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체신봉사상에 빛난 얼굴
문영선 씨 서울중앙우체국 집배장
1991년 9월호
1962년 우연한 계기로 체신업무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30년간 집배원을 천직으로 알고 한 우물만을 고집하며 살아온 모범공무원 문영선 씨. 희끗희끗한 머리, 주위를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따뜻한 눈을 가진 그가 집배 가방에 사랑을 담아 배달해 가는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다시 그려본다.
글 김혜영
당시 사회 초년생이었던 20대 여기자의 기억 속에 문영선 씨를 만나던 그날의 날씨는 무척이나 더웠었다. 입사해 맡은 첫 취재라 준비도 많이 하고 설렘 속에 그와의 만남을 가졌는데, 막상 던지는 질문마다 짤막한 답변만을 남기다, 끝내는 배달이 더 우선이라며 집배 가방을 메고 나가시는 게 아닌가. 어떻게든 기사를 써야 하는 입장인지라 무작정 그를 따라나섰고 문영선 씨는 집배 가방을, 기자는 카메라 가방을 메고 집배 구역인 쌍문동, 장충동 일대를 함께 돌았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땀을 줄줄 흘리며 여러 질문을 던졌지만 역시나 단답형. 작전을 바꾸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저녁이나 함께하시죠”라는 말을 건넸고 막걸리 한 잔을 나누고서야 이야기보따리를 푸셨다. 송달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이혼 직전의 부부를 화목한 가정으로 만들어준 얘기, 문패 달기, 자신이살아온 얘기 등. 기사화되어 책이 나오고 전화를 주셨다. 함께 살아온 자식들보다 자신의 인생을 너무나 잘정리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씀과 시집갈 때 사용하라며 수저 세트까지 선물하신 문영선 씨. 2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수저 세트를 보면 남을 위해 사랑을 베풀었던 선한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02. 9급 출신 첫 여성 사무관
조난희 씨 의정부우체국 업무과장
1995년 12월호
1995년 당시 정보통신부에서는 특채를 통한 5급 여성 공무원은 더러 있었지만, 9급 출신으로 승진시험을 거쳐 사무관이 된 경우는 처음이어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던 조난희 씨. 워낙 매스컴을 많이 타던 터라 맹렬 여성일 줄 알았지만 취재를 하며 마주한 그녀는 튀지 않고 평범했다. 오히려 그 평범함이 그녀를 그 자리에 오르게 했던 것 같다.
글 김혜영
의정부로 조난희 씨를 만나러 갈 당시, 막 한 돌을 지난 딸아이를 두고 있었던 본 기자는 직장과 가정생활을 병행해 나가는 것이 무척 힘들었는데 그녀를 만나고 나서 오히려 힘을 얻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이제 와 당시 기사의 첫 서두를 읽어보니 그때 기자의 심경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다.
새벽 5시. 고단한 몸을 추스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아직 남아 있는 따스한 이불의 온기. 잠이 덜 깬 눈꺼풀은 무겁게 가라앉기만 한다. 어느새 깨어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고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도와주고 난 뒤 서둘러 대문을 나선다. 거리는 벌써 출근길의 시민들로 혼잡하기만 하다. 문득 힘겹다는 생각이 든다.(이하 생략)
집안일과 직장 일에 더해 늦은 밤 독서실에서 공부까지 하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던 조난희 씨. 당시 대부분의 여성은 결혼과 가사 등으로 중도에 퇴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 역시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일을 놓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가족의 도움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를 망설이는 여자 후배들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위해 남모르는 인내와 고통을 이겨내며 노력했다. 그 결과 그녀는 내· 외적인 싸움에서 이긴 승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에야 여성 사무관이 많아졌지만 무엇이든 첫 시도가 어려운 만큼 자신이 택한 길, 그 길에 힘과 정열을 모두 바쳐 살겠다는 그녀. 가정과 일 속에서 만족한 웃음을 얻기 위해 아직 긴장을 늦출 수만은 없다고 얘기하던 그녀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03. 집배원과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빨간자전거》
김동화 화백
2003년 2월호
많은 사람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배달했던 《빨간 자전거》.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공감이 컸던 것은 물론 집배원을 소재로 한 만화였던 만큼 《디지털포스트》에서 놓치고 갈 수 없었다. 2003년 겨울 유난히도 추웠던 어느 날, 해당 작품을 집필한 김동화 화백을 만났다. 평소 만화를 무척 좋아했기에 다른 인터뷰보다 더 기대가 되던 김 화백과의 인터뷰는 그의 만화만큼이나 따뜻했던 추억으로,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글 김요한
70년대 만화를 보고 목숨을 잃었던 한 초등학생 사건 이후로 우리 사회에서 만화는 거의 40년 동안 부정적인 인식의 대상이었으며, 웹툰이나 학습만화로 활로가 트이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기성세대의 부정적인 인식과는 별개로 80~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나에게 만화는 당시의 몇 안 되는 오락 매체의 하나였으며, 상상과 꿈을 펼치는 최고의 도구였다.
초등학교 때 국내 최초의 만화잡지였던 《보물섬》을 즐겨 보았는데 그때 좋아했던 만화가 바로 《곤충소년》이었다. 곤충의 힘으로 영웅이 된 소년이 주인공인 요즘으로 말하면 ‘캡틴 아메리카’나 ‘앤트맨’과 같은 히어로물이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그 《곤충소년》의 작가였던 김동화 화백을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쉽게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2003년 1월에 서교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김동화 화백은 한눈에 봐도 서정적인 예술가의 아우라를 풍겼다. 초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김 화백의 《요정핑크》나 《곤충소년》은 세밀한 순정체 극화라서 작가가 분명 여자일 것이라고 친구들과 내기를 했다는 나의 말에 김 화백은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만화를 좋아했던 나에게 김 화백과의 인터뷰는 내내 즐거웠던 기억이다. 사촌 매형도 《열혈강호》라는 꽤 인기가 있는 무협 만화 스토리작가라서 사촌 매형의 만화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김동화 화백만큼이나 좋아했던 아내 한승원 화백 이야기까지, 두 시간이 넘게 좋아하는 만화가의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들을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될까. 물론 그 아우라에 눌려 무릎을 꿇고 인터뷰를 한 탓에나중에는 다리가 심하게 저려 걷기가 힘들 정도였지만.
당시 인터뷰의 주 소재였던 만화 《빨간 자전거》는 후에 웹툰의 전성기 도래와 함께 포털사이트 다음에도 연재되어 큰 인기를 얻었고, KBS TV를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드는 당시에 대한 아쉬움이 하나 있는데, 좋아하는 만화가를 만나러 가면서 사인 하나 못 받아 온 것이다.
04. 동아리탐방 자연과 어울릴 줄 아는 동아리, 영월우체국 수석회
1993년 8월호
20년 전 기자라는 이름으로 첫 단독 취재를 맡았던 월간 《체신》의 ‘동아리탐방’. 1993년 8월호의 주인공이 된 동아리는 영월우체국 수석회였다. 그들이 보여준 따뜻한 배려와 돌을 사랑하고 그 속의 숨은 자연의 모습들을 보며 풋내기 여성 기자가 느꼈던 그날의 기억과 감회를 돌이켜본다.
글 신현희
‘처음’이라는 단어에는 오래도록 기억되는 설렘이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직장이었던 월간 《체신》지 편집실. 밋밋하기만 한 내 이름 석 자 뒤에 ‘기자’라는 두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진 첫 명함이 너무나도 신기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쓰다듬던 기억이 난다.
1993년부터 약 1년간 《체신》지에 연재되었던 동아리 탐방은 내가 단독으로 취재를 맡아 진행했던 첫 시리즈 기사라 그 의미가 또한 남다르다. 전국의 체신청(지금의 지방우정청)과 우체국, 그리고 산하단체를 찾아 탁구, 꽃꽂이, 풍물패 등의 동아리들을 취재하면서 다양하고 활발한 직장 내 활동에 놀라기도 하고, 또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쪼개어 25시간, 26시간처럼 넉넉하고 값지게 사용하는 체신인들의 모습을 보며 도전을 받기도 했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각지에서 만났던 많은 동아리가 기억에 생생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을 꼽으라면 아마도 영월우체국 수석회가 제일 첫 번째일 것이다. 그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흔한 돌들이라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쉽지만, 그런 돌 하나하나에 숨겨져 있는 웅장한 산수의 형상도 찾아내고 익숙한 사람의 얼굴도 발견하는 탐석꾼들의 진지한 모습은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의 내게는 잠시 숨을 고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 번 보고 난 돌을 아무 데나 휙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돌이 놓였던 그 자리에 그대로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모습은 자연과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진정한 예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당시 수석회 회원들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남성분들이셨는데 땀범벅에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낑낑대며 메고 나타난 어설픈 모습의, 그것도 대학을 갓 졸업한 애송이 여자 기자라는 사실이 적잖이 당혹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 내내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먼 길 왔다며 따뜻한 마음으로 반겨주고 배려해주었던 영월우체국 수석회분들께, 조금 긴 시간이 지났지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05. 배달해 드립니다
프로배달러, 정을 배달하다
2009년 3월호
취재를 하다 보면 다양한 사람과 사연을 만난다. 때로는 슬픔에 목이 메어 인터뷰를 진행하기 힘든 상황과 마주하기도 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넘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인터뷰인지 상담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우체국과 사람들》(당시 《디지털포스트》)을 통해 만난 취재의 뒷이야기이다. 사람의 이야기다.
글 김성태
2009년 2월. 《디지털포스트》 담당자로 업무를 시작하고 2번째 책이었나 보다. ‘배달해 드립니다’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우체국 직원의 사연을 듣고 고객과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사연이 담긴 선물을 배달해 주는 칼럼이었다.
사연의 고객은 광화문우체국 최옥자 소포실장의 고객으로 관내 우체국장으로 근무할 때 인연이 되어 관심을 두고 챙기던 독거노인 박의범 할머니셨다. 최옥자 소포실장이 늘 우체국을 찾아오시던 할머니의 발길이 끊겨 걱정스레 할머니댁을 찾았을 때 집안에서 미끄러져 상처를 입고 움직이지 못하는 할머니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던 사연이 있었다.
취재의 미션은 할머님이 좋아하시는 갈비탕을 배달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할머님 댁이 장충체육관에서 성곽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만 나오는 좁은 골목길에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배달앱이 잘되어 있던 때도 아니어서 직접 포장을 해와야만 했고, 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도 한참을 걸어 올라야만 할머님댁이 나왔는데 그사이 갈비탕이 식기라도 하면 식사를 하실 할머님께 예의가 아니었기에 늦겨울 저녁 땀이 나도록 뛰었던 기억이 있다. 취재는 인터뷰이와 인터뷰가 끝나면 사진 촬영을 하고 1시간 남짓으로 마무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취재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밥상도 차려야 하고 준비해간 질문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매우 좁은 단칸방 부엌에서 포토그래퍼와 남자 둘이서 상을 차리는 것도 어색했고, 밥을 먹으며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도 그랬다. 할머님은 집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묵혔던 이야기보따리를 많이도 풀어내어 주셨다.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어야 했지만, 할머님 이야기를 멈추기엔 당신께 너무 소중한 시간 같아서 저녁도 늦게서야 먹고 늦은 시간까지 앉아 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기억이 있다. 그날 마침 집안 제사가 있던 나는 어르신들께 장손이 늦었다며 꾸중을 들었지만, 일을 떠나 사람을 만나고 마음을 쓰다듬는 우리 사보가 오랫동안 이어져 와 참 좋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 따뜻한 정. 바쁜 생활을 핑계로 잊고 살아왔는데, 이제 와 다시금 꺼내 보는 소중한 기억이다.
06. 정류장
다큐멘터리를 보다
2013년 4월호
현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되 영상에 담긴 사람의 내면 또한 담아내는 휴먼다큐멘터리. 《디지털포스트》을 통해 전국을 돌며 진행한 취재현장 또한 생생한 휴먼다큐의 한 장면과 같았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애잔함에 닿은 순간부터 꺼져 가는 생명의 불씨를 살려내던 위대한 순간까지 취재현장에서 마주한 희로애락의 순간은 여전히 지난 《디지털포스트》 속에 남겨 있다.
글 김성태
2013년 4월호 통권 651호. 그해 테마는 우체국이 국민과 함께해온 동반자인 것처럼, 서민의 생활 속에 더 가까이 다가가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정류장’이라는 칼럼은 서민이 아침저녁으로 이용하는 버스 정류장에 얽힌 삶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코너였는데, 4월호는 버스에서 음악과 메시지로 희망을 전하는 DJ 운전기사 고창석 씨의 정류장이었다.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는 버스운전사의 특성상 낮에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버스 운행을 시작하기 전에 인터뷰를 시작하고 버스 운전을 하는 장면과 디제잉을 하는 장면을 찍어야만 했기 때문에 꼭 버스에 함께 탑승해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신월동에 차고지가 있었던 6211번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은 새벽 5시, 차고지에 4시까지는 도착해야만 했다. 차고지에 주차하기도 쉽지 않고, 이른 시간이라 버스나 지하철도 없어 새벽같이 일어나 택시를 타고 차고지로 향했다. 짙은 어둠이 내린 차고지는 운행을 준비하는 기사들의 입김으로 활기가 넘쳤다. 버스회사 구내식당에서 아침까지 챙겨 먹고 6211번 첫차에 올랐다. 버스는 신월동을 출발해 왕십리를 돌아 다시 차고지로 돌아오는 노선이었다. 버스는 신월동에서 신길동-노량진-동부이촌동을 지나 약수동과 왕십리에 다다랐다. 첫차 승객은 생각보다 많고 다양했다. 노량진 학원을 가기 위해 방석을 들고 타는 재수생부터, 새벽일을 나가는 아저씨, 등교하는 학생들과 외국인까지 지나는 정류장마다 타는 승객도 달랐다. 차분하게 즐기는 사람들부터 신기한 듯 웃음을 멈추지 않는 학생들까지 버스 의 디제잉을 대하는 승객의 반응도 각기 달랐다.
5시에 출발한 차가 다시 차고지로 돌아왔을 때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버스를 기점부터 종점까지 타본 경험도 처음이었지만 하루를 시작하는 많은 사람의 모습을 버스 안에 앉아 만나 볼 수 있었던 것도 새롭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마치 ‘하루의 시작’이라는 휴먼다큐멘터리를 본 것만 같았다.
새벽부터 하루를 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오래가진 않았지만. 7년여간 《디지털포스트》를 맡아 취재하는 동안 많은 사람과 사연을 만났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느끼는 희로애락을 많이도 경험했다. 반성하고 자책하고 응원하고 공감한 수많은 시간은 사연 속 사람들의 이야기로 지난 《디지털포스트》 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 책으로 이어진 삶의 이야기는 위대한 생활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정사업의 역사와 함께한 건강한 소시민의 이야기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