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月 二十一日 갑자기 아름다운 글을 받아
두 번 세 번 읽고、
속세를 벗어나 초연한 사람은 그 언어 또한
깨끗하여
속인이 미칠 바가 아님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여강驪江(여주)은 내가 좋아하는 곳입니다.
선생 또한 그것을 아는데、 선생이 나보다 먼저
가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서글퍼집니다.
하물며 세간의 새로운 일이 해마다 다르고
달마다 같지 않음에 있어서겠습니까.
근자에 들으니 약재若齋가 시묘侍墓 살이를
한다고 하는데、
다행히 지금 공무가 한가하니 도은陶隱과
더불어 필마를 타고 가서 조문하려고 합니다.
만약 뜻대로 되면 천녕川寧에서 하룻밤
이야기하며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해마다 보내주시는 햅쌀을 받는데、 마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六月부터 이질을 앓아 三十日이 되어
가는데、 요즘 조금 낫습니다.
아울러 아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사연은
조문하고 돌아올 때로 미루고、
서늘한 가을에 몸조심하시기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정몽주 올림
그림. 정윤미
아름다운 교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에게 1380년 무렵에 보낸 편지다. 포은이 ‘세간의 새로운 일이 해마다 다르고 달마다 같지 않다’고 했듯이, 이 편지를 쓸 무렵에는 원나라 세력이 쇠퇴하고 명나라가 새로 대두하고 있었으며 홍건적과 왜구가 침략하는 등 고려의 상황이 안팎으로 뒤숭숭했다. 그러한 상황의 한가운데서 중임을 맡고 있던 포은에게 복잡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심정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서글퍼집니다’라며 포은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 편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훌쩍 떠나고 싶은 심정’이다.
둔촌은 당시 은퇴하여 여주 옆에 있던 고을 천녕에서 자연을 벗삼아 시와 학문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세력가 신돈辛旽을 논박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아버지를 업고 경상도 영천으로 피신하여 남의 집에 우거하기도 했다. 신돈이 축출되고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마음은 이미 벼슬에서 멀어져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달아나 목숨을 부지한 일이 그에게 벼슬살이의 덧없음을 깨우쳐주었던 것일까? 그가 호를 ‘둔촌遁村’이라고 한 것은 신돈의 위협을 피하여 달아났던 일과 벼슬살이에서 달아나고 싶은 심정을 함께 표현한 것이다.
이 편지를 읽으면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친구의 따뜻한 정감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두 사람을 비롯하여 이 편지에 언급된 척약재 惕若齋 김구용(金九容, 1338~1384)과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1392), 그리고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등 다섯 사람이 학문적 동지로서 또 친구로서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집의 문집 《둔촌잡영》의 서문에 하륜河崙이 ‘도은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목은, 포은 그리고 둔촌을 초대하여 매화분을 앞에 놓고 매화시 연구聯句를 지었다. 나도 말석에 참석했다’고 한 것을 보면, 하륜도 이들 사이의 우정을 보고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둔촌잡영》의 발문에는 이들의 우정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시 이름 있는 사람 중에 그(遁村)와 시를 주고받은 사람이 어찌 한정이 있었으랴만, 유독 목은, 포은, 도은, 척약재 네 선생이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절조로써 교유한 것은 비록 예리한 금속이나 향기로운 난초로라도 그 지극함을 비유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둔촌을 말할 때는 반드시 네 선생을 일컫고, 네 선생을 말할 때는 또 반드시 둔촌을 일컫는다”
희귀본이 된 포은의 글씨
필자가 이 편지와 같은 포은의 글씨를 처음 만난 것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옛 글씨첩
《근묵槿墨》을 번역하면서였다. 《근묵》의 첫머리에 같은 편지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 편지를 번역하면서 두서너 글자의 획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얼마 후 같은 편지가 동아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도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 편지를 살펴본 결과, 고려대학교 소장본은 목판본이며 성균관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 소장된 필사본은 고려대학교 목판본을 모사한 것일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어느 지인의 집에 갔더니, 이 편지가 실린 서첩을 하나 보여주었다. 그 서첩에는
이 편지 외에도 포은의 편지가 하나 더 있었다. 고려말 풍의 서체에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서품書品이었다. 포은의 다른 글씨가 없어 비교할 수는 없지만 포은의 친필이 아니라고 제쳐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포은의 문집 《포은집圃隱集》을 살펴보니, <습유拾遺 (빠진 것을 보충함)〉에 지인의 서첩에 실려 있는 포은의 두 편지가 나란히 실려 있었다. 《포은집》이 17세기에 여러 차례 간행되었는데, 그중 어느 땐가 이 두 편지가 추가로 수록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써 대략 떠오르는 생각을 연결해보면, 이 편지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주지하다시피 포은은 태종에게 피살당했다. 최대의 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포은의 글씨를 비롯하여 포은과 관련된 모든 자료는 금기시되었다. 그것을 지니는 것은 역적으로 몰릴 위험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포은의 글씨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실제 포은의 글씨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현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세월이 흘러 포은이 복권되었다. 그는 더 이상 역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한 모범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문집도 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글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씨가 마른 줄 알았던 그의 글씨가 그래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의 글씨는 위험한 물건이 아니었고, 자랑거리가 되고 보물이 되었다.
예로부터 훌륭한 인물의 글씨를 간직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전통이 있었다. 친필이 아니면 목판본이라도 가지기를 열망했다. 글씨를 그 사람의 분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새로 나타난 포은의 글씨가 문집에 실리고 나서, ‘동방 리학理學의 시조’ 포은의 글씨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 역시 많았다. 그리하여 새로 발견된 이 편지 글씨를 목판에 새겨 몇 사람이 서로 나누어 가졌다. 그중의 하나가 고려대학교 소장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원본은 또 자취를 감추고 목판본도 희귀해졌다. 포은의 글씨에 목마른 사람들이 목판본이나마 모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남은 것이 성균관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 소장된 모사본인 것이다. 자취를 감췄던 원본은 글씨가 천대 받던 근대 백년의 세월을 건너 용케 살아남아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지인의 서첩에 실린 것이 그것이다. 이 글씨가 포은의 친필이라고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저승에 들고 가 직접 쓰셨느냐고 물어볼 길이 없지 않은가? 다만, 세상에 포은의 글씨가 남아 있다면 현재까지는 이 글씨 말고는 없다.
하영휘 / 고문서(古文書) 달인이라 불리는 하영휘는 선인들의 옛 편지를 통한 역사연구로 당시대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