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은 스스로를 낮추면서 존경받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덕목이다.
<사랑의 리퀘스트> 제작진에게 두 남자가 찾아왔다. 아버지의 뜻을 전하러 왔다는 이들은 수표 두 장과 편지한 통이 든 봉투를 내밀고 이름도 밝히지 않고 사라졌다. 수표 금액은 30억 원, “병마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써달라.”는편지내용이다. 이 얼굴 없는 천사는 누구일까. 생색내고 사진 찍기에 바쁜 세상인데….
나는 겸손 앞에 서면 머리가 숙여진다. 그 알량한 명예와 지식을 과대 포장하여 자존심으로 교언영색(巧言 色)했고, 자기방어와 변명으로 자화자찬하며 얼마나 고개가 뻣뻣했던가. 세월에 새긴 시기와 갈등, 미움은 또 어떠했던가. 명경(明鏡)에 비친속내가 교만으로 가득하다. 깊은 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마시고 이제부터라도 귀는 활짝 열고 입과 몸은 낮추면서 겸손의 미학으로 치유해야 한다. 겸손은 지고도 이기고, 교만은 이기고도 진다. 힘 있는 사람이 겸손할 때 아름다움이 돋보이고, 교만할 때 유난히 역겨운 것은 내면과 외면의 높낮이 때문이다. 겸손은 변명하지 않는다. 운동선수가 시합에 졌을 때, ‘어제 밤잠을 설쳐서, 운이 없어서, 컨디션이 나빠서,…’라는 변명은 속이 누런 교만이다. 패배를 능력 부족으로 인정하는 것은 겸손이고 다음 시합에서 이길 수 있는 저력이다. 겸손한 이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만, 교만한 이는 방자하여 소질만 믿고 얕잡아보다가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우를 범한다.
겸손은 순수해야 한다. 권력 앞에 겸 손이 가 식 되거나 지나치면 곡학아세(曲學阿世 : 그릇된 학문으로 시세나 권력자에게 아첨함)의 꼴이되어 볼썽사납다. “남을 칭찬하는데는 5분 지속하기 어렵고, 남을 흉보는 데는 밤을 새운다.”는 말이 왜 회자될까. 겸손의 부재다. 남의 자랑은 끝까지 들어주고 자기 자랑은 감추는 겸손은 숨어서 피는 벼꽃처럼 아름답다.
밀레의 만종은 겸손의 미학이다.
나는 교만이 고개를 들 때 <만종(晩鐘)> 그림을 만난다. 그를 보고 있으면 어느 새기도 하는 마음이다. 구름만 지나도 마음에 그림자 질 것 같이 영혼이 맑아진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고개 숙이고 기도하는 편안함에서 미움도 편견도 안개처럼 사라지고 감사와 겸손이 가슴에 머문다.
<만종> 그림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겸손이다.
비움은 겸손의 미학이다.
겸손은 비움에서 성장하고 교만은 탐욕에서 성숙된다. 겨울나무처럼 빈 몸으로도 아름다울 수는 없을까. 채움 없는 비움은 무의미하다.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듦)의 심경으로 심신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탐과 교만을 비우고 겸손으로 채워야 한다.
인간의 완성은 첨가가 아닌 삭제에서 이루어진다.
시상(詩想)은 겸손의 미학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 교만이 일 때 독서하며 시심(詩心)으로 접근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동안/가을빛은 제 몫을 다한다/늘 우리 뒤편에 서서도/욕심내지 않는 가을 햇살/
오늘은 또 누구를 만나려는지/일찌감치 사과밭에 와서/
고작은 사과를 만지작거린다/
햇살은 가을을 위해 모두를 주면서도/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떠난다’
노원호의 <가을을 위하여>다.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시사하는 시다.
병술년 우리 사회의 실태를 사자성어로 교수들은 밀운불우(密雲不雨 : 구름은 잔뜩 끼어있으나 정작 비는 내리지 않음)를꼽았다. 비가 오기 전에 먹구름 만 자 욱하듯이 어떤 일의 여건은 마련되었지만 일이 풀리지 않아 답답함을 비유한 말이다.
이제부터라도겸손함으로비를내리게 하여, 답답한 체증이 내려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