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한참을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어떤 영상, 혹은 메시지들. 나에겐 십여 년 전 받았던 어느 편지가 그랬다.어느 날 군대에서 온 편지. 남도 끝자락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란 나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함께 다녔던 절친한 친구에게 온 편지였다. 서울로 이사 오는 바람에 다른 친구들과는 연락이 서서히 끊겼지만 마음이 맞은 탓인지 대학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도 친하게 연락하는 친구다. 편지를 받은 날은 1월의 어느 추운 날이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습관처럼 열어보던 우편함에서 발견한 편지 한 통. 굳이 손으로 직접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들을 전할 수 있었고, 이메일과 휴대폰 번호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연락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손편지 한 통이 낯설게 느껴졌었다. 편지는 강원도 철원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스물한 살. 군에 입대한 친구는 강원도 철원의 철책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6개월 동안 밖에 나가지 못하고 철책에만 있어야 한다며 그 안의 풍경들을 또박또박 정갈한 글씨로 전하는 친구의 편지에서는 감수성이 가득 묻어났다. 일상의 사람들이 전혀 살지 않는 전방의 하늘이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그 하늘을 바라보며 느끼는 세상의 고뇌를 전부 짊어지고 있는 듯한 우울함을 함께 토로했다. 적막한 철책에서 홀로 견뎌내야 하는 외로움과 그 안에 엉켜있는 수많은 감정이 짧은 편지글에서 쏟아져 나왔다. 글 끝자락에서 발견한 ‘이제야 달력이 또 한 장 넘어간다’고 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군대 가더니, 철학자가 다 됐구나’하고, 잠시 중얼거렸던 기억도 난다.
스물한 살의 친구는 그 외딴곳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치열하게 삶을 고민했던 걸까. 내가 답장을 어떻게 보냈었는지 딱히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는 그 이후에도 종종 편지를 보내며 군대 생활의 애환을 토로했다.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자신이 꿈꾸던 미래를 위해 전공을 바꿨고 이후에는 유학을 떠났으며 지금은 결혼을 해 따뜻한 가정을 꾸렸다.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지금의 친구를 바라볼 때면, 종종 군대에서 보냈던 그 편지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시간들이 지났기에, 지금의 모습도 있는 것이겠지. 그때 그가 느꼈던 막막함들이, 아마도 지금의 삶을 더 윤택하게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이겠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