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였다. 1년도 채 되기 전에 OECD 선진국 클럽에 가입을 하고 마치 선진국이 다된 것 처럼 착각에 빠졌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처지가 안타깝기 짝이 없다. IMF에 구제금융 신청을 하였다는 것이 대단히 부끄러운 일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IMF에 구제신청을 하였다고 하여 우리나라가 후진국이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답답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외환 사정이 3일짜리콜자금을 빌려 쓸 만큼 다급 하였던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우리나라의 무역수지 적자가 203억달러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될 만큼 심각하였는데도 정치권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허세를 부렸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분명히 강조해야 할 일은 우리가 설령 긴급 자금을 쓸 만큼 잠깐 어렵게는 되었지만, 우리 경제가 태국이나 말레이지아와 같이 약한 경제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경제는 세계에서 11번째로 큰 경제이고, 무역도 세계에서 12번째로 많이 하고 있는 나라이다. 잠시의 착각으로 몇 년 동안 흥청거린 결과가 이런 부끄러운 일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우리나라의 성장 잠재력이 손상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우리 국민들의 건전한 근로의식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민족만한 저력을 가진 민족은 이 세상에 우리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35년 전 우리나라가 처음 경제 발전을 시작하였을 때 1인당 국민 소득은 100불을 채 넘지 못했다. 그러나 1996년에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은 1만불을 훨씬 상회하였다. 30여년만에 자기 나라의 국민소득을 100배 이상 키운 민족은 전세계에서 과거에도 우리밖에 없었고, 미래에도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100불, 200불 소득으로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였을 때, 필리핀과 레바논은 각각 아시아의 진주, 중동의 진주로서 그 지역에서 가장 각광받는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들은 어떠한가. 현재도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더 강하고, 훨씬 더 큰 나라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잠깐 가졌던 허상을 미련없이 버리고, 원칙으로 돌아가서 성실하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리고 하여야만 한다.
리스트럭처링이란
그렇다면 오늘의 주제인 리스트럭처링(구조조정)과 관련하여 우리 경제가 어렵게 된 원인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비즈니스위크지는 최근호에서 추락하는 아시아 경제를 분석하면서 한국 경제 난국의 원인을 분석한 적이 있었다. 그 기사에서 비즈니스위크지는 한국 경제의 어려움으로 첫째, 무분별한 사업 확장, 둘째, 기업간의 중복 투자, 셋째, 경영자들의 능력 부족, 넷째, 비탄력적인 노동시장 등을 들었었다. 이러한 지적 중에서 첫째와 둘째, 즉, 무분별한 사업 확장과, 기업간의 중복 투자가 리스트럭처링과 관계가 있다.
리스트럭처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명확한 예가 있다. 그것은 곧 젝웰치 회장으로 유명한 제너럴일렉트릭사이다. 젝웰치 회장은 신임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세계에서 1, 2등이 될 수 없는 자사내의 계열회사들을 과감히 정리하였고, 세계에서 1, 2등인 회사들로 GE그룹이 아닌 회사들을 사들였던 것이다. 이 예처럼 극명하게 리스트럭처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예는 없다고 생각한다. 리스트럭처링이란 '자기가 최고로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자기 최고의 노력을 집중화시키는 전략' 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 그룹들은 '재벌' 이란 단어를 들을 때 쉽게 연상되는 것처럼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하였었다. 이 전략은 도덕적 판단과는 무관하게 지금까지 우리나라 경쟁 환경에서는 대단히 현명하고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재벌들은 금융권에서 자금을 빌려 쓴다는 것이 다른 중소기업에서처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자금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둘째, 복잡한 행정 법규는 다른 국내 기업들의 시장 진입을 억제함으로써 자연적인 반독점 상태를 만들어 주었으며, 셋째, UR 이전의 국내 시장은 외국 기업들이 자유스럽게 유통 활동을 못하게 함으로써 대기업의 독점적 위치를 유지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대기업들로 하여금 자기가 판매하는 제품 가격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자기가 판매하는 제품 가격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을 때, 어떻게 이익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같은 원리로 이익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는 대기업이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국내 경쟁 환경은 UR이라는 사건을 통해 근본부터 변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UR의 정확한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다. UR이란 이제 국내 시장에서조차도 국제 시장에서와 똑같이, 세계 최고의 기업들과 품질과 가격면에서 직접 경쟁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국내 시장에서만은 자기들 마음대로 물건의 가격도 결정하였고, 제공되는 품질 수준도 자기들이 적당하게 결정하였던 것이다. 자연히 품질은 떨어지고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반무풍지대의 시장에 외국 기업들이 UR이란 태풍으로 갑자기 뛰어들게 된 것이다. 비교적 편안한 장사를 하던 대기업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순간에 어떻게 과거와 같은 문어발식 확장이 통할 수가 있겠는가.
집중화의 전략
이제는 리스트럭처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되었다. 세계 최고의 기업들과 싸워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그들과 비슷한 경쟁력 또는 우월한 경쟁력을 갖는 길밖에 없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크다고 하지만, 세계 대기업들에 비하면 크기의 면에서도 기능의 면에서도 아직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자기보다 큰 기업과 싸워서 이기는 길은 무엇이 있겠는가. 거기에는 명확한 답변이 있다. 그것은 곧 '집중화의 전략' 이다. 곧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자기의 온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곧 리스트럭처링인 것이다.
여기에서 외국의 예를 하나 더 들어 우리 기업들의 지금까지의 사업방식을 반추해 보고, 그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하자. 영국의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Ae)가 현재 우리 기업들에게 좋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BAe는 지난 1977년 노동당 정부가 영국내 항공 관련 업체들을 합병 하여 설립한 거대한 국영회사였다. 국영회사답게 BAe는 대단히 보수적인 경영을 하여 왔고, 1981년 보수당 정부가 들어선 이후 민영화가 되 었지만 BAe는 국영기업 시절의 경영방식을 떨치지 못하였다. BAe의 이러한 극도의 안정 위주의 경영 때문에 그 회사는 동종 외국 기업에 대해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손실에 대한 경영진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을 보장하며 자율 경영을 독려하는 조치를 내렸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하였고, BAe는 우리나라 기업들과 비슷한 경영방식을 채택하였다. BAe 경영진들은 당시만 해도 건실했던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자동차 그룹인 로버를 비롯한 다른 사업체를 인수하였고, 그밖에 부동산을 매입하는 등 사업 확장에 열을 올렸다. 또한 민간항공기사업을 확장하였고 해외사업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 결과 BAe는 급격한 외형 성장을 이룩하는 등 큰 사업 성과를 거두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확대경영(우리 기업들의 공격경영 또는 사업 다각화와 비슷한 의미임)의 후유증이 드러나고 BAe의 경영에 적색 경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외부 경영 여건도 불리해지면서(해외 수주 감소)이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자동차 계열인 로버는 적자를 내면서 모회사인 BAe의 재무구조를 어렵게 만들었고, 과도한 부동산은 이 회사의 현금 흐름 상태를 악화시켰다(우리 기업들의 현재 환경과 너무 비슷함에 유의 바람).
결국 BAe 경영진은 대대적인 리스트럭처링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재무구조의 악화 주범인 로버 자동차를 1994년 독일의 BMW에 매각하였다. 그리고 민간항공기사업 부문의 투자비용을 극소화하기 위해 대만과 전략적 제휴를 시작하였다. 또한 부동산 보유 규모도 가능한 한 축소하였다. 이러한 리스트럭처링의 결과, BAe는 지난 1993년부터 긴 적자의 터널을 지나 흑자를 내기 시작하였고, 주가도 1992년 하반기의 1파운드 수준에서 1996년 1월에는 약 8파운드로 급상승하였다.
지금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행태와 너무나 흡사한 BAe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지금 상당히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해법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많은 해법을 갖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 해법 중에 적절한 해법을 선택하여야 할 시기이고, 과감히 이를 악물고 그것을 시행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통신시장 개방에의 대비
통신시장의 경우에도 지금의 제한된 경쟁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통신시장의 완전 개방도 2~3년 뒤로 금방 다가왔으며, 통신기자재에 대한 수입은 무관세로 전세계 모든 시장에 자유스럽게 드나들게 되었다. UR내의 '정부조달 협정'은 정부 또는 정부투자기관이 약 5억원 이상의 물품 구입 또는 약 165억원 이상의 건설 계약시에 외국 업체에게도 내국 업체와 동일하게 입찰시장을 개방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통신시장이 개방되면 외국의 통신업체가 국내에서 자유스럽게 통신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이때가 되면 한국통신의 통신 라인을 의무적으로 외국 기업체에게 빌려 주어야만 한다. 만약 이렇게 제공되는 한국통신의 통신망을 통해 AT&T 또는 NTT가 우리나라에서 자유스럽게 그들의 품질과 서비스로, 그리고 국내 시장 잠식을 목적으로 책정한 그들의 가격으로 우리나라에서 통신사업을 시작하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그때 우리나라 통신업자들은 무엇을 제공함으로써 우리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한국인들이 제공하는 통신 서비스를 사용해 달라고 설득 할 수 있겠는가.
깨끗한 통화 품질, 다양한 서비스, 저렴한 가격, 친절한 고객 응대 등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 모두가 미래 통신 시장에서의 경쟁은 이제는 우리끼리의 경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큰 것과 싸 워 이기기 위해서는 작은 우리끼리 뭉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서로 공생할 수 있도록 경쟁해야 할 분야는 서로 경쟁하지만, 서로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분야는 서로 합작하여 비용을 절감하고, 각자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그 절 약된 비용을 실효성있게 투자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