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지 않을 것만 같았던 대지는 간간히 내리는 가을비에 서서히 그 열기를 식혀가는 모양새다. 해질녘 살랑이며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엔 쓸쓸함마저 묻어나는 듯하다. 가을이 더욱 깊어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뜨겁고 습했던 지난 여름에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을 밤 즐기는 와인 한 잔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렵게만 느껴졌던, 공부의 대상이었던 와인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신의 물방울’, ‘인간이 만든 신의 술’ 등 화려한 수식어를 몰고 다니는 와인은 마시면 취하는 술 이상의 이야기와 문화를 지닌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술, 와인
음주를 즐기는 필자는 모든 술이 좋다. 어떤 장소에서라도 술자리의 묘한 긴장감과 애틋한 긴장감이 술자리의 묘미라 할 수 있겠다. 적당히 즐기는 모든 술은 사랑의 메신저요, 큐피트의 화살이요, 애틋한 사랑을 불 피우는 촉매제라 생각한다. 속된 말로 작업을 걸기에 딱 좋은 술은 그 중에서도 와인이 아닐까? 20여 편이 넘게 제작되어 꾸준한 사랑을 받는 영화 <007>의 제임스본드는 작업을 위한 도구로 와인을 활용한다. 묘하게도 제임스본드에게 넘어오지 않는 여인이 없을 정도다. 그가 작업용으로 주로 사용하는 와인은 돔 페리뇽(Dom Perignon)과 볼렝저(Bollinger)이다. 모두 청량감과 달콤함을 지닌 스파클링 와인들이다. 돔 페리뇽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식 공식 샴페인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세기의 여인 마릴린 먼로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샴페인’이라고 밝힌 술이다.
반면에 천하의 절세미녀였던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와인과 함께 당대의 호걸이었던 줄리어스시저,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등을 품에 안았다. 그녀에게 선택되었던 와인은 장밋빛 아몬드 향을 품은 브라게토(Brachetto)다. 스파클링 버블이 전하는 청량감과 로맨틱한 핑크빛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부분의 스파클링 와인이 화이트인데 반해 브라게토는 선명한 루비색을 지닌 레드와인이다. 지중해 남동부에 위치한 모나코의 왕비이자 영화배우로 활약했던 청순함과 우아함을 지닌 여성으로 당시 귀부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레이스 켈리는 페리에주에(Perrier-Jouet)를 즐겨한 것으로 전해진다. 2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닌 와인으로 전세계 유명인들의 결혼식 축하주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샴페인이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몰고 온 와인 문화
최근 “한국 소비자들의 7가지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재미있는 연구 조사가 있었다. 국내 소비자들은 ‘몸’, ‘의미’, ‘개인화’, ‘현실주의’, ‘가정’, ‘온라인 사교’, ‘이동성’ 등 7가지 핵심 키워드로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1인 가구를 필두로 우리나라 가족의 개념이 소가족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브런치 문화, 가족단위의 캠핑 문화가 확산 되었고, 이에 따른 음주문화도 독주에서 약주로, 다량에서 소량으로 변화되고 있다. 국내에도 와인은 있다. 전국에서 포도, 머루, 참다래 등을 원료로 하는 100여 종의 와인이 만들어 지고 유통되고 있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미사주로 활용했다는 국내 와인의 시초격인 마주앙(Majuang)이 종종 언급되기도 했다. 국내 유일의 동굴 내 와인 판매장도 있다. 다름 아닌 수도권 광명동굴 이야기다. 와인을 저장하는 최적의 장소가 동굴임을 감안한 광명시의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판매점에는 소믈리에가 상주하며 관람객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선별하여 추천해 주며, 조만간 와인 레스토랑도 선보일 예정이다. 2천년이 넘는 와인 역사를 새로이 쓰는 한국산 와인의 붐을 기대해 본다.
우리 일상에 와인은 더 이상 공부해야만 마시는 어려운 술이 아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는 청량감 돋는 스파클링 와인을, 장밋빛 사랑과 희망을 약속하는 신혼부부라면 가을하늘 석양을 닮은 로제와인을, 서로의 믿음을 굳건히 지켜나가기 위한 부부라면 진득한 레드와인을 추천해 본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쓸쓸함과 외로움은 배가 된다. 적당히 선선하고 쾌청한 가을날, 와인을 빌미로 사랑의 대화를 속삭여 봄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