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좀 잘해줘.” - 고등학교 동창의 부탁이다. 그 친구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소식이 끊겼다가 참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나는 부잣집 딸' + '공주표'라고 이마에 써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친구였는데, 우리는 다른 대학에 가서 그만 소식이 끊겼다. 나는 몇 사람 건너 그애가 준재벌쯤 되는 집 남자와 중매 결혼을 해서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원래 공주의 삶은 기구한 법. 모든 것을 갖췄으나 사랑이 결여되었던 그 결혼은 10년만에 깨지고 말았다. 이혼한 공 주는 현실에 눈을 떴다. 먹고 사는 것은 걱정 없었지만 미래가 불안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취직을 한 것이었다. 물론 나이에 비해서 만족한 일자리는 아니었지만 주부 외에는 경력이 없는 그애로서는 꽤 잘 잡은 직장이었다.
일하는 데 재미가 들린 그애는 다른 부서로 이동하기를 원했다. 친구인 내가 자기 회사의 높은 사람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알고 일종의 힘 좀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로서는 친구의 일이고, 그애가 이혼을 하고 새 길을 모색하는 만큼 무슨 일이든 도와주고 싶었다. 기회가 오면 자연스럽게 아무개가 내 친구인데 꽤 괜찮은 아이라는 말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 높은 사람의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물론 부인 역시 나와 안면이 있었다. 직감적으로 일이 꼬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렇지만 굳이 숨길 일도 없어 그애가 내 고등학교 친구이고, 그 와중에 우정을 발휘해 꽤 괜찮은 아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부인의 반응이 뜨악했다.
“네, 전여옥씨가 친구라는 이야기는 전부터 그분한테 들었어요. 그런데 지난번 어느 모임에서 그분과 제 남편이 우연히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글쎄 사람들이 다 있는 데서 '이번에 유럽 본부장으로 가시게 됐다면서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희 남편이 얼마나 곤란했는지 몰라요.'
그 말을 듣고 나 역시 놀랐다. 그분이 유럽 본부장으로 간다는 이야기는 나도 듣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한테 그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인사라는 것은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제 친구에게 한 적이 전혀 없는데요.” 하고 변명 비슷한 말까지 했다.
머리 좋은 그분의 부인은 '물론 저도 알아요. 제 잘못인데요. 글쎄, 저랑 아주 친한 친구와 그분이 같은 모임에 나가요. 제가 그 친구에게 우리 남편이 유럽으로 갈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를 했지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그 이야기를 그분에게 했고, 그분은 회사 사람들 많은 데서 그 얘기를 한 거죠. 사실 완전히 결정된 일도 아닌데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저희 남편이 건방지다고 생각했겠어요.”라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내 친구가 좋은 부서로 가는 것은 완전히 물 건너간 이야기가 되었다. 게다가 그 직장에서 꽤 영향력을 가진 남자와 그 부인의 눈 밖에 났으니 말이다. 내 친구를 포함해 말을 옮긴 두 사람은 다 전업 주 부를 하다가 첫 직장으로 그 회사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을 전한 두 사람이 다 '조직의 쓴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큰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원초적 본능' 이 발동하는 몇 가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입조심의 본능이다. 할 이야기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에 대한 직감이 입력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사 문제이다. 인사는 그 회사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 우리 회사의 권력 관계를 나타낸다. 인사의 축이 어떻게 디자인되었는가는 이 회사에서 누가 가장 힘을 쓰고 있는가 하는 표시이다. 인사는 앞으로 적어도 2년 동안 그 회사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하는 방향을 나타낸다. 그런 만큼 치열한 권력 관계의 바둑놀이이다. 당연히 최후의 순간에 뒤집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인사에 대하여 만큼은 이렇다. 하는 추측조차도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다.
괜히 아는 척하고 싶고, 친밀함을 과시하기 위해, 때로는 내가 그래도 회사 안에서 정보 꽤나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인사 문제'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사 문제는 입에 올려서 득이 되는 경우보다 해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백해무익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인사가 물을 먹는 좌천인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승진인 경우도 그렇다.
내 친구에게 이른바 '인사 비밀'을 무심코 이야기한 그 상사 부인의 친구는 사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이것은 화제로 삼을 말이냐, 아니면 절대로 전해 서는 안되는 말이냐' 정도는 쉽사리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쩌다 주변 사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면 내 선에서 끝을 낸다. 그 사람이 나한테 이야기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 '보도성 발언' 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대책 없는 이들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기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결국 말을 쉽게 옮기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게 되면 그는 끝이다. 사람들은 절대로 어리석지 않다. 한번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경우는 오로지 '방송할 필요성' 이 있을 경우 뿐이다. 결국은 '방송용 내지' '광고용'으로 이용당하는 것이다. 입조심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이런 불이익이 온다는, '조직의 쓴맛'을 본 사람들은 체험을 통해 이 '원초적 본능'을 습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