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시간 여행
1975년 여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훈택이가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한참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갑자기 성애가 이쁘게 보이기 시작한다.'
친구의 너무나 심각한 표정 앞에 나는 약간 긴장하였다.
'야, 니가 얘기 잘해서 성애가 내일 학교에 나오게 해줬으면 좋겠다.'
'내일은 일요일인데, 왜?'
'조용히 솔밭을 거닐며 얘기나 하게.'
나는 너무도 진지한 훈택이에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친구의 특사 자격으로 성애에게 달려가 전후사정을 말하고, 화장실 옆에서 훈택이와 성애가 상면하게 하였다.
'성애야, 내일 학교에 나와서 얘기 좀 할 수 있겠니?'
'글쎄 뭔지 모르지만 차비가 없어서 못 나올 거 같애.'
'그럼 내가 차비 줄게, 나와!'
'그래? 그럼 줘봐.'
'자, 받어.'
훈택이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50원을 꺼내 건네주었다. 성애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 들고는 '알았아 내일 보자' 하고는 교실로 사라졌다.
그 날 훈택이는 연신 싱글벙글하면서 보무도 당당히 하교하였다.
다음날 일요일이었다. 나와 훈택이는 성애가 올 때를 기다리며 학교 도서실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러나 훈택이의 간절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성애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훈택이는 조용히 성애를 불러서 따지듯 물었다.
'미안해. 운동화를 빨아서 신고 올 신발이 없어 못 나왔어.'
'야, 그럼 어제 준 오십 원 다시 내놔!'
'자, 여기 받어.'
성애는 오십 원을 건네주곤 획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 후 성애와 훈택이는 졸업 할 때까지 만나기만 하면 아옹다옹하며 지냈다.
30년 전 달빛에 물든 신화처럼 아련하기만 한 기억 속 한 풍경, 지금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번지는 박하 향 같은 추억! 졸업 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친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덧없이 흘러간 옛 추억을 되작이고 있는 걸 보니,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