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깬 13호 프리미어리거, 푸스카스상까지 받다
박지성이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면서 한국인 첫 번째 프리미어리거가 된 때가 2005년 여름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5년 여름, 손흥민이 독일 분데스리가를 발판 삼아 토트넘에 입단하며 13번째 프리미어리거가 됐다. 그 뒤로 지금껏 14호 한국인 프리미어리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만큼 진입 장벽이 높다는 방증이다. 성공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박지성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계가 있었다. 손흥민도 그럴 뻔했다.
큰 기대를 받고 토트넘에 입단한 2015-16시즌, 손흥민은 EPL 28경기에서 고작 4골을 넣었다. 각종 대회를 통틀어 40경기나 출전 기회를 받았으나 득점은 8골에 불과했다. 골을 넣어주길 원해 모셔온 공격수가 넣지를 못하자 그를 향하는 패스는 점점 줄었다. 공을 달라고 손을 번쩍번쩍 들어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랬던 손흥민이 5년 만에 확 달라졌다. 이젠 팀의 간판스타이자 잉글랜드 축구대표팀의 캡틴인 해리 케인도 공을 잡으면 손흥민을 찾을 정도다. ‘일부러 찾는다’는 표현은 과장됐을 수 있으나 적어도 자신보다 좋은 위치에 있는 손흥민을 발견하면 믿고 맡기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다른 선수들도 케인에게만 의존하지 않는다.
달라진 존재감과 함께 손흥민의 득점력도 일취월장했다. 과연 한국 축구선수의 퍼포먼스가 맞나 싶을 정도의 화려한 골들도 많이 나오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그에게 ‘푸스카스상’을 안긴 2019년 12월 번리전에서 나온 70M 질주 후 원더골이다. 당시 손흥민은 토트넘 진영부터 공을 잡아 총 71.4m를 전력으로 질주, 무려 6명을 제친 뒤 득점에 성공했다. 공을 달고도 워낙 빨라 쫓으려는 수비수들은 뒤로 휙휙 밀렸고 숨차게 달렸는데도 마무리는 차가웠다. 결국 그 득점으로 그해 나온 가장 아름다운 골에게 수여되는 푸스카스상을 받았다. 헝가리 축구사 최고 영웅이자 마법사로 통했던 페렌치 푸스카스의 이름을 따 2009년 제정된 상인데, 손흥민의 ‘70M 질주 원더골’은 보면서도 믿기지 않던 마법 같은 득점이었다.
국민에게 힘·용기 준 손흥민, 한국 대표 콘텐츠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월 11일 신년사를 발표하면서 “훌륭한 기량을 갖춘 우리 스포츠 선수와 지도자들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을 알리는 K-콘텐츠”라 말했다. 문 대통령이 주요 연설에서 스포츠와 관련해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지난해 손흥민, 류현진, 김광현, 고진영 선수를 비롯한 많은 체육인들이 우리 국민과 세계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했다”고 박수를 보냈다. 과거 관용적 어구 정도에 그쳤던 “도통 웃을 일이 없다”가 현실이 됐던 불행한 시간, 그래서 스포츠가 전하는 에너지와 스포츠 스타들의 활약상은 여느 때보다 소중한 위로였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손흥민이었다. 어르신들 표현대로 보기만 해도 흐뭇한 젊은이고 남의 자식이지만 우리 자식처럼 자랑스러운 손흥민이다. 소위 ‘팔이 안으로 굽어’ 호들갑스럽게 칭찬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지표들이 그를 ‘월드클래스’라 가리키고 있다. 전 세계에서 공 좀 찬다고 소문난 이들이 모조리 모여 있는 EPL에서 득점왕 경쟁까지 펼치고 있는 선수가 손흥민이다. 잉글랜드뿐 아니라 스페인과 이탈리아, 독일 등 소위 유럽 빅리그를 통틀어도 2020-21시즌 손흥민보다 많은 득점을 기록 중인 이는 손에 꼽는다. 기량이 점점 늘어 축구사를 통틀어 최고의 클럽으로 꼽히는 레알 마드리드(스페인)가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이적료는 1200억 원(추정)이나 된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만 해도 한국의 축구선수가 본토인 유럽리그에 발붙이려면 ‘죽어라 열심히 뛰고 팀을 위해 희생하는 유형이어야 가능성 있다’는 넋두리가 나왔다. 하지만 손흥민이 우리도 메인 무대에서 화려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입이 쩍 벌어지는 테크닉과 슈팅으로 근사한 골을 뽑아내는 외국 공격수들을 보며 “우린 왜 저런 선수가 없을까” 답답했던 축구 팬들도 체증이 확 뚫렸다. 이제는 다른 나라 축구 팬들이 한국의 축구 팬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우리도 세계적인 공격수가 있다. 손흥민이 곧 K-콘텐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