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는 홍콩의 유명한 호텔 체인인 ㄹ호텔의 홍보 담당자이다. 전형적인 홍콩의 커리어 우먼으로 짧은 커트 머리, 빠른 말솜씨, 자신있게 받쳐 입은 미니스커트 차림새가 보기 좋다. 내게 더욱더 매력있는 것은 에이미의 무다리이다. 날씬함과 거리가 먼 그 다리는 힐러리로댐 클린턴처럼 대지를 든든하게 딛고 서 있다.
에이미를 알게 된 것은 홍콩 식당의 새로운 시도를 취재하면 서였다. 에이미가 일하는 호텔에서는 손님을 끌기 위해 광둥(廣 東) 요리의 대표격인 딤섬을 온갖 동물 모양으로 아기자기하게 만들고 있었다. 에이미는 한국 취재팀이 당장 손님을 떼로 몰아 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데도 최선을 다해 지원해 줬다. 취재 첫날 주방장을 인터뷰하고 딤섬을 먹는 손님들을 찍었다. 그러나 주방이 너무나 바빠 전체 스케치를 할 수가 없어 우리는 다시 한 번 촬영을 해야 했다. 그래서 다음날 새벽 주방이 한가한 틈을 타서 스케치를 하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6시 반, 졸음이 쏟아지는 눈을 비비며 '내 팔자야' 하면서 주방에 들어섰다. 그런데 에이미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환 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 팀을 맞는 것이다. 전날 이미 중요한 부분은 촬영을 하고 보충 촬영을 하는 날이라 나는 에이미가 와 있을 것이라 곤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도 에이미는 철저한 직업 정신을 발휘하며 그 자리에 있었다.
촬영을 하는 동안 우리는 어제보다 훨씬 더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에이미의 나이는 27살, 대학을 졸업하고 호텔 홍보업에 뛰어들어 이제는 명실공히 베테랑이 되었다. 그런데 에이미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서서히 놀라기 시작했다.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또 모든 화제에 막힘이 없었다. 잡식, 잡학 분야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대적할 이가 없다고 자부해온 나인데 에이미와는 막상막하였다. 에이미는 “퓨전 푸드는 어디까지나 한 번 시식삼아 먹어보는 음식”이라고 일가견을 피력했고, 일본 초밥 스시 역시 중국 요리로부터 기원한다는 사실을 말하며 역사적 사건을 열거했다. 한 마디로 경제 · 사회 · 정치 전반에 걸쳐 모르는 것이 없었다.
에이미는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한국이 IMF로 온 국민이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를 똑 부러지게 분석했다. 또한 한국이 진정한 민주화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청산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 역시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는지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3김을 비롯해 노태우· 전두환 · 박정희는 물론 이인제 · 박찬종 등등도 거론하며 신나게 이야기했다.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다 나는 마치 한국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에이미는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아무개이고, 영국 총리가 누구인 것은 알지만 조연급 내지는 한물간 사람까지 기억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그러나 에이미는 홍콩도 아닌 한국의 역대 대통령 이름은 물론 한물 간 정치인 이름을 그것도 '풀네임'으로 주르르 꿰고 있었다. 솔직히 우리보다도 우리 문제를 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놀라워하자 가이드를 맡아주던 강선생이 옆에서 “홍콩 애들은 다 이렇게 똑똑해요. 특히 여자들은 - ” 하고 거들었다.
나는 에이미에게 어떻게 해서 한국에 대해 그렇게 풍부한 지식을 갖게 되었느냐고,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에이미의 대답이 놀라웠다. 한국에 대해서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호텔 고객의 나라라면 모두 공부하자는 게 원칙이에요. 그리고 각 나라의 역사와 언어를 공부하는 게 재미있구요. 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참 좋은 사람, 화제가 풍부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이렇게 딴딴하고 야무진 에이미에게 그럼 당신의 역할 모델, 즉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에이미가 즉각 대답했다.
'재키 찬! '
사실 나는 몹시 놀랐다. '재키 찬? 진짜 재키 찬, 액션 스타 성룡? '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자 에이미는 신이 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키 찬은 정말로 훌륭해요. 그는 오랫동안 홍콩의 초등학교에 헌금을 했어요. 그래서 정말 많은 초등학교에 수영장이나 훌륭한 실험실이 생겼지요. 그래서 재키 찬은 마침내 홍콩의 유명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어요. 멋진 일이지요. 학위 수여식이 있던 강당은 주인공이 주인공인 만큼 발 디딜 틈도 없었어요. 재키 찬은 아주 짧은 연설을 했어요.
'지금 이 강당에 계신 분 가운데 저보다 학력이 낮은 분은 단 한 분도 안 계실 겁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중퇴했습니다. 너무나 가난해서요. 언젠가 내가 돈을 많이 벌어 때가 되면 원 없이 공부하겠다고 어린 시절 결심했었죠. 저는 열심히 일했고 또 운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머리에 들어가지를 않더군요.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여러분, 특히 학생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학생이라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세요'라고요.
저 역시 책에 있는 것이 어디 가나요라며 공부하기 싫어했던 홍콩의 중학교 아이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신나게 놀았지요. 물론 그 생활도 좋았지만, 지식이야말로 재산이죠. 저는 제 인생에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을 그 짧은 연설을 듣고 결심했어요. 인생의 가장 큰 투자는 바로 공부하는 거죠.”
앎, 지식, 정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이보다 더 유용한 수단은 없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에이미는 공부하고 있다. 이것이 젊은 날의 에이미만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