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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사진이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처음에는 사람의 영혼과 생명을 잡아먹는 괴물로 여겨지기도 했고, 일반 대중에게 조금씩 소개되면서부터는 사진값은 술 외상값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 갚아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또 사진이 점차 많이 알려지게 되면서 한때 모닝코트를 입은 사진사는 사회적 명성과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글. 유경선 중앙대 사진학과 교수

'98 사진영상의 해 [4] - 모닝코트를 입은 조선의 사진사
199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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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사진이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처음에는 사람의 영혼과 생명을 잡아먹는 괴물로 여겨지기도 했고, 일반 대중에게 조금씩 소개되면서부터는 사진값은 술 외상값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 갚아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또 사진이 점차 많이 알려지게 되면서 한때 모닝코트를 입은 사진사는 사회적 명성과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이렇게 사진과 사진사에 대한 생각이 변해가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것은 바로 · 초상사진이었다. 서구에서도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가장 각광받고 빠르게 퍼져나간 것은 초상 사진이었다. 초상사진이 자신의 모습을 오랫동안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고, 특히 일본에 의한 강압적인 단발령 시행으로 사람 들은 더더욱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초상사진은 전통적인 샤머니즘과의 격렬한 충돌 가운데에서도 사진이 일반 대중에게 자리잡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천연당사진관의 사진.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여 독특한 사진을 만들었다.




YMCA 사진과 스튜디오



해강 金奎鎭의 천연당사진관

갑신정변의 실패와 전통 무속과의 충돌 때문에 조선내에 있던 사진관들이 모두 파괴된 후, 다시 사진이 자리잡게 된 것은 1900년대 초이다. 이때에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초상사진을 찍던 영업사진관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동안 유일하게 한국인 사진관으로 명맥을 지켜온 것은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이었다.

김규진은 한말의 대표적인 서화가이자 영친왕에게 서화를 가르친 사부였다. 그는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우고 돌아와 1903년경 지금의 소공동에 있던 자신의 집에 천연당사진관을 개관했다. 천연당은 천연동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에서부터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일반인을 대상으로 많은 사진을 촬영하였는데, 특히 당시 유일한 한국인 사진관이라는 점과 유명한 서화가라는 점 때문에 크게 번창했다.

천연당사진관은 기술 수준이나 시설면에서 다른 일본인 사진관과 비슷하였다. 하지만 독특한 것은 유교적 사회 질서의 제약이 컸던 여성들을 위해 여성 전용 촬영장과 여성 사진사를 두었다는 점이다. 당시에 대부분의 사진사가 남자였기 때문에 남녀유별의 사회적 관습이 두터운 벽이 되었고, 여성들은 사진 촬영을 꺼렸다. 김규진은 여기에 착안하여 여성만을 위한 촬영장을 설치하고 신문에 광고를 낸다. 1907년 10월 25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광고를 찾아볼 수 있다.

'포덕문밖 신작로변 김규진 집에 천연 당사진관을 건설하고 부인네 사진을 백히 옵는데 값도 렴하고 사진 정교하오며 내외 엄숙하고 부인 사진은 여인이 백히오니 사진 백히기 원하시는 부인네는 본당에 왕림면의 하시옵.

부인 사진사 향원당 고백'

천연당사진관의 이와 같은 획기적인 해결책은 일본인 사진관에도 영향을 미쳐 점차 보편화되었다. 그렇다 해도 사진관을 찾는 여성들은 주로 기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천연당사진관의 사진값은 小-50전, 中-1원, 大-4원 반이었는데, 당시 쌀 한섬이 50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비쌌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객을 확보했던 천연당사진관은 정월 명절 기간에는 1천여명의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사진을 촬영했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사진은 얼마 안된다.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천연당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은 배경을 단색으로 처리하여 인물을 두드러지게 하였으며, 천정에창을 만들어 자연광을 촬영에 이용했다. 또한 1913년경에는 사진관내에 ‘古今書晝觀’을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1915년에는 건물을 신죽하여 사진과 서화를 함께 취급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사진값을 술값 외상과 동일하게 생각하여 잘 갚지 않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사진관의 유지가 점차 어렵게 되었다. 때문에 1909년 매일신보에는 촬영을 하기 전에 선금을 받고 촬영장에 입장시키겠다는 광고가 게재된다. 그렇지만 거듭되는 거래 불균형과 사람들의 이해부족으로 결국 천연당사진관은 점차 쇠퇴하게 되고, 김규진은 서화로 전향하게 되었다.




YMCA 사진과 실습실



사진 교육의 선구자 - 왕성기독교청년회학교 사진과 (YMCA 공업부 사진과)

사람들이 사진을 좋아하게 되면서 사진관이 많아지고. 이에 따라 기술의 경쟁이 심해졌으며. 사진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의 수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김규진 같은 초기의 사진사들은 일본에까지 가서 사진을 배워야 했지만. 이제 국내에서도 사진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사진 술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사진관의 도제로 들어가거나,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방법이 있었다. 사진관의 도제로 들어가는 경우 4 내지 5년 정도 일을 배우고, 독립 할 때는 임금 대신 출사용 사진기를 사주는 것이 관례였다. 한편, 정규 교육과정으로는 황성 기독교정년회학교 사진과가 설립되었고. 공성학교 야간 속성사진술 강습원이 문을 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사진사들이 배출되었고, 사진의 폭넓은 대중화도 가능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정규 사진교육을 했던 기관은 YMCA로 1903년 설립된 기독교청년운동체이다. 일제 강점이라는 혹독한 시기에 민족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YMCA는 실무교육에 역점을 두고 신문화운동을 펼쳐나갔다. YMCA는 1人 1技라는 구호하에 당시에는 등한시하던 실무교육을 실시했는데, 여기에는 목공 · 철공 · 기계 · 염직 · 사진과를 포함한 공업부 5개과가 있었다.

사진과는 영국인 교수와 하와이에서 사진을 배운 최창근을 담임 교수로 하여 1910년 1월 처음으로 학생을 모집했다. YMCA 사진과의 수업은 3개월 과정이었으며. 사진술뿐만 아니라 교양과목도 가르짐으로써 단순한 기술교육이 아니라 개화 운동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YMCA 사진과는 1910년부터 5년간 3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졸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민충식 · 신칠현 등 당대 대표적인 사진가들을 배출했는데. 특히 민충식은 마술사의 모습을 코믹하게 담은 사진 등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한 사진을 남겼다. 또한 사진을 이용한 환등회를 열어 외국의 문물과 풍경 등을 보임으로써 신문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민충식.(마술사의 초상) 1930년대.



대중 속에 자리잡은 1920년대의 영업사진관

사진이 도입되던 초기에는 자연과학이나 광학 등이 아주 낯선 것이었기 때문에 사진술을 배우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고, 사진기나 재료의 수입가격이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사진의 가격이 비싸지고 일부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와 같은 정식 교육 기관이 국내에도 생기고. 재료를 구하기도 쉬워지는 등 사진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1920년대에는 수많은 영업사진관들이 생기게 되는데. 여기에는 3 · 1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이 문화정치를 표방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간과 할 수 없다.

사진을 본업으로 하는 사진사들이 늘어 나고, 그들의 고급기술이 조예 깊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한국인 사진관은 주로 종로를 중심으로 한북촌에 형성되어 있었고, 재료상은 충무로와 명동에 있었는데 주로 일본인들의 상점이었다. 당시의 영업사진관으로는 김광배의 금옥당, 박필호의 연우사진관, 민충식의 태평양사진고나 등이 유명했다. 사진관은 천공광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천정을 45도 각도로 하여 창문을 내었다. 또 배경막을 다양하게 사용했으며, 서구식 가구나 소도구들을 배치하여 촬영했다. 사진사는 모닝코트를 입고 촬영했으며, 촬영하기 전에 음악을 들려주곤 하였다.


한국인의 사진단제 - 경성사진사협회

이렇게 조금은 유화된 사회적 · 사진적 분위기 속에서 영업사진가들은 함께 모여 이익단체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사진사들은 스스로의 사진 발전과 권익 옹호를 위해, 한편으로는 일본인 사진단체에 대항하는 민족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드디어 1926년 2월 10일 ‘경성사진가협회’를 결성하게 된다.

대부분의 영업사진사들이 찬성했던 이 협회는 일본인 일색이었던 사진계에 새로운바람을 일으켰고. 여러 두드러진 활동을 통해 사진의 발전을 이루어갔다. 그들은 월 1회나 격월간으로 '寫眞講話會'를 열어 사진의 표현 방법과 예술의 문제에 대해 연구 · 발표 · 토론하였다. 또 1930년대에는 정규적인 사진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사진술 보급에 나서게 되는데, YMCA사진과를 인수하고 京城寫眞學講習院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경성사진사협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은 1936년 동아일보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유명한 신락균이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저서인「사진학개설」을 저술하고, 단편적이고 모호했던 표현 방법과 기술을 재검토하여 체계화했으며, 다양한 표현수단을 정립하여 사진의 발전을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독립사진관'과 시대적 제약

이렇게 1900년대초부터 1920년대에는 초상사진을 중심으로 하는 영업사진이 번성하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일제의 강점하에 있던 우리로서는 사진으로 스스로의 생각이나 이념을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성사진사협회가 어린이날에 무료 또는 반액으로 어린이를 촬영해 주었다거나. 박만달이 종로경찰서 부근에 있는 자기 사진관의 이름을 '독립사진관’으로 짓고.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대형 간판을 세우는 등의 소극적인 활동은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시대적 제약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민족에 대한 관심이나 일제하의 체험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발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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