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인다. 동해처럼 코발트빛 푸른 바다가 아니라 연한 잿빛 바다이다. 코발트빛 동해 바다가 흥겨움이 있는 봄과 여름의 바다라면 왠지 서해 바다는 아쉬움과 애잔함이 있는 가을과 겨울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해 바다를 좋아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
나그네는 서해 바다가 좋다. 외포리가 좋다. 요란한 갈매기들의 날갯짓과 잿빛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갯벌이 있고, 좁은 해역에서도 부지런히 오가는 여객선, 적당히 화려한 그러면서도 특유의 비릿함을 잃지 않는 외포리의 상가들까지…. 외포리의 상권은 고즈넉하지도 흥청대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욱 좋다. 외포리는 마
치 고향의 누이와 닮았다.
외포리 바로 앞에는 길게 누운 섬이 있다. 강화도가 품고 있는 섬 속의 섬, 석모도다. 강화도가 엄마라면 석모도는 품 안의 자식 같은 섬이다. 아기자기한 볼거리와 배 타는 즐거움으로 석모도는 연중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그 중에서도 12월에 찾는 석모도는 특별함이 있다. 숨 가쁘게 돌아온 한 해를 조용히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벌겋게 떨어지는 해가 만들어 준다.
문득 여행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어떤 이는 여행이 채움의 과정이라고 한다. 삶의 활력을 얻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는 생산적인 과정으로 본다. 그러나 나그네는 여행이 비움이라고 생각한다. 헛됨과 과욕을 버리고 어지럽혀질 대로 어지럽혀진 마음을 비우는 비움의 과정이다. 우리네 삶도 결국 비움의 과정이 아닐까!
엄마 섬 강화도, 역사의 한 가운데 서다
석모도에 가려면 엄마 섬 강화도부터 거쳐야 한다. 강화도의 운명은 기구하다. 원래는 더 많은 자식을 지녔었다. 국토가 좁았던 까닭에 예로부터 나라에서는 부지런히 간척사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강화도의 땅 덩어리는 갈수록 커졌고 섬들은 하나 둘 육지 속에 묻혀버렸다. 그리곤 그런 자식들을 품고 큰 덕분에 우리나
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땅 덩어리의 변화만큼 강화도는 역사의 변화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개국 시원의 현장, 즉 단군신화 이야기가 전해지는 마니산 참성단부터 세계문화유산인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을 거쳐 몽고의 침략시 왕궁 역할을 했던 고려궁지, 치욕의 강화도조약 현장인 연무당 옛터까지 강화도는 한국사의 축소판이다.
저항의 정신이 살아있는 산재한 유적들은 오늘날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읍내 한복판을 감싸 안은 강화산성,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국방 유적지 진·보·돈대…. 초지진과 광성보, 갑곶돈대는 항상 학생들과 가족 단위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몽고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음을 보여준 고려궁지 역시 빼놓지 않고 들르는 코스다. 시간 없는 이들을 위하여 강화도의 유적과 유물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곳도 있다. 강화역사관이 그곳이다.
몽고군도 없어지고 근대사를 얼룩지게 만든 미국·프랑스·일본과도 관계 개선이 되었지만 강화도의 긴장은 여전하다. 북녘 땅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역사뿐이랴. 강화도는 생태의 섬이기도 하다. 섬 남단에 펼쳐진 끝없는 갯벌은 세계적인 자랑거리이다. 이곳엔 많은 저서생물이 서식하여 생태계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철새도래지로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여름엔 갯벌체험, 겨울엔 탐조여행이 가능하다. 그래서 은암자연사박물관이나 벅스투유 곤충농장까지 묶어서 한 번에 돌아보는 이들이 많다. 훌륭한 생태기행 코스가 된다.
역사와 생태의 섬 강화도. 그 역시 강화도의 모든 모습은 아니다. 강화도에서는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많다. 천연염색 체험, 도예 체험, 화문석 만들기 체험, 농촌 문화 체험….
강화도를 몸으로 보듬어 보는 프로그램은 알게 모르게 참 많다. 고인돌과 참성단에 묻혀 눈에잘안뜨일뿐이다.
강화도로 떠나는 송년여행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곳이 있다.
바로 적석사 낙조대이다.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 해를 조용히 마무리하기 위해선 낙조 조망이 필수인데, 강화도의 수많은 낙조 포인트 중에서 적석사 낙조는 단연 압권이다. 석모도를 붉게 물들이는 적석사 낙조는 마치 천상에서 지상세계를 굽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낙조대에는 작은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자비로운 미소로 강화 앞 바다를 살피고 계시니 격랑의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중생들도 걱
정할 게 없으리라. 모두가 관음보살의 품이 아닌가.
점점이 펼쳐진 석모도와 서해 앞바다의 섬들 사이로 떨어지는 황홀지경의 적석사 낙조를 한 번이라도 본 이들은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아쉬움 속에 한 해를 모두 보내고 답답함만 남은 시린가슴을벌겋게물들여놓기때문이다.‘ 뜨겁게살아라. 열정적으로 살아라. 새해는 벌겋게 살아보아라.’차츰차츰 바다 속에 묻혀 마침내 모습을 감춰버리고 만 태양의 메시지는 강렬하기만 하다.
사랑하기좋은섬, 석모도
외포리에서 약 1.5㎞. 과장을 좀 하자면 외포리의 여객선이 뒤만 돌리면 석모도에 닿을 거리다. 요즘 웬만한 섬들은 다 연륙교다 연도교다 하여 육지화 되어 가고 있는데, 이렇게 지척에 있으면서도 뱃길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게 용하면서도 다행스럽다.
“한 봉지 더 사자. 부족할 것 같아.”“다른 과자는 안 먹나? 다른 것도 사 보자.”선착장 앞 매점에 서너 명의 젊은 아가씨들이 기웃거리고 있다. 갈매기들의 최고 간식인 새우깡을 사는중이다. 서해 섬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갈매기들과의 만남은 빼 놓을 수 없는 추억거리이다.
석모도 여행의 으뜸 포인트는 역시 낙가산의 보문사이다. 낙가산이라는 이름부터가 특별하다. 인도에서 관음보살이 상주하던 곳이 바로「보타낙가산」이었다. 낙가산 중턱에는 눈썹바위라는 기암이 있는데 이곳에는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 이름하여「보문사 마애석불좌상」이다. 조성된 지 백년이 채 되지않는 짧은 내력을 지녔지만 높이 9.2m, 폭 3.3m로 신비감을 주기엔 충분하다. 거기에다 영험함은 이미 입소문이 났다. 불자들은 물론이고 관광객들도 좁은 틈을 비집고 올라와 연신 몸을 굽히며 복을 기원한다. 보문사가 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 성지로 손꼽히는 건 괜한 게 아니리라.
보문사에서 상리 방향으로 넘어가면 황토에 물들여진 폐교가 나온다. 천연염색 전문업체「황토 자연마당」이 운영하고 있는 체험장 겸 작업장이다. 이곳에서는 단체는 물론 개인 단위도 염색 체험이 가능하다. 물론 완성품에 대한 구입도 가능하다.
속옷류와 침구류, 소품 등이 통신판매망을 이용하여 인기리에 팔려나간다고 한다. 보문사 밑 보문 선착장 가는 길에도 명소가 있다. 최근에 문을 닫은 폐염전을 지나면 민머루 해수욕장이다. 모래와 진흙갯벌이 뒤섞여 동해 해수욕장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다소 실망스러울 만도 한데, 석모도에선 보문사 다음으로 인기 좋은 산책 코스이다. 연인들과 가족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다. 영화 <취화선>을 이곳에서 찍었다.
석모도는 연인들의 섬이다. 육지에서 가지고 들어온 승용차를 이용하여 드라이브를 즐기거나 자전거를 빌려 해안가를 하이킹하는 연인들은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눈썹바위 마애불에 나란히 소원을 비는 연인들, 민머루 해수욕장 모래밭에 돗자리를 펴고 일광욕을 즐기는 연인들, 갯벌 속에서 작은 게라도 발견하게 되면 아이들처럼 환호성을 터트린다. 바다가 보이는 갯바위는 어김없이 연인들의 차지다. 포토존으로는 최고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좋은 섬, 사색하기 좋은 섬, 무거운 하루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섬… 강화도와 석모도이다.
여행쪽지
● 강화도 가는 길(지역번호 032 공통)
외곽순환도로 김포 T/G 지나면 강화로 빠지는 곳(김포고촌)이 나온다. 이곳에서 48번 국도를 이용하면 강화 읍내까지 직선 코스이다. 석모도는 읍내에서 외포리 방향으로 내려가야 하고, 낙조 명소 적석사는 내가면으로 더직진하여야 한다.
● 삼보해운(여객선 문의) 932-6007/적석사 932-6191/무애원(도예 체험) 932-5087/벅스투유 곤충농
장 934-9404 /은암자연사박물관 934-8873/화문석 문화관 932-9922
● 좋은 연 934-1944(연 요리 전문점/선원사에서 직영한다), 황토염색 자연마당(932-2106/석모도), 박정희
천연염색(934-3876/강화도)
● 숙소
노을 내리는 아름다운 집(933-9677, 석모도 펜션)/이른아침 호수가(934-8002, 강화 국화리 저수지 옆 펜션)
※ 석모도에 차를 가지고 갈 경우, 나올 때에는 복잡하니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지는 것이 좋다. 석모도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는 것도 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