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막막한 심경으로 먼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 뉴에이지 음악을 하루 종일 틀어놓고 꼼짝하지 않을 때, 백사장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가슴안에 파도소리를 가득 담을 때, 혼자 여행을 떠난 외딴 골짜기 밤새 귓전에 부서지는 바람의 포효에 잠 못 이룰 때, 비 오는 거리에서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성일 때.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폭풍우 속을 맨발로 달려 길 없는 길, 그 아득한 거리를 끝없이 가고픈… 그리하여 새벽이 부옇게 다가오면 비로소 후줄근해진 자신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끼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혹은 세상의 끝을 경험하고픈… 고통의 극단을 경험하고픈…
괜찮아요, 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내가 맨발로 어둠의 강을 건널 때 나에게 다가와 그녀가 말해준다. 온전하리라 믿었던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집안에 칩거하던 나날이었다. 스무 해의 시간들이 십자가의 파편처럼 조각나버린 상실감. 무기력한 시간들이 흘러간다. 살다 보면 더한 일도 겪어요.
그녀가 말한다. 틈틈이 반찬을 해서 가져다주며 힘내라고 격려하던 그녀가 어느 날 유방암 투병을 한다는 사실에 따뜻한 밥 한 끼 사주고 싶었다.
우려와 달리 그녀는 마지막 항암 치료가 남았다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머리카락이 빠진 그녀를 위해 모자를 준비한 일이다.
그녀는 무척 기뻐한다. 오히려 내가 위로받는다.
어두운 시간을 뚫고 밝은 빛을 향해 비상하는 새가 보였다. 그 후 그녀의 완치 소식을 전해 들으며 내 가슴 속으로 그 새가 날아 들어온 느낌이다.
때때로 어두운 과거의 기억이 나를 지배할 때, 오래된 상처가 불쑥 뚫고 나와 힘겨울 때 “괜찮아요, 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라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운다. 꽃이 피었다 지고 소리 없이 계절이 가고 먼 곳에서 바람이 잦아든다. 살아가면서 힘겨운 일과 맞닥뜨리면 늘 그녀의 말이 살아나 속삭인다. 내가 깊은 강을 홀로 건너갈 때 절망의 벌판에서 허덕일 때 그녀는 폭풍우에도 끄떡 않는 한 그루 커다란 나무가 되어 말없이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