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어 아름다운, 가족
오남매 중 막내인 서광주우체국 박미라 팀장은 친정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많은 시간을 함께하기 바란다. 팔순에 가까운 친정엄마는 여전히 막내딸과 가까이 산다. 젊은 시절 다친 허리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고생스럽긴 해도 왕성한 활동으로 ‘나이야가라’무용단 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그녀는 아직도 관절은 청춘이라며 내소사 전나무 숲길을 거침없이 걸었다. 겨울의 한 가운데 찬바람이 매섭긴 했지만 전나무 숲길에서 내뿜는 상쾌한 공기에 정신은 맑아졌다. 든든하고 착한 막내딸 부부, 또 손녀와 함께하는 가족여행은 언제나 행복한 시간이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5년 전 가족들이 함께했던 변산반도는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예전에 보았던 쌍둥이나무를 찾는 손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할머니다. 추운 바람에 노모의 얼굴이 시릴까 옷깃을 여며주는 박미라 팀장의 눈길이 어느새 깊게 패인 엄마의 주름살에 머문다.
우체국에 입사하고 첫 발령을 섬으로 받은 막내딸을 홀로 보내며 눈물 흘리던 여리고 젊은 엄마의 모습은 어느새 세월에 묻혔다. 이제는 웃으면서 추억으로 이야기 하지만 막내딸의 객지생활은 딸에게도 엄마에게도 힘든 시기였다고. 이제는 우체국에서도 집에서도 제 역할을 근사하게 해내는 막내딸이 대견하다. 채석강을 부딪혀 부서지는 날카로운 파도며 전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도 이 가족의 훈훈한 웃음에 사르르 녹았다.
유구한 시간과 자연의 신비함, 채석강
변산 여행의 1번지로 손꼽는 격포항이 오늘의 첫 여행지다. 한 걸음 한 걸음 바다와 가까워지자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갯내음이 가슴에 와락 안긴다. 무엇보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일상의 스트레스가 썰물처럼 스르르 사라진다. 차디찬 겨울바다 바람에 무언가에 짓눌렸던 머리도 맑게 깨어나는 기분이다. 뭐니뭐니해도 격포항의 장관은 채석강이다.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해식단애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어떤 예술가가 이토록 아름답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다. 채석강은 하루 두 차례 물이 빠지면 들어갈 수 있다. 썰물 때는 물 빠진 퇴적암층에 붙어있는 바다생물과 해식동굴의 신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썰물 때 해식동굴에서 바라보는 낙조와 노을 풍경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에 마음이 벅차 울렁인다. 붉게 타다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마는 해. 그 지는 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자니 삶을 사는 것, 옳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물음이 스스로에게 주어진다. 매일 뜨고 지는 해지만, 어제의 해가 오늘의 해가 아니듯, 우리의 어제가 오늘이 아니기를,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기를 기대하며 지는 해를 바라본다.
부안 채석강은 우리가 흔히 아는 큰 강이 아니고 격포항에서 격포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1.5km의 해안절벽이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아름다운 풍광에 자주 찾았다는 채석강과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지만, 해수면 아래로 보이는 암반의 색이 영롱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출된 지역인 탓에 오랜 세월 바닷물에 깎인 퇴적층은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은 듯한 웅장한 층리를 이루며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사실, 퇴적암이 빚어내는 절경은 부산 태종대와 해남 우항리 등 우리나라 해안 여러 곳에 존재하지만 이곳 부안 채석강이 특별한 이유는 수천만 년 동안 바닷물에 깎이고 남은 바위절벽 면을 이루고 있는 자갈, 모래 등의 켜(층리)가 수평으로 길게 이어지지 않아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겹겹이 쌓이고, 구불구불 휘어진 채석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유구한 시간과 자연의 신비함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부디 우리 삶의 켜도 단단해지기를.
소박하고 아름다운 천년고찰, 내소사
내소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겨울 차디찬 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내소사 전나무 숲은 푸르고 청정하다. 전나무 숲길은 사찰 앞까지 600여 미터 이어진다.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다시 복구하는 일이 반복됐으나 입구가 여전히 삭막했고, 이런 삭막함을 달래기 위해 150여 년 전 일주문에서 사천황문에 이르는 길에 전나무를 심었다. 이렇게 조성된 내소사 전나무 숲은 광릉수목원, 오대산 월정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으로 꼽힌다. 일주문에서 경내에 이르는 거리는 마음의 먼지를 떨고 부처의 세계로 가는 마음을 가다듬는 데 필요한 만큼이라고들 하는데, 내소사 전나무 숲길이야말로 그 말을 실감하게 한다. 더없이 고요하고 맑은 숲길을 걷노라니 무뎠던 몸의 세포들이 일제히 살아나는 듯 청량한 기운이 파고든다.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의 ‘소소래사’다. 고려 때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 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가 중건했고 고종 때 관해선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지는데, 조선 인조 때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사미승의 장난으로 나무토막 한 개가 부정 탔다 하여 이를 빼놓은 채 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전히 내소사를 찾는 사람들은 당시의 흔적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기도 한다고. 보물 291호 대웅보전은 나무로 지어졌다. 화려한 단청이 있거나 커다란 건축물은 아니지만 고즈넉한 매력이 아름답다. 정면 여덟 짝의 꽃무늬 문살은 나무를 깎아 만들 수 있는 조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색은 모두 지워졌지만 연꽃, 국화, 모란 등 꽃무늬가 문살에 섞여 있는 모양은 그대로다. 대웅보전 법당 안 부처님을 모신 불단 뒤쪽에는 벽 전체 가득 백의(白衣)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백의관음보살좌상 중 가장 크고 하는데, 이 관음보살의 눈을 보고 걸으면 눈이 따라오고, 그 눈을 마주치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여 새해 소망을 원 없이 빌어본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지은 유홍준 교수는 한국의 5대 사찰 중 하나로 내소사를 꼽았다. 건물 자체보다 산과 어울리는 조화로움을 매력으로 꼽았다. 자연과 어우러진 소박하고 고졸한 멋, 사람들이 내소사를 찾아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길이가 제각각 다른 24개의 기둥을 가진 내소사 봉래루 앞에는 수령 300년으로 추정되는 보리수나무가 있고 수령 1000년이 넘은 당나무가 마당을 지키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나무’로 불리는데, ‘할머니 당산나무’는 일주문 입구에 있다.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이면
‘할아버지 당산나무’ 앞에 내소사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당산제를 지낸다.
내소사는 트레킹 템플스테이로도 유명하다. 트레킹 템플스테이는 사찰에 머물면서 산과 계곡을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프로그램. 내소사 트레킹 템플스테이는 내소사를 출발해 직소폭포, 제백이고개, 관음봉 삼거리, 전나무 숲을 거쳐 다시 사찰로 돌아오는 코스다. 휴식형 템플스테이도 있다. 새벽 예불과 공양만 참여하고 자유롭게 템플스테이를 경험할 수 있다. 산사에서 느끼는 고즈넉함은 삶에 대한 많은 생각의 기회를 준다. 지나온 날과 살아갈 날들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부처가 되어 깨달음을 얻지 못해도 좋다. 하루쯤 삶에 대한 깊은 생각만으로도 이미 삶의 깨우침에 한걸음 다가섰을 테니 말이다. 맑은 공기, 적막하고 고즈넉한 가운데 느끼는 삶에 대한 생각… 내소사에서 이 겨울 그 생각이 미치다.
여행정보
부안 변산반도는 3면이 바다와 접해 있다. 예부터 차진 갯벌에서 잡히는 백합이며 바지락이며 조개를 이용한 별미가 많았다. 바지락죽도 이 지역의 별미 중 하나다. 바지락 죽을 먹으러 가면 바지락초무침이나 바지락전 등 다양한 바지락 요리도 함께 맛볼 수 있다. 초무침의 남은 양념에 참기름을 넣고 슥슥 비벼먹는 비빔밥도 일품이다.
★ 내소사 템플스테이 : www.naesosa.org. 063-583-3035
★ 묵을 곳 : 격포항 주변에 채석리조텔오크빌(063-583-8046), 채석강스타힐스호텔(063-581-9911), 대명리조트 변산 (1588-4888), 펜션노을빛언덕(063-581-6622) 등
★ 먹을 곳 : 바지락죽 변산온천산장(063-584-4874)과 계화회관(063-584-0075), 곰소젓갈정식 곰소쉼터(063-584-8007)
★ 채석강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로 231. 063-582-7808
★ 내소사 :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063-581-3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