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자신의 경험으로 인재를 선발해 쓰시고 도로써 몸을 닦으십시오. 전하께서 솔선수범해 사람을 취해 쓰신다면 전하를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사직을 지킬 만한 사람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눈으로 본 것만 가지고 사람을 쓰신다면 곁에서 모시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하를 속이거나 져버릴 무리로 가득 찰 것입니다.”
이 목소리는 1555년, 그러니까 조선 명종 10년,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이 올린 상소문의 일부분이다. 이 상소는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남명은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문정왕후를 과부로, 어린 국왕 명종을 외로운 아들로 표현하며 국정을 비판한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 명종은 굉장히 분노해 엄중한 벌을 내리고 싶어 했지만 재야의 영수였던 조식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조정 일각에서도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는 이유로 그를 처벌하자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상당수의 대신과 사관들은 “조식에게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며 적극 변론했다고 한다.
남명의 꼿꼿한 정신을 되새기다
남명 조식은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그의 사상은 실천을 강조하고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입장은 제자들에게도 남명 조식(曺植,1501~1572). 16세기 조선시대를 대표한 학자로 평생을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이른바 ‘선비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퇴계 이황과 같은 해에 태어나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장수를 했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걸었고, 남명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 재야 지식인의 길을 걸었다. 그대로 이어져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곽재우, 정인홍, 이제신, 김효원, 문익성, 하항 등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많은 이들이 바로 남명의 제자들이다. 산청은 영원한 처사(處士)로 불리는 남명 조식이 학문과 제자 양성에 마지막 정열을 불태운 고장이다. 남명은 1501년(연산군 7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부친의 근무처인 서울로 올라가서 글을 배웠으며 단천 군수로 자리를 옮기자 그 역시 그곳으로 따라가서 경서는 물론 천문, 지리, 의약, 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다. 1520년(중종 15년) 생원 1등, 진사 2등으로 합격했지만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 많은 선비들이 희생되고 숙부마저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자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을 단념했다.당시 경상도는 인재의 보고였다. 좌도의 퇴계가 있다면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고 했다. 퇴계와 남명은 경쟁하듯 숱한 인재를 길러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은 달랐다. 퇴계가 벼슬길에 나아가 현실정치에 참여한 반면 남명은 끝까지 벼슬을 사양해 처사로 일관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남명의 폭넓은 식견을 반영하기 위해 여러 차례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모두 사양했다고 한다. 남명은 말년에 산청 덕산으로 들어와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매화 한 그루를 심고 마지막 거처로 잡았다. 산천재는 남명이 61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 젊은 시절 유학과 노장학 등 온갖 학문을 두루 섭렵한 남명이었지만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던 까닭에 퇴계 등의 천거를 뿌리치고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와 산천재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산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집이 아니라 지리산 천왕봉이다.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는 산천재를 두고 마당에 온전히 지리산을 들인 집이라고 했는데, 마당에 서면 그 표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불과 서너 칸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건물이지만 품고 있는 넓이는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이 아닐까 싶다. 집의 이름으로 삼은 ‘산천’은 주역의 ‘산천대축괘(山天大畜卦)’에서 따온 것인데 ‘강건하고 독실하고 빛나서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산천재에서 눈여겨볼 것은 편액 위다. 신선들이 소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상산사호도’라는 그림인데, 중국의 상산이라는 곳에서 네명의 신선과 같은 머리가 하얀 노인들이 노송 아래서 한가하게 바둑을 즐기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들은 중국 진시황 때 난리를 피해 산시성 상산으로 숨은 네 사람의 선비들이다. 이 그림 왼쪽에는 농부가 소를 모는 ‘경작도’가 그려져 있다. ‘상산사호도’와 ‘경작도’ 이 두 그림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직 올곧은 처사로 지조를 지키며 살겠다는 남명의 정신을 잘 표현한 그림이다. 봄이면 산천재 앞마당에 있는 매화나무가 환하게 꽃을 피워 문다. 남명이 산천재를 짓고 심은 매화나무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 나무를 남명매라고 부른다. 440년을 훌쩍 넘은 나이지만 지금도 맑고 눈부신 꽃을 피운다.
남명 조식은 말년에 산청 덕산으로 들어와 산천재를 짓고 매화 한그루를 심고 마지막 거처로 잡았다. 산천재는 서너 칸밖에 되지 않는 작은 건물이지만 지리산 천왕봉을 품을 만큼 기품 있는 집이다.
산천재의 매화나무는 440년의 나이를 먹었지만 지금도 봄이면 화사한 꽃을 피운다. 봄이 오면 지리산을 품은 산천재 마당을 거닐며 삶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방울과 칼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경계하다
산천재 맞은편에 자리한 남명기념관은 지난 2001년 남명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됐다. 남명과 관련한 각종 유품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신명사도’라고 부르는 그림과 마주한다. 남명 사상의 핵심을 말해주는 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을 도표로 그린 것이다. ‘신명’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고 ‘사’는 집이라는 뜻. 그림에서 성곽처럼 둘러쳐진 안쪽이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마음 바깥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신명사도는 마음을 지키는 것을 성을 지키는 전쟁에 비유한 그림인 셈이다. 남명은 마음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들을 적으로부터 성을 지키듯 사생결단의 각오로 물리쳐야 한다는 뜻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기념관에는 실천을 강조한 남명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유품이 있다. 성성자(惺惺子)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 부르는 한 자루의 패검이 그것이다. 성성자는 ‘성자가 깨어 있다는 의미’로 남명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경의검이라는 패검도 몸에서 잠시도 떼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칼처럼 목숨을 걸고서 생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패검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얽혀있다. 하루는 경상감사가 부임하면서 남명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감사가 남명의 패검을 보고 “무겁지 않으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남명은 “뭐가 무거울 것이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그대의 허리에 찬 돈주머니가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감사가 사죄하면서 “재주가 없이 무거운 책임을 맡아 잘해낼지 걱정”이라며 고개를 숙였다고 전한다.
남명은 72세의 나이로 산천재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그날 지리산에는 큰 나무가 말라죽고 폭설이 내리고 뒷산이 무너졌다고 한다. 지리산을 닮고 싶어 했으며 지리산 천왕봉 주위에 살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으니 지리산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음은 당연했을 듯도 싶다. 남명의 서거 소식을 들은 선조는 서거를 애도하는 사제문을 내렸으며 광해군대에는 문정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명기념관 뒤편의 소나무숲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가면 남명 묘소에 닿는데, 지리산과 덕천강 그리고 덕산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풍수에 문외한이 봐도 명당임을 알 수 있다.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을 나와 원리로 간다.
원리는 지리산에서 흘러온 두 줄기의 물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곳에는 남명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남명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5년에 건립한 덕천서원이 있다. 남명학파의 본산이며 인조반정 등으로 풍파를 겪으며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20년대에 복원됐다. 서원 건너편에는 아담한 정자 하나가 다소곳하게 서 있는데 이것이 ‘세심정(洗心亭)’이다. 덕천서원을 지을 때에 함께 지은 것으로 서원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의 휴식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남명기념관에는 ‘신명사도’라 부르는 그림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을 도표로 그린 것으로 ‘신명’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고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산청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 남사예담촌이다. 천년 세월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을로 돌담길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X로 굽은 수령 300년이 된 회화나무도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이야기가 깃든 굽 이굽이 돌담길
산청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 남사예담촌이다. 1,000년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을이다. 박씨와 이씨, 정씨, 최씨, 하씨, 강씨 등이 집성촌을 이룬 마을이다. 구한말 파리장서(巴里長書) 초안을 작성한 후 일경에 빼앗길까 봐 짚신을 삼아 한양으로 갔던 면우 곽종석도 이 마을 출신이고, 국악계의 큰 별인 기산 박현봉도 이곳이 고향이다.남사마을이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아름다운 돌담길 때문이다. 지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돌담과 토담은 전체 5.7km에 이르는데, 이 중 3.2km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예담촌’이라는 이름도 ‘옛 담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오래된 마을답게 마을에는 고가들이 많다. 이 중 이씨 고가가 가장 오래됐다. 고가로 가는 골목의 X자로 굽은 수령 300년이 된 회화나무가 이색적이다. 이씨 고가와 함께 돌아볼 만한 곳이 최씨 고가다. 마을 주차장에서 높은 담장을 따라 걷다 ㄱ자로 급하게 꺾어지면 멋진 한옥 한 채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최씨 고가의 명물은 사랑채 우측에 자리한 홍매다. 해마다 3, 4월이면 붉은 꽃으로 하늘 한켠을 화사하게 수놓는다. 마을을 흐르는 남사천 너머에는 이사재가 있는데, 충무공 이순신이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할 때 하룻밤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천왕봉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산청은 지명 그대로 산 좋고 물 맑은 곳이다. 경호강, 덕천강, 지리산 양단수 등 맑은 물이 있고 지리산, 왕산, 황매산 등 좋은 산 또한 자리잡고 있다. 산청은 지리산의 웅대한 기운과 맑은 계곡물을 머금은 1천 여종의 야생약초가 자라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신의 류의태와 의성 허준이 의술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리라.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허준’의 주 배경이 되었던 산음 고장이 바로 지금의 산청이다. 동의보감촌은 한방과 약초를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한방테마공원과 한의학박물관 등을 갖추고 있다. 특히 한의학박물관이 체질검사, 체지방검사, 신체나이 검사 등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기를 직접 실험해볼 수 있는 기체험장도 인기다. 거북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서 있는데, 허리가 아픈 사람들이나 어깨가 아픈 사람들은 이곳에만 오면 씻은 듯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남 산청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와 대전통영고속도로를 이용해 단성IC로 나온다. 산청에서 꼭 맛봐야 할 음식이 어탕국수다. 모래무지, 피라미, 꺽지, 붕어, 미꾸라지 등을 잡아서 뼈를 추려낸 뒤 풋고추와 호박, 미나리 같은 채소를 듬뿍 넣고 푹 끓여 만든 어탕에 국수를 만 것.
경호강을 따라 펜션이 많이 들어서 있어 숙박에 불편함이 없다. 기산재는 남사예담촌을 찾은 단체 방문객을 위한 한옥 숙박시설. 팔작지붕을 올린 우람한 한옥은 새로 지어져 시설이 깨끗할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어 한옥체험을 전혀 불편함 없이 즐길 수 있다.
산청에서 유명한 음식이 바로 어탕국수다.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