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갤러리 에두아르 마네
프랑스의 19세기 후반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급변하기 시작하였고, 미술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의 화가들은 살롱전을 통하여 화단에 등단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살롱전은 아카데미즘을 고수하고 있었고, 신진 천재 화가 들은 철저하게 이들로부터 외면당했다. 1963년 살롱전에 출품한 알렉산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아름다운 아기천사에게 여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이유로 낙선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각별히 아꼈던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낙선 작품들만을 모은 '낙선자 전'을 열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피리 부는 소년〉
1867~8년, 캔버스 유화, 147×114cm
인상파의 탄생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회화 발전상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풀밭 위의 식사〉(1863년 작, 214×270cm) 또한 이 '낙선자 전'을 통하여 발표됐는데, 당시 전통적 회화에 익숙한 관객들로부터 극심한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된다. 회화 전체의 역사를 볼 때 마네만큼 발표하는 작품마다 야유를 받지 않은 작가는 드물 것이다.
가릴 곳만을 겨우 가린 매춘부가 한껏 멋을 부린 두 사나이 사이에서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는 이 작품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 외에도 미술사적으로 장차 등장할 새로운 화풍의 서막이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일상의 한 정경에 나체를 들고 나온 것도 자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한 주제, 평면적 색채, 무시된 원근법 등은 당시의 전통적 소재와 기법에는 동떨어진 표현법이었다. 이런 파격은 이미 사실주의 작가 '쿠르베'를 좋아해 왔던 모네·르느와르·르동 등의 감탄을 모으며 마네 주변의 일군을 형성하게 되고, 이들이 후에 인상파 회화를 이끌어 가게 될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어쩌면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중적인 도덕성을 거친 붓 터치로 놀라게 하는 것이 이 일군의 예술가들의 사명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풀밭 위의 식사〉
1863년, 캔버스 유화, 214×270cm
새로운 미술과 정신의 탄생
프랑스 파리 출신의 마네에게는 발표하는 작품만큼의 아유와 함께 잘 알려진 거장들의 지지 또한 전폭적이었다. 마네처럼 그림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인물 자체도 그토록 매력을 끄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1832년 1월 23일, 마네는 파리의 프티 조귀스탱 가에서 오귀스트 마네와 운제느 데질레 폴니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법무성의 고급 관리였고, 어머니는 스웨덴 주재 프랑스 외교관의 딸이었다. 마네 가는 상당히 유복한 중산 계급에 속하였으며, 루이 필립의 7월 왕정 아래서 교양 있고 전형적인 부르주아 생활을 했다. 때마침 이 시기는 영국보다는 반세기 늦게 시작한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로 부르주아의 청춘시대에 해당되며, 시대 문화가 시민적인 성격을 뚜렷이 띠기 시작한 무렵이다. 미술사 적으로는 낭만주의의 꽃이 피고 사실주의가 싹이 트는 것을 함께 맞이한 1830년대의 일이다.
학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마네는 부친의 친구가 경영하는 룰랭학원에서 후일 미술장관이 된 동년배의 앙토냉 프루스트를 만나게 된다. 프루스트와 마네에게 미술선생의 역할을 맡았던 외삼촌 에드몽 에두아르 폴리에는 당시 루이 필립왕이 창설한 루브르 미술관의 「스페인 미술관」을 자주 찾았다. 이곳에서 그의 예술 형성에 지우기 어려운 흔적인 벨라스케스·그레코·고야·리베라 등 의 작품을 만나게 되는데, 이 강렬한 스페인 회화는 새로운 미술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불러주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시대적으로 고전주의 거장 드라크로와의 아프리카 인상을 바탕으로 한 화려하며 자유분방한 색채, 도미에의 시민 생활의 묘사, 그리고 자연에서의 명암과 채색법의 발견 등은 결국 마네로 하여금 새로운 미술의 탄생과 정신을 예고했으며, 이는 곧 인상주의 자들에게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