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2년부터 켜켜이 쌓인 이야기
고령 고분군. 대가야시대의 문화를 알려주는 주요사적지. 가야의 생활과 문화에 관련된 다양한 문화재가 발굴되었다.
가얏고마을은 우륵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마을. 한척한 마을길을 따라가면 우륵의 초가집을 만날 수 있다.
우륵박물관.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어 연주한 곳으로 알려졌다. 우륵과 가야금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건립한 테마박물관이다.
경상북도 고령은 대가야의 땅. 또 대가야의 도읍지였다. 옛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중심지로 중앙집권화된 고대국가가 발생하여 융성했던 땅이다. 고령읍에 들어서면 도로 양옆으로 얕은 산이 정렬하고 능선을 따라 봉긋이 오른 고분들이 나란히 줄을 섰다. 고분은 주산자락에 있는 지산동고분군으로 대가야의 왕과 귀족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대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 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재했다고 한다. 42년에 수로왕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와서 현재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대가야를 세웠다는 건국설화가 전한다. 대가야는 무엇보다 융성했던 문화의 흔적들이 칭송 받는다. 제철기술을 이용한 철제품과 가마에서 생산한 토기를 통해 문화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갑옷이며 투구, 고리칼에서 섬세한 예술성을 느낄 수 있다. 경상남도 합천과 대구광역시 사이에 위치한 작은 지역이지만 낙동강과 가야산을 끼고 고대국가의 도읍지로 문화의 꽃을 피운 고장답게 많은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우륵과 가야금의 슬픈 이야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던 김면 장군의 유적지. 장군의 묘소와 신도비 그리고 옥산 이기춘을 제향하기 위해 현종 7년에 건립한 도암서원(道巖書院)이 있다.
가야금과 거문고, 왕산악과 우륵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왕산악은 고구려 사람으로 거문고를 만들었고 우륵은 대가야인으로 가야금을 만들었다. 고령읍에 가얏고마을이 있다. 우륵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마을이다. 한적한 마을길을 따라가면 어설프지만 우륵의 초가집도 만날 수 있고 잘 지어놓은 박물관도 있다. 가야금은 대가야 가실왕의 명에 따라 만들었다고 전한다. 우륵은 가야국의 궁중 악사가 되어 예술을 통해 혼란스러운 가야국의 정치적 통합을 꾀하고자 했던 악성(樂聖)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조국인 가야국은 멸망하고 신라로 투항하였다. 여러 난관을 거쳐 신라 진흥왕의 신임을 얻고 신라 음악의 발전을 이뤄냈다. 우륵은 490년경 대가야의 직할 현인 성열현에서 태어났다. 성열현은 정치·문화적으로 발달된 지역이었고, 중앙 세력 즉 대가야의 왕명이 직접 하달되는 곳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열현의 악사(樂師) 우륵이 가실왕의 부름을 받고 대가야의 왕경으로 입경하였다고 한다. 이때가 520년 초반으로 그의 나이 30대였다. 5세기 후반의 대가야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6세기에 들어와 섬진강 유역에 대한 백제의 공세가 강화되어 불안한 상황이었다. 가실왕은 신진세력을 발굴하여 중앙 정계를 개편하고 대외적으로 신라와의 동맹을 추진하여 백제의 공세에 맞서고자 했다. 이때 가실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 세력 기반이 필요했고, 이를 대표한 인물이 우륵이었다.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만들었고, 우륵이 12곡을 지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가야금은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본받아 만들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다. 가실왕은 가야금을 제작할 때 중국의 악기 제도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의 것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가야국의 정신이 담긴 독특하고 유일한 가야금을 만들었다.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전하나, 우륵이 직접 제작에 관여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야금의 외관은 가야의 천문관이 반영되어 있는데, 모양에서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을 본받고 열두 개의 줄은 1년 12개월을 상징한다. 또 가야금은 대가야연맹을 상징하는 악기였다. 가실왕은 ‘제국의 방언이 서로 다른데 어찌 음악이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하고 우륵에게 12개 지역에 해당하는 12곡을 짓게 하였다. 가실왕은 음악을 통하여 대가야의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국가 의례에서 각 지역과 관련된 악을 연주하는 것은 바로 그 지역에 대한 지배의식의 표현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도 주변 제국들의 악을 연주하게 하거나 기예를 보이게 했는데 같은 맥락이다. 당시 가야금 곡조에는 모두 185곡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우륵이 지은 곡이 12곡, 우륵의 제자 니문이 지은 곡이 3곡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의 제목은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이, 사물, 물해,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등 가야의 지역명이었다. 이 지역들은 대가야연맹을 형성했던 소국이거나, 국방상 주요 거점 지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시 가야국의 불교행사 혹은 국가행사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우륵이 지은 12곡은 1년 12달에 맞추어 상징화한 국가 예악인 것으로 추정된다. 우륵이 가야금 12곡을 제작한 때는 6세기 전반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대가야를 맹주로 한 대가야 연맹이 음악을 고리로 삼아 제국의 일체화를 기도한 시기와 맞물려 510년경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가실왕의 재위 시기와 우륵의 연령을 고려하여 520년대 초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 또한, 가실왕을 이뇌왕과 도설지왕 사이에 재위한 것으로 추정하여 금관가야가 멸망한 530년대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대가야 세력권이 분열된 540년경에 작곡했다는 설도 있다. 어느 시기에 작곡을 했던지 간에 결국 우륵의 12곡은 정치적 통합의 성공적 산물이 아닌 불안한 정세의 산물이었다. 결국 우륵의 가야금과 12곡은 대가야의 통합이 아닌 멸망으로 귀결되었다.
고령군 개진면 개포나루터. 강물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여 흐르는 곳으로, 낙동강변의 유서 깊은 교통 요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이곳을 통하여 운반되었다.(사진제공 고령군청)
소박하지만 잘 정리되어 있는 김면 장군 유적지. 도암서원과 누각, 강당과 추념재가 어울린 공간에서 경건함이 묻어난다.
낙동강아 흘러라
고령의 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낙동강이 굽이치는 개포나루는 옛날부터 강을 건너는 나루이자 강의 항구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다. 소금이며 곡식이 이곳을 통해 각 지방으로 운송되었다. 또 고려 때에는 팔만대장경이 운반된 항구로 알려져 있다.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에서 배에 실려 서해와 남해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 도착하여 육로로 고령읍을 지나 해인사까지 수송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 이후에 개포나루를 개경포(開經浦)라 불렀다고 한다. 물론 현재 나루터는 없고 개경포기념공원이 있지만 정비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수천 리 바닷길을 지나고 굽이굽이 낙동강을 거슬러 오른 팔만대장경. 승려들과 신자들의 손길로 옮겨진 그 고귀한 대장경판은 나라와 백성의 바람이 실려 수없는 침략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해인사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사람으로 이어져 왔지만 강물은 변함없이 흘렀고 지금도 흐른다. 역사의 증거인 낙동강이 변함없이 흐르고 고령의 역사도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왜란과 가족
고령군 쌍림면에서 고령읍으로 가는 국도변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송암 김면 장군의 유적지가 있다. 그는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 거창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수십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1593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선산대전을 앞두고 충청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 개령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에 병을 얻었다. 장군은 ‘오로지 나라만이 있는 줄 알았고, 내 몸이 있는 줄은 몰랐다’라는 충절의 말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53세이던 1593년 3월 11일 진중에서 운명을 달리하였다고 전한다. 십리안의 굶주리는 가족을 돌볼 겨를도 없이 오직 국가와 백성을 지켜내는데 목숨을 바친 충절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세를 통해 기념되고 있다. 김면 장군의 유적지는 소박하지만 잘 정리되어 있었다. 평일이라 인적이 드물지만 도암서원과 누각, 강당과 추념재가 어울린 공간에선 경건함이 묻어난다. 사당 앞 배롱나무 너머로 송암선생묘로 오르는 오솔길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전쟁과 국가 또 가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공간이다.
흔적
고령에 남은 대가야의 흔적은 고분군과 그곳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 등 많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능선을 따라 줄지어 있는 고분들을 하나씩 넘으며 보이는 마을의 풍경, 작은 안내판 글귀에도 오롯이 빠져들고 한적한 산길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와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스치면 그것이 고령의 것인지 대가야의 것인지 모를 만큼 신비로움에 사로잡힌다. 우리 고장이 최고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느껴지는 진실함이 남다른 고장 고령. 여기저기 흩어진 그 흔적들을 따라가 보면 우리의 역사와 만날 수 있다. 손을 내밀면 잡아 줄 것 같은 조상의 얼굴이 그려지는 고장. 바로 사람의 역사를 이어온 땅이라서가 아닐까. 크지 않아도 오래 머물고 싶은 고령의 여운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