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시간 여행
정해놓은 목적지도 없이 이미 나있는 아스팔트길을 통해 밤길을 달린다. 생각을 나누며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과 공간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있다고 하여도 그곳으로 가지는 않을 터. 무작정 길 위에 자신을 얹고 일어나는 상황을 맞고 싶다.
이미 나 있는 길을 좇아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밟으며 무작정 밤길을 달린다. 길 아닌 곳을 다닐 수는 없지만 이미 난 길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는다. 급커브길인지, 평탄한 길인지, 낭떠러지로 급강하하는 길인지 모르지만 차는 나아가면 갈수록 앞으로 달린다. 어둠이 열리고 헤드라이트 불빛 아래 작게 길이 보인다. 길을 따라 내가 달린다.
검은 장막을 걷고 가녀린 헤드라이트 불빛에만 의지하여 가는데, 갑자기 도로도 끊어지고 헤드라이트도 깨지고 속도는 멈출 수 없는 지경에 닿는 것은 아닐까. 다시 짜고 풀고 다시 짜고 풀고 다시… 페넬로페, 낮에는 베를 짜고 밤에는 그 짠 베올을 풀기를 무한 반복하는 허사와 도로(徒勞)의 신, 삶의 설계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음일까. 다 헛되고 헛된 일일까. 그런 쪽으로 마구 자신을 몰고 가는 것은 아닐까.
멀리 담수호의 불빛이 따뜻하다. 돌아가야지. 길을 따라 다시 돌아가야지. 마흔넷, 이제 턴해야지. 처음 광포하게 출발한 이 길은 내가 가고자 한 길이 아니므로 다시 돌아가 천천히 평균속도로 다시 시작해야지. 쉽게 상처받고 쉽게 토라지는 나이지만 나는 누가 뭐라해도 나의 모습이 있는 것, 에너지가 없어도 내가 가진 장점은 또 얼마나 많은가.
쉰 살까지 남은 시간 동안 급경사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든 생각들을 현실화해야지. 내 길을 만들어야지. 우리 가족 땅 위에 아름답게 사는 흙의 길을 다시 만들어야지. 말, 소 키우며 누구나 와서 아스팔트 도회지에서 쌓인 조급함, 두려움 가리앉힐 편안하고 넉넉한 산의 품을 만들어야지. 다시 땅을 처음처럼 가꾸어야지.
그래서 다시 문제는 나 자신이다. 나의 문제다. 내 안에 무수히 많은 페넬로페와 싸워야한다.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쉼 없이 움직이는 쪽으로 자신을 놓을 것, 가족 구성원의 생각과 행동은 다 나름의 의미가 있는 법, 강요하지 말며 강요되지도 말며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기다리면 그들도 나도 비로소 자유롭고 괴로움 없는, 태어날 때부터 발가벗고 순수한 마음 하나로 태어났듯 그 근원의 모습을 알게 될 터.
자,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한나절 실종된 아빠에게 치근대며 엉겨 붙는 아이들과 뒹굴며 껴안고 잠이 든다. 약해지지 말아야지. 페넬로페, 또 다른 페넬로페를 만들어야지. 순수와 생태와 자연의 마음을 되풀이 직조하는 그 무한의 몸짓으로 나와 내 가족과 내가 꿈꾸는 저 열린 공간의 주춧돌을 세워야지. 꿈이 달다. 그러니 어서 오라. 고난이여 역경이여, 나를 단련시킬 사특한 모든 어둠이여.
땅은 트임의 공간. '트임'은 어떠한 속 좁음도 포용한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는 사람이다. 그 매개자, 천지간의 자식인 내가 이렇듯 길 아닌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닌 아스팔트에서 광포한 어둠에 시달리다가, 집에 돌아와 다시 평온의 길을 찾아 단잠을 잔다. 내 딛고 있는 땅에서, 가족과 함께 먹고 살 곡식 나는 땅에서 불어오는 저 따뜻한 온기로 헤매다 돌아온 내 볼의 한기를 데운다.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