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학교 다닐 때가 좋아
요 몇 년 동안 대학가는 '전쟁 상황'이다. 4년 이상 붙들고 있었던 전공을 포기한 채 취업에 도움이 되는 '기능성' 학원에 다니거나, 기업체 입사 대신에 '고시' 라는 버거운 꼬리표가 붙은 공무원 · 교사임용 · 언론사 시험 준비로 진로를 바꾸는 등 대학 · 대학원 예비졸업생들이 취업을 위해 격전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불황의 골이 깊게 넓게 퍼져나가는 것을 우려한 기업들은 이미 내놓은 채용 공고를 취소하거나 신입사원보다 경력사원, 정규 채용보다 수시 채용 규모를 늘리면서 캠퍼스의 전쟁은 그 치열함이 더하고 있다. 엄청나게 이력서를 뿌리고 면접을 보았지만 여전히 백수 상태인 20대의 악전고투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기업 들로서도 할 수 없다는 반응이니,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목마른 실업자들이 발로 더 뛸 뿐이다.
지방대 학생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일단 뽑아만 주십시오. 제가 보증을 서 겠습니다'라며, 강단에서의 권위를 잠시 벗어 던지고 제자들의 이력서가 가득 든 두툼한 봉투를 기업체 인사담당자들에게 건네기 위해 발품을 파는 교수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취업대란 시대는 이런 진풍경 외에 긍정적인 측면을 낳고 있기도 하다. 취업 상담을 자주 갖는 과정에서 사제지간의 대화가 늘고 인간적인 교류가 크고 넓어졌다는 경험자들이 많다. 심지어 이성 문제나 개인적인 고민까지도 스스럼없이 토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최근 취업이 어렵다는 것에 겁먹은 일부 학생들이 아예 대학 졸업을 유예시켜보려는 시도가 속속 자행되고 있다. 학과에 문의하는 빈도도 크게 늘었는 데, 3학년만 마치고 해외 어학 연수를 다녀온다든가, 다시 제2전공을 잡아 이수 학점을 늘림으로써 더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하는 명분을 챙기기도 한다. 심하면 성적표에 아예 낙제점수가 하나쯤 있어서 졸업을 유예시키려는 극단의 방법도 생각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그나마 학생 신분을 유지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위안을 받으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20대들은 그래도 자신의 능력이 되는 한 적극적인 일자리 찾기에 전력투구하는 모습이다. 아르바이트 · 기업연수 등 실무 경험을 통해 일자리를 구하는 학생들도 많다. 한 전문대의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K씨는 청바지 · 캐주얼 · 여성복 등 각종 브랜드 의류회사에서 아르바이트나 무급 연수 경험을 쌓아 새로 설립한 의류회사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박씨는 '실무 경험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고, 스스로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 취업에 도움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런 '취업 한파'를 이겨내기 위해 입사 정보 교류를 통해 '서로 돕자'는 움직임도 전에 없이 활발하다. 컴퓨터 사이트에 채용 정보 커뮤니티를 만들어 친구를 포함한 몇몇이 인터넷에 뜨는 수시 채용 공고를 자료실에 모아 정보를 공유하는 형식이다. 이제 너나할 것 없이 동병상련의 처지가 된 이상, 서로 경쟁자이면서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고3은 저리 가라
취업 준비생들은 '고3' 같은 생활도 마다하지 않는다. '언론고시'를 준비중인 C씨는 용돈을 벌기 위한 과외 교습을 제외하면 영어회화 · 스터디가 하루 일과의 전부다. 올해 8월 졸업한 그는 출신대학 도서관에 9시까지 나가 자리를 잡고, 신문 스크랩 · 상식책 · 인터넷 서핑 등을 하다 보면 항상 자정을 넘겨 잠을 청하게 된다고 했다.
특히 지방대 인문계열 학생의 경우, 공무원(7급 · 9급) 시험,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재학생 · 졸업생들이 수도권 대학의 학생보다 부쩍 많다. 지방 소재 기업에 취직하지 않는 한 지방대 출신이란 약점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데다 안정성까지 고려하면 공무원 시험 준비가 가장 불확실성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호황을 누리는 곳이 바로 학원가다. 서울 노량진 학원가는 공무원 시험의 메카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최근 실업률이 높아짐에 따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계층도 무척 다양하다. 좋은 대학에서 쓸 만한 전공을 했다는 사람도 있고, 이미 수많은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물론 내로라하는 학위 소지자들도 7급, 9급 시험을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이곳은 20대뿐만 아니라 30~40대까지 합세하고 있어, 그 경쟁은 학원 접수부터 시작된다. 학원 접수, 독서실 좋은 자리 잡기, 싸고 맛있는 식당 고르기, 적당한 고시원 잡기 등 뭐 하나 경쟁 아닌 것이 없을 정도다.
청년실업은 학교 다닐 때나 평소 별 볼 일 없었던 특정한 무능력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함부로 직장 어디 다니느냐고 묻기도 어려운 시대다. 필요 없이 학교에 더 다니려는 이상심리, 배운 것을 써먹지 못하고 취업을 위해 다시 새로운 공부를 해야 하는 현실, 현재보다 덜 배워도 할 수 있는 일로 눈높이를 낮추는 서글픈 현실이 이 시대의 풍속화가 되어 오래 남는 일이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