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유비무 환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선소
여수 순천부 선소. 무기를 만들었던 세검정과 군기고가 복원되어 있다. 당시의 긴박함은 여수 바다에 새겨지고 이제는 고즈넉한 풍경이 되었다.
국보 제304호 진남관. 왜구를 진압해 평안한 남해바다를 만들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전라좌수영 본영 진해루 자리에 건립되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인 규슈(九州) 정벌을 마치고, 명나라 정벌을 구실로 4년간 조선에 협조 요청을 하며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1592년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나고야에 지휘소를 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군을 이끌고 경상 부산포를 먼저 공격해왔다.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순식간에 경상좌수영·우수영의 수군이 일본군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일 뒤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왜적 90여 척이 부산 앞바다 절영도에 정박하였다는 것이다. 다음날 부산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보냈고 양산, 울산도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당시 전라좌수영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지체 없이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옥포(玉浦)에서 첫 승리를 이끈다. 이후 계속된 승전을 울리며 임진왜란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순신 장군이 여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1세 때에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부터다. 그 후 32세 무과에 급제하고 승진을 하며 1591년 여수 전라좌수사로 부임을 한다. 물론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한산도로 수군의 본영을 옮기기까지 여수에 머물며 본영을 지휘했다. 이순신 장군은 잘 알려진 바로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전략가이자 전술가다. 또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 장수였다. 이순신 장군이 성웅으로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것은 유비무환 정신과 위민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이다.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끝난 1598년까지 기록한 일기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왜적의 침입을 예상하고 군사훈련을 철저히 하는 한편 거북선을 건조했다. 당시 거북선은 판옥선(板屋船)을 개조해 만들었는데 노를 젓는 1층과 함포를 발사하는 2층으로 되어있으며 그 위는 개판을 설치하였다. 배에 탄 군사를 모두 보호할 수 있는 장갑함으로 전후좌우 사방에 화포를 배치해 막강한 화력을 가졌다. 임진왜란 시 처음 모습을 보인 거북선은 해전에서 23승을 거두는데 중요한 견인차가 되었다.
지금도 여수에는 거북선을 만들었던 선소(船所)가 남아있다. 여수의 선소는 중앙동의 좌수영 본영 선소와 돌산 방답진 선소, 순천부 선소 세 곳이었다. 본영 선소는 매립되어 시가지가 형성되었고, 방답진 선소는 전선을 정박하던 굴강만 남아있다. 여수 시청에서 500m 떨어진 시전동에 위치한 순천부 선소는 거북선을 비롯한 판옥선, 전선 등을 만들고 대피했던 굴강, 칼과 창 등을 만들었던 세검정과 군기고, 대장간 등이 복원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긴박하게 돌아갔을 군사요지였음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봄날의 찬란한 햇살을 한껏 머금은 순천부 선소는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여수8경 중 제7경인 충민사.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 춘기 석채례, 음력 9월 10일 추기 석채례, 양력 4월 28일 충무공 탄신제를 지낸다.
이순신 장군의 쩌렁 쩌렁한 호령이 들리는 듯한 전라좌수영의 본영 진남관
1592년 네 차례 일어난 해전은 모두 여수에서 시작되었다. 이 해전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이 전라좌수영 전라좌수사 이순신이다. 당시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던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1599년 통제사 이시언에 의해 건립된 것이 지금의 진남관(鎭南館)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 머물며 수군을 지휘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 쩌렁쩌렁 호령하는 장군의 위풍을 그대로 닮은 모습의 진남관은 서울 이남에서 단층 목조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로 국보 제304호다. 여수시 동문로에 위치한 진남관은 바다를 바라보는 망루인 망해루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만난다. 진남관은 ‘왜구를 진압해 평안한 남해바다를 만들기 소망한다’는 뜻이다. 1716년 화재로 불탄 것을 이순신 장군 전사 120년이 되는 해를 기려 1718년 다시 세웠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여수공립보통학교로 사용되어 크게 훼손되는 아픔을 겪었다. 진남관 앞에는 2개의 돌기둥(석주화대·石住火臺)과 석인(石人)상이 있는데 모두 이순신 장군의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돌기둥은 본래 4개로 밤 훈련을 위해 불을 밝힐 목적으로 사용되던 것으로 지금은 2개만 남아있다. 석인상 역시 왜적들의 공세가 심해 그 침공을 막아내고자 7구를 만들어 세워 의인전술의 일환책으로 승전을 하는데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1구만이 보존되어 있다.
진남관을 나와 좌수영다리를 건너 고소대로 향한다. 여수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여수 8경으로도 유명하다. 좌수영다리는 일제가 진남관과 고소대의 맥을 끊기 위해 훼손했던 것을 지난 2012년 복원한 것이다. 고소대는 이순신 장군이 좌수영 포루로 군령을 내리던 곳으로 타루비와 통제이공수군대첩비가 남아있다. 타루비는 이순신 장군의 수졸들이 돌아가신지 6년 후인 1603년 장군의 거룩한 덕을 눈물로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다. 부하들과 격의 없이 함께 활을 쏘며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던 장군의 이성적, 감성적 소통 리더십이 사후에도 존경하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광해군 7년에 건립한 비석으로 역시나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규모 면에서도 장군의 업적에 버금갈만하다. 높이 3.06m, 너비 1.24m이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부하들의 충절 하는 마음
여수시 덕충동 마래산 기슭에 있는 충민사(忠愍祠)로 향한다. 충민사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지 3년 후인 1601년에 건립되었다. 우의정 이항복이 사당 건립을 제안하여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의 주관 하에 건립되어 사액(賜額) 되었다. 통영의 충렬사가 순국 65년에, 아산의 현충사가 순국 106년에 사액 되었으니 여수의 충민사가 이순신 장군 국가적 기념사업 1호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당시 통영 충렬사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7년 충민사를 복원, 국가 사적지 제381호로 지정되었다. 충민사는 특이하게도 불교사찰 석천사와 나란히 있는데 여기에도 이순신 장군을 향한 충절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운스님과 옥형스님은 의승 수군대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해서 공을 세웠는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이를 막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자운스님은 백미 6백 석으로 노량에서 수륙재를 지냈고 충민사에서 제사를 올리기도 했으며, 옥형스님은 충민사 곁에 작은 정자를 짓고 해마다 넋을 기리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의 석천사인데, 옥형스님은 80이 넘도록 죽는 날까지 이 정자에서 나오지 않고 이순신 장군을 기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정성 때문이었을까, 앞서 밝힌 대로 장군 전사 3년 후 선조의 왕명을 받아 짓고 사액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순신 장군은 전사했어도 부하들의 충절과 추모는 계속되었다. 지금도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 여기며 존경하는 것도 그가 비단 장수로서 훌륭한 전략가 전술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백성과 부하를 사랑했던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여수는 그러한 절개가 지금까지 흐르고 있다.
봉황의 집이라는 뜻의 봉소당. 나눔과 베풂의 실천으로 선대부터 지금까지 여수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집안이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큰 베풂 나누는 봉소당
여수시 봉강동에 ‘봉소당(鳳巢堂)’이 있다. 봉황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봉소당은 1948년 좌우익이 충돌하며 일어난 ‘여순사건’에서도 피해 없이 위기를 넘겼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한 ‘나눔과 보살핌’ 덕분이었다고 여수 사람들은 말한다. 당시 여수의 좌익세력은 부유층 인사를 착취계급으로 규정하고 우선적으로 잡아다 살인을 저지르고 재산을 약탈했다. 봉소당 12대손인 김재호(현 한영대학 이사장) 선생의 아버지 故 김성환 선생도 그 대상자였다. 증조부 때 크게 부자가 되어 여수·순천 인근에서 봉소당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했을 일이다. 김재호 선생의 아버지는 죽을 각오로 끌려가 책임자 앞에 섰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책임자는 호위병을 모두 나가라고 하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알아서 도망가라는 신호임을 뒤늦게 안 김성환 선생은 2층 창문을 열고 탈출해 무사할 수 있었다. 부전자전이라고 했던가, 여순사건 당시 일곱 살이었던 김재호 선생도 밤 한줌으로 위기를 면했다고 한다. 어느 날 좌익에 가담한 머슴의 열일곱살 아들이 완장을 차고 봉소당에 나타났던 것. 어린 꼬마는 손에 들고 있던 찐밤 한줌을 먹으라며 형에게 건넸고, 밤을 받아든 머슴 아들은 그런 김재호 선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고 한다. 한 줌 밤이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이처럼 봉소당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고 함께하는 것에 아낌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밥을 먹게 하고, 가난한 과객이 봉소당에 머물고 있으면 잘하는 것을 물어 그것을 하여 돈을 벌어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봉소당은 집터가 크고 앞쪽으로는 어머니 젖가슴을 닮은 유두봉이 위치해 있다. 어쩌면 나눔에 인색함이 없고 크게 베푸는 것이 자연스러운지도 모를 일이다. 집터의 크기만큼 인심이 넉넉하니 한 가문이 잘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일 터다. 봉소당은 안채와 별채, 아래채, 사랑채와 행랑채, 정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을에 큰 길을 내주느라 사랑채와 행랑채, 정자를 마당 안쪽으로 조금씩 옮겼지만 여전히 규모가 크다. 봉소당 사람들은 어머니 젖가슴 같은 유두봉이 이 집의 무사안녕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여전히 봉소당은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 차 한잔을 권하기도 하고, 잠잘 곳을 내어주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그랬듯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참된 실천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