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의 천년고도, 경주 마실
경주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왕경(王京)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신라 천년의 시간은 문화유산으로 남아 경주를 ‘노천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국보 33점부터 보물 83점, 사적지는 77곳이나 되고 국가지정문화재도 316점에 이르며, 고분 역시 수백 기나 된다. 한국 전통 건축물과 중요한 불교 유적을 간직한 곳으로 평가받아 2000년 12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경주 역사 산책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을 간직한 우물, 경주 나정(사적 제245호)에서 시작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가 세워지기 전 경주지역 일대는 6개의 촌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고허촌의 촌장인 소벌공이 어느 날 양산 기슭의 우물가의 숲 속에서 하얀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자 그 말은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커다란 알 하나가 남았다. 촌장은 그 알을 깨뜨려 보았고, 신기하게도 그 속에서 남자아이가 나왔다. 하늘이 보내준 아이라 여긴 촌장은,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고, 빛으로 세상을 다스리라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지었다. 이렇게 자란 박혁거세는 13살이 되던 해인 BC 57년, 왕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세웠고 그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지었다. 이것이 천년고도 신라의 시작이었다. 경주 나정에는 조선 순조 2년(1802)에 세운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와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 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 건물지, 배수로 등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닮은 대릉원 고분. 품에 안기면 삶의 위안을 얻을 것만 같다.
가을꽃이 만발한 첨성대. 선인들의 뛰어한 감각과 기술력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생과 사, 현재와 과거의 교차로
신라의 태동을 상징하는 곳이 경주 나정이라면 황남동에 자리한 대릉원(사적 512호)은 경주 곳곳에 산재한 왕릉들을 대표하는 곳이다.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에서 이름 지어진 대릉원에는 23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연못가에 자리한 쌍둥이 무덤 황남대총은 높이 23m, 남북 길이 120m, 동서 직경 80m로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이다. 황남대총의 남쪽은 남자, 북쪽은 여자의 무덤으로 이 남녀는 부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된 천마총이다. 사실 천마총은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리허설처럼 먼저 발굴했던 것이었다. 규모가 큰 황남대총보다 천마총이 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 신천마도(국보 제207호)를 비롯해 천마총금관(국보 제1888호) 등 11,5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릉원의 크고 작은 고분들은 다양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부드러운 고분의 곡선을 잘 감상할 수 있게 조성된 대릉원 길은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고분 사이로 일출을 볼 수 있어 색다른 일출지로도 유명하며, 밤에는 은은한 조명으로 아름다운 야경을 선사한다.
시간을 뛰어넘은 신라인의 지혜
대릉원에서 느릿한 걸음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인 첨성대(국보 제31호)에 이른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첨성대는 아름다운 외형과 과학적인 구조로 뛰어난 건축기술과 과학기술이 접목된 건축물이라 평가받고 있다. 362개의 돌로 만들어진 첨성대는 높이가 9m에 이른다.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 기단부 위에 하늘을 상징하는 화병 모양의 원통부를 올리고, 정상부는 정(井)자형으로 마무리했다. 이 정상부에 관측기구를 놓고 24절기를 관측한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 주변에는 다양한 꽃무지가 조성되어 황량하게 남았을 첨성대를 화려한 기억으로 채워주고 있다. 첨성대를 지나 신라 성곽의 중심이었던 월성을 따라 걷다 보면 신라인의 놀라운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경주석빙고가 나타난다. 조선 영조 14년(1738)에 만들어진 얼음 창고인 석빙고는 길이 19m, 너비 6m, 높이 5.45m의 직사각형 석실로 약 1000여 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양 날개처럼 쌓아올린 돌담은 겨울에 부는 찬바람을 내부로 끌어들여 석빙고 내부를 꽁꽁 얼린다.
이 냉기는 반지하의 내부에 그대로 남아 7~8개월 동안 유지된다. 아치형 천장에는 세 개의 환기구를 냈고, 바닥은 물이 잘 빠지도록 비스듬하게 홈을 만들었다. 이렇게 여름까지 저장된 석빙고의 얼음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었는데, 음식에 사용됐을 뿐만 아니라 고열 환자를 치료하거나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동궁과 월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기러기와 오리밖에 없다 해 기러기 ‘안’자와 오리 ‘압’자를 써 안압지라 불렸다.
수려한 풍광으로 완성된 최초의 인공연못
석빙고를 지나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 ‘경주 동궁과 월지’에 이른다. 문무왕 674년, 삼국을 통일하고 국력이 강해지면서 만들어진 신라 왕궁의 별궁터인 이곳은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과 조경이 아름다운 이곳은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성대한 연회를 베풀기도 했던 곳이다. 월지는 동서 길이 200m, 남북 길이 180m, 총 둘레 1000m의 연못으로 못 안에는 동양의 신선 사상을 배경으로 섬 세 개와 열두 봉우리를 만들었고,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월지의 가장 큰 특징은 가장자리에 굴곡이 많아 어느 곳에서 봐도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신라인들의 세련된 창의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물을 끌어들이는 입수구나 배수구 시설 또한 교묘하고 세심하다. 현재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철도를 건설하면서 많이 훼손된 것을 1980년에 복원한 것으로, 스물여섯 곳의 건물터 중 가장 큰 세 개의 건물이 복원돼 있다. 사실 이곳은 안압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안압지라는 이름은 과거에 신라가 망한 뒤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밖에 없다 해 기러기 ‘안’자와 오리 ‘압’자를 써서 붙여진 것이다. 1980년대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면서 현재는 동쪽의 궁궐과 달의 연못이라는 뜻의 원래 이름을 되찾아 ‘경주 동궁과 월지’로 부른다.
신라시대 세워진 분황사모전석탑. 일제 강점기에 해체되고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찬란했던 신라 불교문화의 흔적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한 나라지만, 불교를 통해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그래서 경주 곳곳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상당수는 불교 유적이다.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분황사는 원효대사와 자장 스님 등 고승들이 머물렀던 절이다. 희명이라는 사람의 아이가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관세음보살 벽화가 있던 이곳을 찾아 간절히 빌었더니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호국사찰인 황룡사와 함께 국찰로써 큰 역할을 했지만, 몽골군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예전의 모습을 잃고 현재는 분황사모전석탑(국보 제30호)과 조선시대에 재건된 금당 ‘보광전’만이 남았다. 그 때문인지 신라 유적지들이 품은 화려함보다는 소박하고 아늑한 기운이 감돈다.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특이한 석탑으로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원래 9층으로 추정되는데, 일제 강점기에 해체를 당해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모전석탑을 지나면 팔각용 우물 ‘삼룡변어정'이 있다. 이 우물에는 나라를 지켜주는 용이 세 마리 살고 있었다는 설화가 있어 호국정이라고도 부른다. 서쪽을 보고 있는 금당 ‘보광전’은 조선시대 불전으로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준다는 약사여래입상과 원효대사 초상이 남아 있다. 분황사를 나서면 너른 평지가 펼쳐지는데, 이곳이 신라 최대의 절이었던 황룡사의 터다. 신라 진흥왕(533) 때부터 선덕여왕 13년(645)까지 무려 93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황룡사는 그 크기만도 축구장의 약 8배 정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늪지를 메우고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 한 마리가 나타났고 사찰로 짓게 된 것이라고 한다. 황룡사에는 신라삼보 중 ‘구층목탑’과 ‘장육존불’ 두 가지가 있었다. 선덕여왕 시절 만들어진 구층목탑은 총 9층에, 높이는 약 80미터에 이르렀다. 이 목탑을 9개 층으로 만든 이유는 신라 변방의 국가들이 탑을 세움으로써 신라를 침해하는 것을 누르고, 조공 바치기를 기원해서였다고 한다. 황룡사의 중심 건물인 금당이 있던 터 중앙에는 약 5m 정도 높이를 가진 큰 불상인 장육존상이 있었다. 장육존상은 적이 쉽게 침입할 수 없게 막아주었다고 한다. 황룡사 법당에는 솔거가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새들이 진짜 소나무로 착각하고 날아와 부딪히곤 했다고 한다.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까지도 보호를 받는 곳이었으나 1238년(고종 25년) 몽골군에 의해 모두 불타버렸고, 지금은 곳곳에 남아 있는 주춧돌로 그 흔적을 되짚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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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도심을 관통하며 천년 신라의 역사를 산책하다보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고했던 경주의 표정은 또 한 번 달라진다. 대릉원부터 첨성대, 경주 동궁과 월지 등 유적지 곳곳에 은은한 조명이 밝혀지며 낮과는 전혀 다른 정취를 자랑한다. 특히 경주 동궁과 월지의 화려한 밤 풍경은 경주 야경의 꽃으로 불린다.
화려하게 펼쳐지는 밤을 만끽하며 천년 신라 경주 여행의 여운을 기억에 담아본다.
경주 관광 Tip
경주의 맛, 황남빵 vs. 찰보리빵
경주하면 떠오르는 먹거리 중 황남빵은 첫손에 꼽히는 명물이다. 1939년 경주 토박이인 최영화 씨가 처음 만든 것으로, 팥소를 넣은 둥글납작한 반죽 위에 찍힌 빗살 무늬가 상징적이다. 인공감미료나 방부제를 전혀 넣지 않고 만든 황남빵은 이뇨작용을 돕고 염증을 없애주는 팥이 가득 들어 있는 건강 간식이다. 경주에서 황남빵만큼 이름을 떨치고 있는 명물은 찰보리빵이다. 핫케이크처럼 구워낸 빵에 촉촉한 팥 앙금을 넣은 찰보리빵은 위장기능을 튼튼하게 하고 설사를 멎게 하며 식이 섬유가 풍부한 찰보리로 만든 건강식이다. 찰보리빵은 황남빵에 비해 단맛은 적으면서 쫄깃하면서 부드러운 식감을 가졌다.
황남빵 경주시 태종로 783 / 054-749-7000 / www.hwangnam.co.kr
단석家찰보리빵 경주시 금성로 237 / 054-741-7520 / www.chalboribread.com
경주의 숙소, 고택 스테이
경주에서 특별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면 고택에서 머물러 볼 것을 권한다. 수백 년을 이어온 한옥 특유의 정취를 만끽하며 마음의 여유를 품을 수 있다. 신라문화원에서 운영하는 경주고택은 월암재, 서악서원 등 경주 곳곳에 6개의 고택을 숙소로 제공하고 있다. 향단은 경주 양동마을에 자리한 보물 412호로 지정된 곳으로 4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경주고택 054-775-1950 / www.gjgotaek.kr
향단 양동마을길 121-83 / 010-6689-3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