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 심리학이 답한다
희망 없는 시대, 파랑새는 어디에
퍽퍽한 세상살이에 수명까지 길어진 요즘, “산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지금 삶이 행복하지 않으니, 앞으로라도 행복해지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산에서 행복을 찾는가?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하여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자기 통제감’을 많이 느낄수록 만족감이 커진다고 한다. 실제로 삶에 대한 통제력이 커질 때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홀로 산에 간다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바람의 표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대한민국은 저성장, 분배의 불균형, 정치적 불안, 저출산, 고령사회로 인해 높은 GDP에도 불구하고 최저의 행복지수와 자살률 최고라는 가혹한 멍에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생명을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은 뉴스만 봐도 가슴이 답답하며 불안하다고, 화병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다. 화병이 오래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SNS에서 소통할 정도가 되면 ‘대단히’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다. 화병엔 소통이 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조선’이니 뭐니 하며 스스로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는 경우도 있다. 이 세상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다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물론 힘든 세상이긴 하다. 그래도 스스로를 2파랑새 증후군에 몰아넣고 불행 속에 사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 행복해지기 위한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1 各自圖生.
제각기 살아갈 방법(方法)을 도모(圖謀)함
2 Bluebird syndrome.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 발맞추지 못하고 현재의 일에는 흥미를 못 느끼면서 미래의 막연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병적인 증상
3 Total utility.
어떤 소비자가 일정기간 동안 일정량의 재화를 소비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주관적인 만족감
4 Marginal utility.
다른 재화의 소비는 불변인 상태에서 한 재화의 1단위 추가적인 소비로 인한 총효용의 증가분
한계효용 체감의 시대, 행복하려면 욕망도 합리적으로 품어라
경제학은 인플레이션이나 실업과 같은 경제 시스템이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그리고 욕망의 소비를 통해 얻는 개인의 주관적 만족감을 효용Utility이라 하며 만족에 대해 소비가 증가하면 3총효용은 증가하지만, 각 단위의 4한계효용은 오히려 감소한다는 한계효용체감 법칙으로 설명한다. 배가 고플 때 처음 먹는 공깃밥은 큰 만족을 주지만, 두 번째는 상대적으로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돈을 많이 벌고 소비를 몇 배로 늘린다고 만족감이 계속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쾌락에 금세 적응하기 때문에 만족도가 지속되지는 않는 것이다. 정말 사고 싶거나 필요한 것을 소비해도 그러한데, 속아서 산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이 생길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소비사회는 소비가 미덕이라고 가르치고 광고는 우리를 속여 소비하게 한다. 먹방·쿡방에 중독시켜 과식과 다이어트를 하게 하고, 몸짱·얼짱과 같은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하여 남과 비교하게 하고, 과시욕과 속물근성을 자극하여 명품을 사게 만든다. 이를 통해 소비에 대한 소비자들의 기대 수준은 날로 높아지고, 상대적 결핍감 또한 함께 커져 결국 더 소비할수록 더 큰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하다. 노벨 경제학자 폴 사무엘슨Paul Samuelson의 방정식 ‘행복=소비(소유)/욕망’을 보라. 행복을 키우려면 소비(소유)를 늘리거나 욕망을 줄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 욕망이 소비보다 크고 빨리 늘어나기 때문에 행복은 커질 수 없다. 한계효용체감을 생각한다면 욕망을 줄이는 것이 행복을 늘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소비사회에서 행복해지고 싶다면, 광고가 전하는 이야기 대신 내면의 간절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합리적 욕망을 품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는 것이 행복의 출발점이다
“당신의 가치는 몇 점입니까?” 100점이라는 사람도, 50점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눈치 안 보고 자기 관점으로 점수를 줄 수도 있고, 관계 속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내릴 수도 있다. 현재를 기준으로 점수를 매길 수도, 과거나 미래를 기준으로 매길 수도 있다. 그러면 50점짜리에게 물어보자. 왜 그렇게 야박한지. 아마 현재의 만족보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확고한 관점보다는 남의 시선에서 나를 평가했을 것이다. 즉 시점이 ‘지금’이 아니고, 관점이 ‘나’가 아닐 경우, 점수가 낮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50점이라고 답한 이에게 다시 물어보자. 그 점수를 남이 매겼다면? 겸손한 척했던 50점짜리는 순간 화가 나고 좌절할 것이다. 이미 나는 나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나’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기준에 비교하며 학력, 경력, 외모, 좋은 집과 차, 명품을 소유하려 발버둥 치며 소비사회의 구성원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결국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본인도 행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지시하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학교와 종교가 가르쳐 준 대로 살아야 했고, 남의 눈치를 살피느라 내 마음대로 살지도 못했다. 그리고 소비사회는 우리가 얼마나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는지로 우리의 가치를 매겼다. 그런데 어차피 그 기준은 내 기준이 아니며, 기준에 도달해도 그 기준은 이미 바뀌어 있다. 그러므로 나의 가치를 오직 내가 선택할 때만이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더불어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는 내는 것이고, 이미 여러분의 가슴과 영감은 여러분이 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라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말을 기억하라.
당신의 인생을 재정의 하라, 그리고 당신의 인생을 살아라
“친구 같은 아빠”라는 광고 문구를 보면 내가 아빠가 되어야 하는지 친구가 되어야 하는지, 나는 엄마 역할이 좋은데 ‘여성이여, 욕망을 깨워라’고 하면 사회생활도 하고 소비도 자유롭게 하고 남자친구도 사귀어야 하는지 고민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혼란스럽다. 내가 남자인지, 아빠인지, 아재인지 정체성의 혼란이 온다. 최근 정체성의 혼란은 이성과 합리적 사고, 권위와 절대이념을 거부하고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하는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 때문이며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탈이념, 소비문화, 페미니즘과도 관련이 있지만, 100세 시대 고령사회를 맞이하여 이슈가 된 ‘젊음’이라는 키워드 탓도 크다. 노인이 많은 사회에서 젊음은 최고의 가치이며, 권력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외모지상주의는 더욱 심화되고, 젊은이들의 문화를 향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오죽하면 ‘갱춘기(갱년기+사춘기)’라는 신조어가 생기겠는가. 물론 부모·부부·친구·사제·군신 간의 역할과 의무에 대하여 교육받은 대로 살기엔 사회가 너무 많이 변했다. 하지만 사회에 순응하며 모범생 틀에서 살던 아재들에게 갑자기 이제 ‘너의 삶을 살아라’, ‘젊음을 즐겨라’라며 새로운 ‘역할놀이’를 하라면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소비사회는 사람들이 계속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만든다. 마케팅 역시 멀쩡한(문제가 없는) 소비자에게 결핍을 느끼게끔 하여 소비를 하게 만든다.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불행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두 자기만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있는데, 왜 소비사회에서 강요하는 대로 역할놀이를 하는가? 이것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우세하고 다수인 의견에 속하면 자신 있게 겉으로 표명하고, 소수 의견에 속하면 침묵한다.”는 ‘침묵의 나선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이 동조하는 것은 좋아서가 아니라 고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자, 이제 조금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소비사회가 정의해 준 역할놀이와 마케팅에 속지 말고 나, 가족, 친구, 일에 대하여 스스로 재정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고립될 것을 두려워 말고 온전히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내 마음의 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그 소리를 긍정적으로 실천하다
세계 최장기 성인발달연구를 맡아온 하버드대학교의 조지 베일런트George Vaillant는 그의 저서 《행복의 조건》에서 행복한 삶을 위한 70여 년간의 연구 결과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은 고통에 대응하는 성숙한 방어기제, 교육, 안정된 결혼생활, 금연, 금주, 운동, 알맞은 체중, 그리고 따뜻한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인생살이는 복잡해졌지만 행복한 삶의 조건은 의외로 단순하지 않은가? 이제 해야 할 일은 내 마음의 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그 소리를 긍정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나의 관점과 행동이 긍정적으로 바뀐다고 ‘세상이 변하는가’라며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우리는 긍정을 이야기해야 한다.
성인발달 연구의 대가인 윌리엄 새들러William Sadler의 말을 빌리자면, “배가 방향을 바꿔서 새로운 방향으로 향하는 데는 적절한 바람이 필요하다. 낙관주의는 우리의 배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 항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불어주는 미풍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비관주의와 냉소주의야말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며, 새들러가 말한 바와 같이 명확하고 객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성숙한 낙관주의’와 용기와 자신감, 결단력을 바탕으로 한 ‘용감한 현실주의’를 조화롭고 균형 있게 할 때 우리는 좀 더 행복하게 긴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