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강진· 해남땅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남도답사 일번지'라 이름 붙인 그곳에 다산초당을 비롯해 丁若鏞의 유배생활과 관련한 유적들이 있다.
1801년(순조 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북도 장기에 귀양갔던 정약용은 곧바로 강진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귀양생활의 시작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순진한 시골 사람들은 대역죄로 귀양온 그에게 겁을 집어먹고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어떤 경우는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며 달아나기도 했다.
불안하고 고독한 이 시기에 그를 돌봐준 사람은 동문 밖 주막의 늙은 주모였다. '四宜齋'라 스스로 이름 붙인 이곳에서 4년 동안 지낸 정약용은 1805년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듬해 문인인 李晴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1년 반을 보낸 다음 마침내 1808년 봄 다산초당에 자리를 잡았다.
만덕사(지금의 백련사) 서쪽에 위치한 이 초당은 본래 처가인 해남윤씨 일가인 처사 尹博의 山亭이었는데, 정약용이 빌어 이주한 것이다. 그의 호이기도 한 '茶山'은 주위 산에 차가 많이 난다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초당 좌우로 東庵과 西庵 두 개의 암자를 지은 정약용은 그곳에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본격적으로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 제자 양성에 힘썼다. 540여 권을 헤아리는 방대한 저술과 실학사상의 집대성이 거의 이 11년 동안의 다산초당 유배 시기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암울했던 세도정치 시기, 관료들의 수탈과 부패는 극에 달하고 반대로 백성들은 고통에 신음해야만 했던 시절,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한국 지성사의 최고 봉우리를 이룬 정약용, 오늘날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천주교와 서양 과학에 관심 가져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경기도 광주 마현(지금의 양주군 호부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 丁載遠의 4남 2녀 가운데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한양에서 세거하였으나 고조부터 3대가 벼슬을 못하여 마현으로 이주하였으며, 부친이 음직으로 출사하면서 비로소 관직길이 열렸다.
모친은 해남윤씨로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으로 조선 후기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의 선구자라 할 수 있으며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三齋로 일컬어졌다. 경제와 실용에 관한 많은 도서를 소장했던 그는 「동국여지지도」, 「일본지도」, 「방성도」 등을 그려 정약용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한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승훈은 그의 매부였고, 역시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천주교 전파에도 공이 컸던 이벽은 정약용의 큰형수의 동생이었다. 이렇듯 그의 집안은 근기남인의 핵심 집안으로 정치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정적인 입장이었던 時派에 속하였다.
사도세자 사건으로 관직을 그만두었던 부친이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른 것을 계기로 다시 호조좌랑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정약용도 따라 올라갔다. 이듬해 그는 이가환과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遺稿를 접하고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채제공·권철신·이벽 등 주로 성호좌파의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천주교와 서양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 즈음이었다. 1779년 권철신이 주관하여 천진암과 주어사 등지에서 열었던 천주교 강학회에 둘째형인 정약전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1784년에는 큰형수의 忌祭를 마치고 마현에서 서울로 배를 타고 돌아가는 이벽과 배 안에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와 서양 과학에 관한 책과 器物 등을 얻어본 것도 이때였다.
그가 계속 천주교인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지만 1791년 신해박해, 즉, 전라도 진산의 양반 교인이었던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다 결국 사형을 당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와의 관계를 점차 끊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1783년(정조 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정약용은 이듬해 성균관생을 대상으로 한 月課에서 뛰어난 답변을 하여 정조의 눈에 들었다. 문과에 합격한 1789년 정조의 인재양성책으로 시행되었던 규장각의 초계문신에 뽑혔으며, 박지원·이덕무·이경무·박제가 등 북학파와 교류하기도 했다.
이 해부터 1801년 귀양갈 때까지의 10여년간이 그의 학식과 경륜을 세상에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문과에 합격하던 해 그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설계·건설하여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수원 顯隆園(지금의 隆陵)에 행차할 때 이용하도록 했다. 또한 1792년에는 수원 華城을 설계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벽돌로 성을 수축하면서 擧重器(기중기)와 滑車(도르래), 鼓輪(수레) 등 선진적인 건축기술을 이용하여 2년 반만에 완성시키고 경비도 4만냥을 절약하였다.
1794년 33살의 젊은 나이로 경기도 암행어사에 임명된 정약용은 각 지방을 순찰하면서 탐관오리들을 색출하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의하여 처결하였다. 탄핵 명단에는 관찰사 서용보도 들어 있었다. 지방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농민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가 개혁 사상을 구상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국왕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이가환과 함께 채제공의 뒤를 이을 남인 시파의 차세대 인물로 부각되었던 그는 남인 벽파와 노론 벽파에 의해 끊임없는 견제와 비판을 받았다. 병조참의, 동부승지 등을 지내다 1795년 금정찰방, 1797년 곡산부사로 나간 것도 천주교와 얽어매려는 반대파의 공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방관으로 나가서도 그는 자신의 생각과 이상을 실현시키려 노력하였다. 특히 2년간의 곡산부사 시절에는 군포와 환곡의 폐단을 제거하고 호적의 문란을 정리하였으며, 복잡한 형사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는 등 여러 사회경제 개혁책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저술작업 통해 독자적 사상체계 세워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죽자 노론 벽파는 이듬해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명분은 천주교 탄압이었지만 실제는 남인 시파를 정치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교인은 아니었지만 벽파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정약전·약종 두 형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 탄압으로 이승훈·이가환·권철신 그리고 셋째형인 정약종 등이 처형되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진으로 옮겨졌다.
흑산도에 귀양갔던 둘째형은 16년만에 병사하였고, 자신은 2년 뒤인 1818년 57세의 나이로 귀양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왔다. 비록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는 183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작·김매순·홍석주 등 인근 경기지역의 학자들과 정파와 학파·신분을 초월한 학문적 교류를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유배기에 이루어진 저술을 재정리하였다.
근기남인실학과 북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정약용은 방대한 저술작업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세웠다. 철학에서부터 의학·천문·지리·역사에까지 그의 학문적 관심이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었지만 핵심은 경학과 경세론이었다.
六經에서 시작하여 四書, 「소학」, 「심경」의 순서로 진행되었던 경학 연구에서 그는 한학과 송학의 성과를 집성하고 그 장점을 수용한 뒤 경전의 원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리는 經文 중심적 漢宋折 衷論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학 연구작업을 바탕으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一表二書를 저술하여 강력한 군주권에 기반한 사회경제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정약용에게 경학과 경세론은 실과 바늘처럼 밀접한 연관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그는 上帝라는 개념을 설정하여 그것이 우주와 만물을 主宰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인간의 선천적인 불평등을 부정하였다. 이는 인격적인 天을 배제하고 이기론으로써 우주와 만물을 설명하고 인간의 선천적인 불평등을 인정하는 주자성리학의 내용과는 달랐다.
“牧이 民을 위하여 있는가 民이 牧을 위하여 있는가? 민이 곡식과 피륙을 내어 목을 섬기고, 민이 수레와 말을 내어 목을 마중나가며, 민이 膏血과 津髓를 짜서 목을 살찌워주니, 민이 목을 위해서 태어난 것인가? 아니다. 목이 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듯 정약용의 개혁론은 철저하게 人民 중심적이었다. 이미 곡산부사로 부임하는 길에 자수한 민란 주동자 이계심을 즉시 석방하고 “그대와 같이 용감히 싸우는 사람을 나는 천금을 주고 사려 한다.”며 오히려 격려했던 그는 「原牧
」이란 제목의 이 글에서 백성이 통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되어버린 당시 사회를 통렬히 비판
하였다.
나아가 「湯論」에서는 “옛날에는 정치가 아래로부터 위로 실시되었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위로가 순서였으나, 지금은 그와 반대로 정치가 위로부터 아래로 실시되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위로가 반역이 되었다”며 인민주권과 인민혁명권, 사회계약설 등을 주장하였다. 상향적인 정치의 주장은 지금의 민주주의 정치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한편「田論」에서는 여전제와 정전제 등의 토지제도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여전제는 耕者有田의 원칙 아래 토지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공동 경작에 의해 공동 수확하고 수학량은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제도로 정약용의 개혁론의 꽃이었다.
정약용의 호 가운데 俟菴이라는 호가 있다. 俟는 기다린다는 뜻이다. 즉, 자신의 개혁 사상이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꼭 실현될 시대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비장하고 예언적인 호라 할 수 있다. 그 예언대로 그의 사상은 100년이 지난 뒤에야 꽃을 피울 수가 있었다.
또한 정약용의 시나 산문을 읽어보면 굶주리고 학대받는 농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에 대한 애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시대의 모순에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그 모순을 고쳐보려는 노력이 그를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었던 것이다.
아직도 국민은 안중에 없는 이 사회의 지도자들에게 그의 詩 한 수를 들려주고 싶다.
“사람과 사람은 본래 평등하건만 관리는 어째서 백성 위에 있는고? 그가 어질고도 밝아서 능히 민중의 소망에 맞기 때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