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은 성곽도시다. 도심 전체가 18.6km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때 급속히 진행된 도시화와 현대화로 잊혀졌지만 어느덧 복원되어 서울의 오랜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서울 성곽길에는 600년 조선의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삶도 그대로 녹아 있다. 낙산공원, 와룡공원, 삼청공원, 남산공원 등 10곳이 넘는 녹지공원과 국보 1호 숭례문, 보물 1호 흥인지문을 포함해 170개에 달하는 문화재가 성곽을 따라 산재한다.
조선과 함께 시작한 서울 성곽
국사당. 지금도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 등이 수시로 벌어진다. 원래는 남산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인왕산 아래로 옮겨버렸다.
두 스님이 참선하는 모습의 선바위.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기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결국 유학자 정도전의 뜻에 따라 성곽에 포함되지 못하고, 불교는 조선시대 힘을 잃게 된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10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새 도읍지가 된 한양에서는 궁궐 조성, 종묘·사직 정비와
함께 성곽 쌓는 일도 활발했다. 서울 성곽 축성은 1395년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시작한다. 한양은 밖으로는 아차산(동)·덕양산(서)· 관악산(남)·북한산(북)의 외사산(外四山)이 둘러싸고, 안으로는 낙산(동 125m)·인왕산(서 338m)·목멱산(남 265m)·북악산(북 342m)의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다. 서울 성곽은 바로 내사산을 연결하는 방식이었다.성곽 공사는 1396년 숭례문을 시작으로 다음 해 4월, 흥인지문의 옹성이 완공되며 끝났다. 동원된 인원은 11만 8,000명. 그 후 27년이 지난 세종 4년에는 전국에서 약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가 동원돼 흙으로 쌓은 성곽 일부를 모두 돌로 바꿨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약 10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서울시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목표로 성곽길을 차례로 정비하고 있다.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 성곽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과정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리라. 게다가 때는 봄날. 마냥 걷기 좋은 날이다. 성곽길을 따라 걸으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성곽길은 걷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성곽길이 자리 잡은 능선은 아무리 높아도 400m를 넘는 곳이 없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300m, 남산이 200m이고 낙산은 100m에 불과하다. 반나절, 아니 2시간만 할애하면 서울의 역사를 더듬을 수 있다. 현재 성곽길은 총 4구간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번에 오른 길은 인왕산 성곽길이다. 정상은 해발 338m로 성곽길이 있는 산 중에서는 북악산 다음으로 높다.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1번 출구에서 무악경로당을 지나면 국사당과 선바위로 가는 길이 나온다. 선바위에서 성곽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 있는데, 이 등산로를 따라가면 성곽길이 나오고 인왕산 정상을 지나 창의문까지 닿는다. 햇살 따스한 봄 어느 날, 한양도성 해설사 홍성규 선생과 이 코스를 함께 걸으며 서울 성곽의 탄생과 역사, 주변에 깃든 문화에 대해 들었다.
인왕산은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전해진다. 서울을 대표하는 진산 중의 하나로,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의 배경이 된 곳이다.
인왕산에 오르면 서울 도심이 다 내려다보인다. 그 옛날 한양 사람들도 인왕산에 올라 장안을 내려다보며 나라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폈다고 한다.
불교와 유고의 기(氣) 싸움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선바위다. 기도터로 유명한 곳인데, 한눈에 보기에도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멀리서 보면 스님 두 분이 참선하는 모습과 똑 닮았다.
홍성규
“달리 보면 고깔과 장삼 차림의 두 스님이 합장하는 것 같죠? 눈이 내린 날은 조실스님이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한양의 백성들은 선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아이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서 ‘아이를 기원하는 바위’라는 뜻의 ‘기자암’(祈子巖)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선바위는 한양도성 바로 밖에 자리한다. 코앞에 서울 성곽이 가로막고 지나간다. 그 너머는 임금이 살고 있는 궁궐이다. 홍 선생은 선바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홍성규
“선바위는 조선 개국의 두 주역인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기 싸움을 벌인 곳이기도 합니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정도전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죠. 각각 불교와 유교를 대표하는 이들이 조선의 통치 이념을 유교와 불교 중 무엇으로 선택할지 기(氣) 싸움을 벌인 것이에요. 결국 유학자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를 설득해 선바위를 성 밖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결판이 났습니다. 이를 두고 무학대사는 ‘이제 승려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라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을 비롯해 무속신앙을 받드는 집이 많다. 국사당은 전국 무당들의 으뜸 굿판이다. 원래 남산에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이곳으로 옮겨버렸다. 요즘도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 등이 수시로 벌어진다. 선바위를 나와 본격적으로 성곽에 오른다. 성곽은 인왕산을 따라간다. 천천히 걸어 3~40분이면 인왕산 정상에 닿는다. 인왕산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다. 단단한 넙적 바위가 봉우리 쪽에 떡하니 박혀 있다. 조선조 실학자 유득공(1749~1807)은 ‘인왕산은 사람이 팔짱 끼었던 양팔을 풀어놓은 듯, 양어깨에 날개가 돋친 듯하다’고 말하며 산세의 웅장한 기세를 표현하기도 했다. 크고 작은 돌들도 우뚝우뚝 솟아 있다. 기차바위며 치마바위, 삿갓바위, 부처바위, 매바위, 범바위 등. 이 바위 너머로 서울 도심이 발아래 보인다. 경복궁과 청와대가 손에 잡힐 듯하다. 옛사람들은 인왕산에 오르면 ‘나라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손금 보듯 환하였다고 여겼다. 인왕산을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그 호랑이의 잔등을 타고 오르면 어느 곳에서든 서울 장안을 내려다볼 수 있으니 사람들은 너도나도 인왕산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인왕산은 서울을 대표하는 진산 중의 하나다. 태조는 조선 초기 도성을 세우면서 북악산(北岳)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남산을 안산(案山), 낙산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龍虎)로 삼아 궁궐을 지었다. 한양 성곽은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의 산줄기를 빙 둘러 궁궐을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인데, 인왕산 줄기는 현재의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서대문구 현저동, 홍제동에 걸쳐 있는 서편의 산줄기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의 이름으로,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인왕의 표기를 인왕산(仁旺)이라 했지만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仁王)을 되찾았다.
겸재, 인왕산의 어느 비 갠 오후를 그리다
인왕산 하면 겸재 정선(1676~1759)을 빼놓을 수 없다. 겸재가 남긴 최고 걸작 ‘인왕제색도’는 인왕산을 그린 것이다. 김겸재는 북악산 자락(현 청운중·고교)에서 태어나 인왕산을 마주 보며 살았다. 천재 시인 사천 이병연(1671~1751)과 평생 친구이기도 했다. ‘그림에 겸재, 시에 사천’으로 불릴 만큼 최고의 화가와 시인이었다. 같은 스승 김창흡 밑에서 배운 그들은 친형제보다 친했다. 사천이 시를 써서 보내면 겸재는 그림으로 답했다. 성인이 되어 둘이 떨어지자 겸재는 친구에게 그림을 보냈고, 사천은 그림에 맞는 시를 전했다고 한다. 겸재의 나이 일흔다섯이던 1751년 윤오월 25일이었다. 지난 엿새 동안 내리던 비가 겨우 그쳤다. 그의 친구인 사천은 여든. 병상에 누운지 오래인 그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집 마루에 앉아 친구를 걱정하던 겸재는 인왕산 아래부터 피어난 안개가 길게 띠를 이루며 위로 번지는 것을 보고는 종이를 펴고 붓을 들었다. 화강암 덩어리를 쓱쓱 그리고 안개와 집, 소나무를 그렸다. 이 그림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며 친구가 쾌차하기를 빌었다. ‘인왕제색도’는 인왕산에 큰비가 온 끝에 갠다는 뜻. 큰비가 온 뒤 맑게 개듯 벗이 아픈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래서일까.
‘인왕제색도’에는 꿈틀거리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마지막 가는 친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렸지만 사천은 그 나흘 뒤에 죽었다.겸재의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정상에서 내려와 창의문으로 향한다. 그러다 문득 드는 의문. 성곽 본연의 목적은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 그렇다면 과연 서울 성곽이 서울 방어에 제대로 활용되었을까. 한양도성 해설사 홍성규 선생에게 물어보니 ‘아니다’며 고개를 흔든다.
홍성규
'서울 성곽은 세종 때 수축 작업을 통해 서울을 지키는 대표적인 상징이 됩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성곽은 서울 방어라는 성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파죽지세로 서울로 진격하자 국왕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하죠.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에 맞서 항전합니다. 서울 성곽이 방어처로 전혀 그 기능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상징적 역할에만 머물러 있던 서울 성곽은 숙종 때 이르러 비로소 대대적인 정비를 거친다. 숙종은 북한산성, 강화도, 남한산성 등 서울을 둘러싼 주변 지역의 방어를 공고히 하는 한편, 대대적인 서울 성곽 수축 작업을 지시한다. 이때 쌓은 돌은 태조 때나 세종 때에 비해 훨씬 규격화된 돌이다.
서울 성곽을 걷다 보면 태조, 세종, 숙종의 세 시기에 쌓은 돌을 구분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태조 때 축조된 성곽은 규격이 일정하지 않고 다양한 크기의 깬 돌을 사용해 별다른 규칙 없이 쌓은 모양이다. 세종 때는 비교적 일정한 규격의 돌을 사용하였는데, 아래쪽은 크고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로 성벽의 돌이 작아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홍성규
'성곽의 돌들은 시대별로 모양이 다릅니다. 메주 모양의 돌들이 촘촘히 박혀 쌓여 있는 맨 아랫부분은 태조 때 축성된 것이고, 성곽 밑에 크고 기다란 돌을 받치고 그 위에 메주 모양의 돌을 얹은 성곽은 세종 때, 정 방향으로 다듬어진 큼지막한 돌로 이어진 곳은 숙종 때 축조된 것입니다.”
이처럼 규격화된 돌을 사용하면 성이 파손되었을 때 이를 보수하기에 편리했다는 것이 홍 선생의 설명이다. 숙종 때 수축 작업을 통해 그 틀을 완성한 서울 성곽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수도 한양을 방어하는 주요한 군사시설이자 도성 백성들의 교통을 통제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서울 성곽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헐렸다가 1973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목표로 다시금 재정비 중이다. 한번쯤 서울 성곽길을 따라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봐도 좋을 듯싶다.
일제강점기 때의 수난
서울 성곽의 수난은 일제강점기 때다. 1899년 서울 시내에 전차가 개통되면서 도심 주변의 성곽은 대부분 헐렸다. 일제는 도시계획이라는 미명 하에 도성 출입문인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등을 파괴했다. 숭례문과 흥인지문, 창의문이 남았지만 주변 성곽은 모두 헐려 고립된 섬의 모습만을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1973년부터 서울 성곽과 문루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광희문은 1975년, 숙정문은 1976년, 혜화문은 1995년에 복원됐고 1993년 인왕산이 개방되면서 인왕산을 따라 축성된 서울 성곽의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2006년에 들어와서는 1968년 1·21사태의 여파로 출입이 금지되었던 숙정문 일대 서울 성곽 길도 개방되고 있다. 창의문 닿기에 앞서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만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은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울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아파트와 어지러운 빌딩으로 가득하던 서울은 남산, 북악산 백운대와 어울려 어느새 포근하고 정겨운 모습으로 서 있다.
서울 성곽길 걷기 tip
서울 한양도성 무료해설 예약
(http://tour.jongno.go.kr)
안내
정식 교육을 받은 종로구·중구 주민 해설
운영코스
4개 코스
신청인원
최소 4인 이상~
해설언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예약신청
관광 희망일 기준 최소 3일전 인터넷 신청(21인 이상 단체의 경우 5일전까지 신청)
운영시간
오전 10시, 오후 2시.
하절기(7월~8월은 오전 9시 30분만 운영)
문의처
1, 2, 4코스 종로구청 관광체육과 02)2148-1863
3코스(남산구간) 중구청 문화관광과 02)3396-4623
1코스 백악(북악)산·창의문에서 혜화문까지
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
집결장소 자하문고개 창의문 앞
2코스 낙산·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
소요시간 약 3시간
집결장소 한성대입구역 혜화문 앞
3코스 남산· 광희문에서 숭례문까지
소요시간 약 4시간 30분
집결장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광희문 앞
4코스 인왕산·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소요시간 약 5시간
집결장소 서울역 숭례문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