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주는 사람이다. 우체부 자신이 원해서였든지,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이었든지, 그는 가장 평화로운 자세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져다준다. 나는 그가 주는 흐뭇하고 서민적인 평화를 좋아한다.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 그의 가방 빛깔, 그리고 내게로 오는 그의 발자국들은 내 허허로운 영역에 훈훈한 꽃잎을 나누어 준다. 나는 “보랏빛 우체부”가 되고 싶다.’
- 최명희, <우체부>
소설 『혼불』을 쓴 최명희 작가의 수필엔 이런 구절이 있다. 우체부(집배원)는 이렇듯 무언가 주는 이들이다. 올여름 우정사업본부에서는 이런 집배원과 힘을 합쳐 『집배원이 전하는 방방곡곡 신나는 여행』이란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연간 1억 8,500만km(지구 4,000바퀴)를 달리는 전국 2만여 집배원이 추천하는 숨겨진 여행지와 주변 맛집, 지역 특산품 등을 소개한 이 책자에는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히 담겨있다. 이번 9월은 이 책에서 소개한 종로구와 성북구로 여행을 떠나본다.
인왕산에서 본 서울시 전경 Ⓒ김용관
도심 속 공원과 종로구 작은 도서관
서울 종로구엔 10개가 넘는 우체국이 있다. 그중에서도 삼청동우체국은 북촌 한옥마을을 지나, 감사원 1층에 자리한다. 또한 가까이에 삼청공원과 와룡공원이 있어 철마다 변하는 나무의 색과 피어나는 꽃에 따라 계절을 좀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삼청공원 안에는 종로구 작은 도서관 중 하나인 삼청공원숲속도서관이 있다. 이곳은 종로 구립도서관 중 하나다. 가까운 청운문학도서관이 문학에 중점을 둔 도서관이라면 이곳은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과 위인전 등이 많아 부모님 손을 잡고 오는 아이들이 많고, 지역 주민들도 슬리퍼와 가벼운 옷차림으로 책이나 신문을 읽기 위해 자주 들른다.청운동의 청운문학도서관은 작은 전시가 열리는 현대적 건물과 한옥 몇 채가 어우러져 있다. 1층에서 책을 빌려 2층의 한옥에 앉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인 셈. 종로구에서 한옥을 가까이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도서관이 되어준다. 청운동과 부암동 사람들은 동네 풍경에 어우러진 이 한옥 도서관을 동네의 큰 자랑거리로 삼는다. 작은 공원과 작은 도서관. 이처럼 동네와 친해지는 방법은, 이런 공공시설을 잘 사용하고, 즐기는 발걸음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청운문학도서관
윤동주 문학관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했다. 이 시기 집에서 가까운 인왕산 자락 청운공원 주변을 거닐며 대표작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을 고민하고, 창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부암동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보는 서울의 풍경이 멋지다. 시를 잘 몰라도, 평소에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더라도,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모습과 ‘서시’가 새겨진 시비(詩碑)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상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윤동주 문학관 Ⓒ김용관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 Ⓒ김용관
2012년에는 청운공원 일대 인왕산 자락의 용도 폐기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리모델링하여 윤동주 문학관이 개관했다. 이렇듯 부암동과 청운동 일대는 윤동주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는 동네가 되었다. 작가가 머문 이곳에서 영감이 되어준 것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고스란히 남아 책으로, 공간으로 독자들과 만난다. 문학관에는 시인의 일생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한 사진 자료, 친필 원고 등이 있고, 제2전시실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탱크의 윗부분을 개방하여 중정(中庭)을 만들고 ‘열린 우물’이라 부른다. 시인의 시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을 모티브로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탱크의 물때가 벽체에 그대로 남아있어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퇴적을 느끼게 한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눈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열린 그 우물 안에서 밖을 보며 우리도 잠시나마 시인이 되어본다.
더불어 문학관에서는 ‘별뜨락’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운영한다. 차를 마시며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벤치에 앉아 주변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문학관의 그림이 담긴 엽서도 판매하고, 문학관을 위해 특별 제작된 ‘영원우표’가 붙어 있다. 문학관을 둘러보고 생각나는 이에게 편지를 적을 수 있는 것. 바로 옆엔 우체통도 있어 그리운 이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다. 삶에 문학을 담는 일- 그 행동의 시작이 윤동주 문학관과 이 동네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한양도성
창의문에서 숙정문 그리고 혜화문까지
‘한양도성’은 4대문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과 4소문인 혜화문(동소문), 소의문(서소문), 광희문(남소문), 창의문(북소문)을 포함해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조선 시대의 도성으로, 국보 8개 등 총 100여 개가 넘는 문화유산이 곳곳에 자리한다. 한마디로 한양도성 길은 서울의 역사와 문화, 생태를 느낄 수 있는 도심 속 트래킹 코스다.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했기에 그 역사와 가치가 더욱 높다. 한동안은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가 인기였지만, 요즘은 꼭 도장을 찍기 위한 사람들보단 그저 계절마다 풍경이 좋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총 6개 구간 중 ‘백악구간’이라 불리는 한양도성길 1코스는 청운동 창의문에서 혜화동 혜화문까지, 총 4.7km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이 중 창의문에서 중간의 숙정문까지는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야 해서 숨이 차고 힘든 구간이다. 하지만 힘들게 오른 만큼 그곳에 올라 볼 수 있는 풍경이 남다르다. 서울에 살면서 이곳을 한 번도 걸어보지 않았다면 이번 가을, 반드시 찾아볼 것을 권한다.
청와대 뒤편인 이 구간은 보안상 군사지역으로 분류되었고, 1968년 북한 특수요원 31명이 대한민국의 정부 요인을 살해하기 위해 청와대를 기습했던 1·21사태(김신조 사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다. 2007년부터 전면 개방됐지만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걸을 수 있다. 창의문에서 시작해 돌고래쉼터에서 잠시 쉬고, 백악마루에서 바라보는 서울 풍경은 작은 장난감을 보는 듯하다. 바쁘고 정신없는 도시에서 우뚝 솟은 전망대, 특히나 역사 속 공간인 한양도성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참 멋지다. 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풍경을 선물하는 이 성곽길을 아직 만나지 않았다면 올가을을 놓치지 말고 걸어보자.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길 위에서 윤종신의 ‘벗어나기’란 노래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미련 없이 벗어나보자 예민해진 나의 도시를’로 이어지는 가사가 귓가를 두드릴 때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시선을 이동하고 도성의 안팎 풍경을 감상하며 언제나 아등바등 바삐 지내온 우리에게 여유를 선물하자. 이곳은 사실 돈을 내고 오르는 그 어떤 전망대보다 훌륭하다. 풍경도, 역사적 가치도, 또 나의 두 발과 두 손을 움직여 만날 수 있는 풍경은 한번 보고 나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이다. 일부 지역은 사진촬영이 제한될 수 있고, 출발하면 약 2시간 동안 화장실이 없으므로 미리 다녀오는 것이 좋으니 기억해두자.
길상사와 템플스테이
길상사는 법정스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절이다. 한때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기생 김영한(필명 자야, 법명 길상화)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서울 3대 고급 요릿집으로 유명했던 대원각을 시주하여 오늘날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된 것이다. 사찰 안 길상헌 뒤편 언덕에는 김영한의 공덕비(功德碑)가 세워져 있다.
길상사에 들어서면 중앙에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성북구가 선정한 ‘아름다운 나무’이자 수령이 100년도 훌쩍 넘은 느티나무들과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조각가가 만든 관음보살상이 있다. 사찰 근처에는 성북동성당이 있는데 부활절과 석가탄신일에는 서로 축하 인사를 나누기도 한단다. 이러한 종교적 포용과 화해의 염원이 이 관음보살상에도 담겨 있다.
특히 이곳에는 법정스님의 영정과 유품, 유골을 모신 진영각이 있어 스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찾아온다. 9월에는 길상사 곳곳에 붉은 가을꽃 ‘꽃무릇’이 진영각의 작은 뜰과 법정스님의 유골이안치된 곳 주변에 피어난다. 『대한민국 대표 꽃길』이란 책에따르면, 절집을 단장하는 단청이나 탱화에 독성이 강한 꽃무릇의 뿌리를 찧어 바르면 좀이 슬거나 벌레가 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꽃이 사찰 곳곳에 많다고 한다.
부처님 오신 날 연등이 가득하거나 9월 중순 이후 붉은 꽃무릇이만개할 때, 길상사는 일상의 쉼표가 필요한 순간마다 찾아가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곳에서도 템플스테이가 열린다. 이 프로그램은 『집배원이 전하는 방방곡곡 신나는 여행』에서도 강력 추천하고 있다. 멀리 가지 않고도 한적한 분위기와 여유를 느끼며, 무엇보다 앞만 보고 직진해온 자신의 일상을 잠시 멈추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서울의 숨은 단풍 명소이기도 하니 나무를 보며 일상에 지쳐있던 우리의 마음을 돌보러 올가을엔 이곳에 들러보자.
길상사 템플스테이 Ⓒ길상사
서울 속 마음 쉼터 발견하기
서울이란 도시에 우리 각자의 마음 쉴 곳이 있다는 것,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큰 의미가 있다. 몇 년이면 크게 변하는 동네, 임대료가 치솟아 자주 달라지는 그런 거리가 아니라, 언제 가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 있을 때, 그곳을 바라보며 얻는 안도감이 있다. 한 걸음 천천히, 올가을엔 서울을 다시 바라보며, 나만의 마음 쉼터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여행 Note
장소를 꼭 달리해야 여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늘 가던 곳을 다른 시간에 찾는 것부터 작은 여행이 시작될 수 있다. 9월은 대체휴무일을 포함한 추석연휴가 있어 이 기간을 서울에서 보내는 이도 많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서울 한복판을 누빌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달! 이들에게 도움이 될 서울 종로구의 멋진 공간과 이야기가 담긴 장소를 공유한다.
종로 구립도서관
종로구에는 구립도서관이 총 16개 있다. 청운문학도서관, 삼청공원숲속도서관, 아름꿈도서관 등 평창동, 효자동, 창신동 등 작은 도서관을 통합해 이용할 수 있다. 홈페이지와 애플리케이션에서 통합 모바일 회원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 종로구민이 아니더라도 도서관과 프로그램 이용, 희망도서 신청 및 대출이 가능하니 참고할 것.
lib.jongno.go.kr
02-2148-2024
가회동성당
서울 곳곳, 동네마다 성당이 있지만 이 성당은 유독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북촌 한옥마을의 한옥과 어우러진 종교 공간. 대청마루와 누마루의 열린 공간에선 사진 찍는 이들이 여럿이다. 지역과 성당 1층엔 작은 순교 박물관도 있으니 함께 둘러보면 좋다.
종로구 북촌로 57
02-763-1570
그린마일커피 북촌점
2층의 창 너머로 보이는 한옥 기와가 커피 한 잔의 풍경이 된다. 음료를 갖고 오를 순 없지만 잠시 앉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옥상이 아주 멋지다. 날이 좋을 땐 저 멀리 남산이 보이는데, 그 풍경만으로도 커피 값이 아깝지 않은 곳. 다양한 커피와 차 종류를 판매한다. 평일엔 오전 8시, 주말엔 10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종로구 북촌로 64
02-744-2404
환기미술관
부암동의 주택가에 위치한 환기미술관은 화가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후 환기재단법인에의해 김환기의 예술 세계를 정리, 소개하고자1992년 설립되었다. 수화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의 제1세대 작가로, 파리와 뉴욕에서도 활동했다. 본관을 포함해 총 3개관의 전시실이있으며, 올해 말까지 열리는 2018 수향산방특별전 <해와 달과 별들의 얘기 Ⅳ>는 유화, 과슈, 편지그림 등 6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윤동주 문학관과 연계해 둘러보기 좋은 부암동의 문화명소.
종로구 자하문로 40길 63
www.whankimuseum.org
02-391-7701
사진 : Ⓒ환기미술관
수연산방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인 한옥에서의 차 한 잔을 원한다면 이곳을 기억하자. 지금은 카페로 유명한 이곳 수연산방은 단편소설의 거장 작가 이태준의 집이었다. ‘문인들이 모이는 산 속 작은 집’이란 뜻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이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한옥이자 찻집이 되어 사람들을 반긴다. 본채와 사랑채, 마당 등이 운치 있다. 단호박 빙수, 대추차와 우리 음료가 큰 인기다.
성북구 성북로 26길 8
02-764-1736
템플스테이
서울에도 템플스테이가 가능한 사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약 39개의 사찰에서 당일형, 체험형, 휴식형으로 나누어 종교를 초월한 힐링과 자기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제안한다. 종로구의 조계사에선 음악이 있는 템플스테이, 참선을 배우는 시간 등 당일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이곳에서 추천한 길상사 템플스테이는 매달 셋째·넷째 주말에 열리며 9월에는 15일과 29일에 1박 2일로 열린다.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할 수 있고, 프로그램에 따라 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www.templestay.com
02-2031-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