 샀다.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바구니에 담고 인력거에 올라 친절한 우체국장과 작별했다.
이별의 선물로 2엔짜리 은화 한 개를 꺼내 우체국장에게 쥐어 주었다. 그는 기뻐하며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하면서도 한시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의 월급이 12엔밖에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2엔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이방인의 한반도 기행
아손 그렙스트가 쓴 책 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스웨덴 신문사 기자였던 아손은 노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까지 왔다. 그러나 일본이 유럽인 기자의 한반도 취재를 허용하지 않자 무역상으로 가장해 부산으로 건너왔다. 1904년 12월 24일의 일이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이듬해 1월 말까지 한 달 남짓 머무르는 동안 한반도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베일에 싸여 있던 은둔의 나라 조선인의 생활상을 보고 느낀 대로 묘사했다.
100년 전에 쓴 이방인의 한반도 기행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세계 어디서나 여행자가 가장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관이 우체국이라는 점이다. 기자 아손은 인력거꾼에게 기차역으로 데려 달라는 말이 통하지 않자 통역을 제대로 해줄 수 있는 상대를 찾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맨 먼저 떠오른 대상이 우체국이었던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과도 대화가 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게 우체국이라는 사실, 이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당시의 우체국장이 서투르나마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우체국장이라면 누구나 영어 정도는 씨부렁거릴 줄 아는 20세기 후반이 아니다. 당시는 전 세계와 담을 쌓고 살려 했던 대원군의 쇄국정치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은둔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서울도 아닌 항구도시 부산에 근무하고 있던, 젊은 우체국장이 프랑스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우리는 그처럼 꿈같은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까? 당시의 우체국장은 프랑스어를 구사할 정도로 인텔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