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봄처녀’란 시어에는 생명과 희망, 신선함과 함께 신성함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사람들은‘봄처녀’에서 설렘과 기대, 가벼운 흥분마저 느끼곤 한다. 그런 봄처녀를 닮은 섬이라고 한다면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을까? 그 봄처녀가 거제 앞바다에 있다.
장승포항에서 뱃길로 20분.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그 쪽빛 바다에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지심도(只心島).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운림리에 속한 부속 섬이다. 지심도는 섬의 모양이 ‘마음 심(心)자’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동백나무가 많아 동백섬이라고도 부른다.
“매화나무도 있고 유자나무도 있고… 소나무, 대나무도 많지만 동백나무가60~70% 정도 됩니다.”
도선장에서 만난 여객선의 선장은 지심도 이야기를 꺼내면서 섬 전체가 국방부소유임도 살짝 귀띔을 해준다. 지심도의 15가구 중 빈집을 제외한 순수‘지심도 사람’들은 12집인데 모두 국방부에 연간 얼마씩의 사용료를 내고 땅을 빌려 쓰고 있다. 그래도 다행히 건물만큼은 주민들 소유로 등기가 되었다고 한다.
섬 남쪽 끝인 마끝에서 바라본 해안 절경
뜰망낚시로 손쉽게 학꽁치 떼를 잡아 올리는 피싱하우스 쥔장. 지심도의 전통 어법이다.
여린 쑥과 자연산 도다리가 만나 식탁 위에도 봄을 꽃피웠다. 봄도다리쑥국
붉게 물든 동백에 관광객들의 마음마저 붉게 물든다.
아름다운 해안 절경
이 섬에 처음 주민들이 살기 시작한 때가17세기 중반인 조선 현종 때인데 그때 정착한 사람도 지금과 같은 15가구였다고 한다. 그 후 일제시대에 들어서는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져 일본군 1개 중대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그 후유증 탓에 지금도 아름다운 섬 안에 당시의 탄약고, 포진지 등의 유적이 흉물스런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본군이 물러간 빈자리에는 그 상처가 동백이 되어 만개했다. 섬 곳곳에 거목이 되어 울창한 숲을 이룬 동백에 육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탄성을 지른다. 동백의 개화 기간은 참으로길다. 성질 급한 놈은 10월 하순에서부터 피고 행동이 굼뜬 놈은 5월까지도 버틴다. 더군다나 동백은 두 번 피는 꽃 아닌가. 나무 위에서 한 번, 땅 위에서 한 번 더 피다 보니 일 년에 절반은 동백꽃 그늘이다. 그러니 동백섬 아닌가!
지심도의 볼거리가 동백뿐인 것은 아니다. 해식애가 발달하여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지니고 있으니 섬 일주 트레킹의 맛이 제법이다. 특히 해안선의 길이가 3.7㎞에 불과할 정도로 섬의 크기가 작고 숲 사이로 뻗어난 길도 좋아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어울린다. 섬을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2시간. 이 시간이면 쉬엄쉬엄 돌다가 포인트에서 멋진 사진도 찍을 수있다. 해안 절경의 포인트는 크게 두 군데이다. ‘마끝’이라고 불리는 남쪽 끝 해변과 북쪽 끝자락의 해안선 전망대가 그곳이다. 이곳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편하게 앉아 지나가는 낚싯배를 내려다보면 천상의 세계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지심도 제일경, 북쪽 해식애.
동백꽃 / 지심도를 출발한 배가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피싱하우스」의 ‘섬사나이’
주민들은 민박을 치면서 산다. 지심도 민박집 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곳은 섬 중간에 자리한「피싱하우스」다. 부산에 가족이 있다는 이곳 쥔장은 지심도에서 5년째 혼자 살고 있는‘섬사나이’다. 관광객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고 낚시 포인트를 알려주고 틈틈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수집한 돌과 나무 자랑도 늘어놓는다. 어쩌다 맘이 맞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이런저런 사람 사는 이야기로 배 시각을 놓치기도 한다. 「피싱하우스」는 열린 공간이다. 쥔장이 없어도 잠시 들어와 차한잔하고갈 수 있다. 마당 한 쪽의 테이블에 놓여있는 컵과 커피믹스는그런 관광객들을 위한 쥔장의 작은 배려다. 깍쟁이 도시 사람들은 산 사나이의 이런 호의에 가끔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마당 여기저기에 숨겨진 삶의 흔적과 쥔장의 익살을 둘러보게 되면 이내 의심의 마음을 풀고 도시 사람들의 편협함으로 섬 사나이를 본 자신의 행동에 후회를 하게 된다.
50년 된 요강, 2007 숭어 사망 기록일지(숭어를 잡아 요리할때마다 창틀 위에다 한획한획 그었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모양을 한 나무뿌리, 지심도가 낳은 기기묘묘한 수석 작품들, 숭어 지느러미로 만든 나비 작품, 여러 가지 낚시도구와 시간이 머문 듯 손때 묻고 먼지 앉은 소품들, 카메라를 소지한 관광객들을 위해 조성한 포토존은 어느 아가씨가 스튜디오 같다고 할정도로 훌륭하였다. 한옥의 주련에서 힌트를 얻었을까, PVC 파이프 여기저기에도 세로로 글씨가 써져 있다. 쥔장 자신의 삶을 말하려는 듯 어눌하게 써 내려간 ‘비운 만큼 새 삶은 찾아든다.’라는 글씨에 관광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한가할땐 손님들과 낚시도 즐기는데 특히 날씨가 도와준다면 지심도재래어법인 ‘뜰망(뜰채)낚시’를 함께 즐겨볼 수도 있다.
뜰망낚시는 커다란 뜰망을 대나무에 달아 물속에 드리우고 밑밥 같은 먹이를 풀어 물고기 떼를 유인한 다음에 들어 올려잡는 방법이다. 3, 4월의 학꽁치를 비롯하여 망상어, 자리돔 등을 잡을 수 있는데 불과 5~10분 정도만 내려놓아도 20마리 남짓잡는다. 이렇게 대여섯 번을 하니 200여 마리 정도가 금세 채워진다. 낚시꾼의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많이 잡힐땐 한 번 집어넣어 100여 마리가 잡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심도의 봄이 동백 숲에만 있는 건 아니다. 이곳 바다에도 있다.학꽁치가 물러가면 봄도 따라 갈 것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물러갈 것이다.
피싱하우스의 울타리가 여행객들의 사연으로 빼곡하다.
방향표지석에 봄처녀가 잠시 머물며 쉬고 있다.
동백꽃 피고 동박새도 날아오고
지심도를 찾는 육지 사람들은 동백꽃을 보러온 사람이 절반이고 낚시를 하러온 사람이 절반이다. 낚시꾼들은 섬 여기저기 갯바위에 채비를 풀고 마치 세상을 다 낚으려는 양 큰 몸짓으로낚싯줄을 바다에 내던진다. 천주교 공소를 운영하고 있는 황토민박 쥔장은 지심도에서 유일하게 배를 가지고 있다. 이 5톤급 어선은 가끔은 낚싯배로, 가끔은 섬을 해상 일주하는 유람선으로도 활용된다. 고깃배는 마을에 하나뿐이지만 자가용은 많다. 찻길이 없는 좁은 섬이기에 주민들은 오토바이에 작은 화물칸을 매달아 자가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집집마다 이런 자가용을 한 대씩 가지고 있는데 낚시꾼이나 관광객들의 무거운 짐을 선창까지 운반해주기도 하고(사람들은 짐만 맡기고 걸어간다) 생필품을 실어 나르기도 한다.
“생필품, 전화만 하면 다 장승포에서 실어 보내줘요. 계산도 전화로(폰뱅킹) 하니까 일일이 주고받을 일 없고, 참 편한 세상이죠.”
아무래도 섬에서 살다보면 생필품 구하기도 쉽지 않겠다는 질문이 철없는 나그네의우문이 되고 말았다.
“오늘은 바다가 참 잔잔하네요. 바람이 불면 파도꽃이 피기도 하지요. 아무리 멋져도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면 우울증 걸려요. 그런데 그 사이에 저렇게 동백나무가 있잖아요. 꽃도 피고 동박새도 날아오고… 얼마나 좋습니까?”
지심도의 동백은 관광객들에게도 즐거움이지만 주민들에게도 삶의 활력이다. 봄처녀야. 부디 천천히 가거라!
여행 쪽지(지역번호 055 공통)
● 찾아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로 대전까지 내려간 후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종점인 통영으로 진출하여 신거제대교를 넘으면 장승포까지 큰 길로 이어진다.
● 도선 문의 : 장승포항(681-6007)
● 업소 추천
- 지심도 안 : 식당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민박집에서 식사까지 제공한다.
피싱하우스(010-8513-4581), 동백하우스(011-859-7576), 황토민박(011-835-2276)
- 장승포항 : 도선장 앞「원조자연산횟집」(682-4808)에서 ‘봄도다리쑥국’을 맛볼 수 있다. 봄도다리쑥국은 봄철의 여린 쑥과 자연산 도다리를 넣고 끓였는데 들깨가루로 비린내는 없애고 봄의 향내는 살렸다. 담백하고 부드러워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는 계절 별미다.
- 장승포항에는 호텔과 모텔 등의 숙소가 많은데 도선장 바로 앞과 5분 거리 정도 떨어진 곳과는 숙박료가 10,000원 이상 차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